비행기 식도락

2025. 2. 16.

by 쿼카링

비행기를 탔습니다. 유럽까지 가는 장거리 비행입니다. 장장 14시간에 달합니다. 이런 긴 비행은 6년 만입니다. 쿼카링은 비행기를 타기 전에 몇 번이고 목숨을 거는 경험을 합니다.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닙니다. 그러나 언제나 탑승을 코앞에 두고 결론은 같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내가 오로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아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저를 빼고 모두는 여행을 눈앞에 둔 설렘에, 호기심에, 들뜸에 온몸을 맡긴 채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바로 잠에 빠져, 목적지에 도착해서 눈을 딱 떴으면 좋겠습니다. 비행기 탑승 전날 잠은 1시간만 잤습니다. 전날부터 짐을 싸기 시작에 늦게 끝난 까닭도 있었지만, 비행기에 올라 가능한 한 빨리 수면에 빠져들기 위함도 겸사겸사 목적하였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했습니다. 제가 가장 기다리던 식사 시간이 곧 시작됩니다. 비행기에서 식도락을 즐기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비행기를 싫어하는 것치고 쿼카링은 기내식만큼은 상당히 좋아합니다. 메이저 항공사를 이용해서 그런지 식사 선택지도 한식, 양식, 중식 세 가지나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한 가지를 골라 먹고 다른 하나도 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사실 그 말을 못 할 만큼 수줍음을 타는 성격도 아닙니다. 다만, 소화도 안 되고 다이어트 이슈가 있기 때문에 양식 하나를 골라 야무지게 먹기로 합니다.


승무원분이 음료는 무얼 줄까 물어봅니다. 알코올류는 있냐고 되물어봅니다. 맥주, 와인, 위스키까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맥주를 부탁드렸습니다. 통 크게도 맥주 한 캔을 따서 주십니다. 작은 플라스틱 컵에 한 잔 가득 따라서 꿀꺽꿀꺽 원샷에 맛봅니다. ‘크으~’ 이미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굳이 알코올을 섭취하는 이유는-물론 상공 9,100m에서 즐기는 맥주도 각별하지만-알코올의 힘을 빌어 빨리 잠에 빠져들기 위함입니다.

비행기에서 음식물을 쏟으면 참으로 난감하기에 주요리를 덮고 있는 은박 포장지를 조심스레 열어봅니다. 따끈따끈한 소고기 스튜입니다. 적당한 야채조각들과, 제가 좋아하는 감자 무스가 곁들여 있습니다. 바로 고기 한 조각과 야채 한 조각을 입에 집어넣고 오물오물 맛을 음미하며 먹습니다. 비행기에서는 운동량이 적어 소화가 안 될 테니, 평소보다 꼭꼭 씹어 먹으려 합니다. 참지 못하고 감자 무스를 한 입 움푹 포크로 집어서 넣습니다. 구수한 감자 향이 입안을 감돌며 행복감을 선사합니다. 아쉽게도 주요리는 금방 동이 나 버렸습니다. 맥주 한 잔 더 들이켤 때인 듯하여, 원샷에 마셔버립니다. ‘하아~’


주요리를 끝냈으니 주변 요리에 눈이 갑니다. 먼저 모닝빵을 꺼내서 한 입 먹습니다. 플레인 모닝빵이 아니라, 황치즈 모닝빵이네요. 오히려 좋습니다. 다음 모닝빵 한 입은 버터 한 스푼과 함께 합니다. 다이어트가 신경 쓰이긴 하나, 이 정도는 영양사가 고려해서 식단을 짜지 않았을까? 적당히 합리화를 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오, 버터 말고 올리브 오일도 있었네요. 로마인이 된 기분으로 다 쓴 접시 위에 살짝 뿌립니다. 그 위에 모닝빵을 찍어 한 입 베어 물어봅니다. 살짝 신내 나는 올리브향이 코를 찌릅니다. 이것도 별미입니다. 오일에 찍어 한 입, 버터 한 스푼에 한 입 이렇게 번갈아 먹다 보니 빵 하나야 금방입니다. 다음으로는 역시나 이전 기억에는 없는 치즈 한 덩어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손가락 끝으로 포장지를 벗겨내고 향을 맡아봅니다. 살짝 시큼한 것이 진짜 발효된 치즈 같습니다. 한 입 베어 물자, 시큼한 나프탈렌 향이 혀끝에 남아있습니다. 이런.. 딱히 제 취향은 아니지만, 치즈의 고장인 유럽행 비행기니까 존중해 줄 수밖에, 하며 다 먹어치웁니다. 다음으로 조각 케이크가 눈에 들어오네요. 초콜릿 케이크입니다. 단맛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건 왠지 제 입맛에 맞지 않네요. 두 입만 먹고 남겼습니다. 마지막으로 플레인 쿠키 2조각이 눈에 띕니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배고프니깐 손이 먼저 나갑니다. 아! 아까 먹고 남은 올리브 오일이 있었군요. 쿠키에 올리브 오일을 듬뿍 뿌려봅니다. 접시 위로 연두색깔 올리브 오일이 쿠키 표면을 타고 내려와 뚝뚝 떨어집니다. 와사삭. 상당히 맛이 좋습니다. 와사삭 와사삭 금방 다 먹어버렸습니다. 아까 모닝빵 먹을 때 버터를 조금 남겨두었다 같이 먹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승무원분께 버터 하나야 더 요청할 수는 있겠지만, 여기에 만족하려 합니다. 맥주 마지막 한 잔을 따라서 원샷합니다. ‘카아~’ 저런, 맥주 한 캔이 동났군요. 딱 적당한 수준으로 알딸딸 취기가 올라온 것 같습니다.


