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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Feb 11. 2024

연락에 관한 고찰

장 회고록 (3, 完)

  나와 내 친구 장은 연락이라는 문제를 두고 자주 다퉜다. 다투는 내용은 항상 달라졌지만, 감정이 상하게 된 도화선은 언제나 연락 문제였다. 누가 먼저 연락을 하는지 안 하는지 직접 따지고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하철로 2시간 먼 길을 떠나서 약속 장소인 장의 집으로 도착한 나는 감정이 상한 것을 감추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연락이라는 부분에서 자유롭고 싶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장이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지 지금에야 조금은 짐작이 간다. 시시콜콜한 문제로 시비를 걸기도 하고 선을 넘기도 하는 안 좋은 습관은 끓고 있는 국 냄비처럼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는 누군가가 연락 문제로 구속하는 일 없이 한없이 자유롭고 싶었다. 연락을 받고 싶을 때는 받지만, 연락을 끊고 싶을 때는 언제든 끊어버릴 수 있는 선택권을 쥐고 싶었다. 그 선택권은 자신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타인에 의해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들에 대한 주도권이기도 했다.


  언젠가 상한 감정이 풀리지 않아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듯 성질을 낸 적도 있다. 싸운 내용은 주로 누가 잘못을 했고, 또 누가 감정을 상하는 피해를 입었는지 따지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항상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던 장과 언쟁을 할 때는 한 개의 예외도 없이 서로 주장이 부딪혔다. 이건 맞고, 그건 틀렸다. 아니, 이렇다는 건 그렇다는 건데, 그건 말이 안 된다. 그 말은 이를테면, 이러저러해서, 요리조리하다는 건데 그건 따지고 보면 바보 같은 말이다. 그럼 이렇다는 말로 합의를 보자. 아니, 그건 나한테는 이해가 안 되는데 (무한반복)


  주로 소리를 지르고 이성을 잃는 것은 내 쪽이 많았다. 그러면 장은 자연스레 차분해지고 이성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런 기만적인 모습에 또 짜증이 난 나는 계속해서 몰아붙이곤 했다. 실제로 이성이 있는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만약 제 3자가 본다고 가정하면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았다. 내가 정말 잘못한 경우도 있었고, 장의 잘못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장은 나 같은 사람과의 언쟁에서 이기는 법을 대략적으로 감을 잡고 있는 듯했다. 장이 차분히 주장을 펼치며, 내 말을 빠뜨리지 않고 귀 기울이며, 이성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을 때, 언제나 백기를 들고 사과를 먼저 하는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흥분을 빨리 하는 만큼 반성도 빨랐다. 냄비근성을 품었다고 해야겠다. 내가 사과를 빨리 하는 만큼, 장도 내 사과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부들부들'이나 '쿼카 또 삐졌다'같은 표현을 쓰며 나를 놀리기에 집중했다. 그러면 다시 짜증이 조금 나다가, 나의 화는 그라데이션처럼 점점 흐릿해지곤 했다.


  이 모든 유치하면서 감정 소비가 되는 백해무익한 관계 패턴의 시작은 언제나 '연락 문제'였다고 지금의 나는 회고한다. 그 패턴을 유지하며 생각보다 훨씬 감정을 낭비하고, 기가 빨리는 쪽은 언제나 내 쪽이었기에, 그 패턴을 언제나 먼저 끊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장은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았다. 남아도는 에너지로 언제나 이성적이었다.(혹은 이성적으로 보였다) 근본적인 문제 원인은 항상 연락이었다. 그렇다, 꽤나 길었던 나의 회고록은 연락하는 문제를 고찰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려 한다.



  언제나 인간관계는 연락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전부는 연락을 자주 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만큼 연락을 하는 것은 서로의 관계를 위해서 중요하다. 매일 보는 사이나, 1년에 한 번 얼굴 보는 사이나 다르지 않다. 연락을 소홀히 하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시간을 쏟고 싶지 않은 것이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연락을 하지 않고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는 종영된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실제로는 일주일에 서로 몇 번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러나, 서로 얼굴을 볼 사이이기 때문에 친밀한 것과 실제로 그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에 연락까지 하는 건 좀 구분을 해야 될 것이다. 직장에서 친한 동료를 친구라고까지 부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연락은 인간관계의 핵심적인 규칙이다. 나는 그 주장에 관해서는 철회하기 어렵다. 또,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연락을 주고받는 빈도에 관한 것이다. 저마다 사람이 생김새가 다르듯, 연락을 얼마나 주고받는 것이 바람직하냐에 대한 견해도 다 다를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때,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의 차이는 이 부분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즉, 내향적이라고 친밀한 관계에서 연락을 적게 주고받기를 원하고, 외향적이라고 자주 주고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연락의 빈도는 지금까지 맺어왔던 관계 패턴에 영향을 받을 뿐이다. 확실한 건, 소수의 친구와 깊게 사귀었던 사람은 연락을 자주 하거나, 오래 할 것이고 다수의 친구를 가볍게 만나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반대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관계 가운데서 연락을 주고받는 빈도를 서로에게 맞추어 나가며 그 관계를 지속해야 된다. 맞추어 나가는 과정은, 나의 기준을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는 것뿐만 아니라, 내 기준을 상대방에게 주장하는 것도 물론 포함이다. 서로 암묵적으로라도 상의하는 과정이 있어야 되며, 합의된 내용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번복하면 안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잠수를 타는 일이 있는데, 잠수를 타는 것은 상대방과의 신뢰를 깎아먹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내가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면 스스로에게도 해로운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합의된 기준보다 더 많이 연락을 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 역시 좋지 않다는 결론이다. 연락을 주고받는 것보다 혼자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연락 선호자는 연락 기피자의 그러한 성향을 존중해야만 된다.



  예상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장의 잠수는 현재진행형이다. 연락이 끊긴 지 1년 6개월이 다 돼간다. 서로의 연락 빈도의 기준을 존중하지 못한 관계의 최후이다. 나는 장에게 작은 기프티콘 선물을 카톡으로 보냈으나, 3일이 지난 현재 아직까지 답장이 없다. 쿼카는 자존심도 없냐고? 나는 그만큼 장과 함께한 시간이 많고, 도움을 받은 것도 많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어느 힘든 시절에는 그가 나를 살린 은인이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20대 시절에는 고독이라는 무거운 짐을 나눠 짊어졌었다. 그렇지만 인생의 두 갈래길에서 서로 다른 길을 택했나 보다. 이제는 내 친구 장을 놓아줘야 할 때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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