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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Feb 10. 2024

가시를 뽑아줄 수도 없고

장 회고록 (2)

  장과 나 사이에서 가장 많이 쓰던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부들부들'이다 '부들부들'은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대화를 하다가 지나치게 열을 올려서 열변을 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의 감정을 놀림조로 이르는 표현이다. 화가 나 당혹스럽고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보일 때 부들부들 떨 정도라 하여 붙여진 말인 듯하다. 나와 장이 이야기하다가 그 표현이 나오는 때는 보통 이런 식이다.


  "너는 롤(게임) 하면 다리우스(캐릭터의 일종)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게 너 스타일에 맞아"

  "아니 나도 다른 거 해보면 안돼? 예를 들면 xx라든가. 나 그것도 막상 하면 잘할 텐데"

  "하하. 너가 그거 하면 바로 부모님 안부 물을 거 같은데"

  "와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지 않냐"

  "하하. 쿼카 또 부들부들한다"


  나는 내 기분이 유쾌한지, 언짢은지에 상관없이 '부들부들'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단어가 의미하는 감정인 화가 실제로 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매우 불유쾌해졌다. 지금 곱씹어 생각해 보니, 이건 아무래도 장이 잘못했다. 현대인의 마음 깊은 곳에 의미심장한 단어로써 저마다 존재한다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음모마저 드는 정도이다.


  장이 또 잘하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쿼카야 또 삐졌어? 라는 말이다. 나는 지금도 이 말을 굉장히 혐오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삐진 지 아닌 지를 판단하는 건 그 감정의 당사자이다. 감정의 주체인 사람이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그 감정을 쏟아붓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그 감정을 유보하는 것도, 판단하는 것도 당연히 당사자의 몫이 아닐까. 그런데 자신이 그 감정을 대략적으로 간파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삐졌다, 즉 기분이 상했다라는 의미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당해본 사람만 안다. 자신이 그만큼 눈썰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건지, 그런 감정을 표현하지도 말라고 경고하는 건지, 그 어떤 점에서 볼 때 싹수가 없다.


  물론 장은 유쾌한 사람이다. 나는 그래서 장을 눈감아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실제로 그 당시에 기분이 상했다는 것은 그만큼 장이 잘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그 잘못을 눈감아주고, 내 친구로서 좋은 점을 바라보려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 힘썼다. 왜냐하면, 장은 실제로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술한 면에 있어서만큼은 좋지 않지만, 장은 의리가 있는 편이고, 나쁜 점을 고쳐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싹수가 바가지'인 점을 빼도 장은 경이롭도록 나쁜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연락을 제때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카톡을 한다. 그는 3시간 만에 답장을 한다. 카톡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혹은 카톡을 자주 하는 사람이든, 가끔 하는 사람이든, 카톡 자체의 공식적인 성격과 중요성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를 잘 아는 사이라도, 카톡을 하는 데 있어서 서로 어느 정도의 예의는 지킨다. 그런데 3시간이 12시간이 되고, 그것도 모자라 하루, 이틀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장과 나의 사이에 있어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또한 장 혼자만의 잘못이기도 했다.


  어디서부터가 그의 잘못이고, 어디서부터가 내가 '삐진' 것인가. 어디서부터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만하고, 또한 어디서부터가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인가. 나는 장과 카톡을 하고, 연락을 주고받다 보면 극심하게 혼란스러워졌었다. 그것은 실제로 내가 예민한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장의 3일 이상 잠수를 타는 등 동굴로 들어가는 성격이 사건의 원흉이었다. 아주 필요했던 연락도 그에게 닿으면, 답장을 기대할 수 없어지곤 했다. 그의 매우 뿌리 깊은 악한 습관 중에 하나이다. 연락 안 받고 잠수를 타서 애를 태우는 습관 말이다. 나의 예민함을 극심하게 자극하고, 농락하다시피 무시했던 그날의 기억들은 어린 시절 꾸었던 악몽처럼 남아있다.


  내가 소위 집착을 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그것은, 장이 실제로 했던 일이 악의에 비롯된 일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악의'는 굉장히 조심히 써야 하는 단어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한 모든 사람들은 친구를 비롯한 타인에게 순수한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나는 저마다 조금씩은 자신의 독소 같은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대방을 향해 찌르는 가시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 가시가 장에게 있어서 '연락을 안 받는 일'이었을 것이고, 앞서 설명한 대단치 않은 것들도 해당이 될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런 것이 장이 가진 가시였음을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굉장히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일이고, 그가 가진 '가시'를 강제로 뽑아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것을 뽑아내려는 노력은 그것이야말로 '집착'이었다.


  동성친구로서 장에게 집착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나는 그가 가진 안 좋은 점을 뜯어고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로 가장 지혜롭지 않은 처신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아주 왜곡된 형태의 인류애였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으로 인지하는 뇌 영역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참견하고 잔소리하고 싶어지는 과학적인 원인이다. 즉, 가까운 사람을 마치 자기 자신 다루듯 하고 싶어지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장을 가깝게 여기기 때문에, 장의 가시였던 안 좋은 점을 뜯어고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통할 리 만무했다. 의 가시는 더욱더 날카로워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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