쿼카링의 주정은 아직 끝날 때가 아닌가 봅니다. 승무원 분이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두 병을 들고 돌아다니며 권주하고 계십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겠느냐고, 저도 손을 들고 레드 와인을 한 잔 부탁드립니다. 플라스틱 컵 가득 채워주시네요. 정이 많은 분입니다. 사실 와인은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는 각별한 의미부여가 됩니다. 와인만 그냥 먹을 순 없으니, 가방을 부스럭부스럭 뒤져서 챙겨 온 초콜릿 세 조각을 꺼냅니다. 게이샤 초콜릿. 품질 좋고 초코 안에 특별한 과자 부스러기까지 첨가된 초콜릿계의 최첨단입니다. 와인 한 입을 머금었다 꿀꺽 삼킵니다. 씁쓸한 포도향이 입안 가득 퍼집니다. 쓴맛에 압도되기 전에 얼른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어 달콤한 풍미를 즐깁니다. 혼자 먹기는 아까워서 용기를 내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에게 한 개 권해봅니다. 외국에 나간 저는 민간 외교관 쿼카링이니깐요. 그러나 거절당합니다. 유감스럽군요. 이것으로 민간 외교관은 맡은 바 소임을 마쳤습니다.


와인도 한 잔 다 마시고, 술도 살짝 올라왔습니다. 아까 승무원분이 커피를 권유하고 지나갔지만, 자야 되니깐 넘어갔는데, 이번엔 또 차를 들고 오십니다. 홍차의 나라에 가는데, 마냥 거절하기가 힘듭니다. “홍차 한 잔 부탁드려요.” 기어이 받아내고야 맙니다. 립톤 티백이군요. 좌석 앞 화면을 켜봅니다. 예전에 스도쿠 게임을 했던 것이 기억나 찾아보는데, 이제는 없어졌나 봅니다. 유감입니다. 순식간에 스도쿠 한 판을 끝냄으로써 제가 그렇게까지 술에 취한 것은 아니란 점을 스스로 증명하려 했는데 말입니다.


참고로 저는 영화 외에도 ‘비행정보’를 보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비행기가 어디까지 왔고, 비행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멍하니 보는 겁니다. 그런데 아주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어 있네요. ‘외부 전경’이라 하여, 전방 카메라와 하방 카메라가 있습니다. 전방 카메라는 볼 게 없는데, 하방 카메라는 상공을 가르는 비행기의 아래에 어떤 정경이 펼쳐지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건.. 정말 좋네요. 땅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안정감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한편으로는 지금 중국 국토 위를 날아가고 있는데 비행기가 이렇게 지나가며 카메라로 다 찍어본다면, 정부 입장에서는 썩 내키진 않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수면을 하겠다고 여러 포석을 깔아놓고는(전날 잠 안 자기, 알코올 섭취), 잠은 안 자고 이렇게 흥에 겨워 글을 쓰고 있는 쿼카링입니다. 큰일입니다. 비행기를 탔다는 긴장감과 알코올을 걸친 가벼운 흥분감이 묘하게 뒤섞여서, 이런 의외의 결과가 도출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억지로라도 눈을 붙여야겠습니다. 모두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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