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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May 23. 2024

내가 함께 달리는 이유

  내가 사는 동네에는 구청 옆에 종합운동장이 자리하고 있다. 풋살, 농구, 하키 등 각종 구기종목을 즐길 수 있는 경기장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주 경기장에는 한 바퀴에 500m 정도가 되는 러닝트랙이 딸려있는 곳이다. 주 경기장은 예전에는 축구팀의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곳이기도 했고, 지금은 구나 시 단위의 큰 행사가 열릴 때 자주 동원되기도 한다. 넓은 실외 주차장을 가로질러서 가다 보면, 큰 주 경기장의 높은 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벽에는 작고 비밀스럽게 나 있는 문이 있다. 영화 <트루먼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그 문처럼, 그 존재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데, 그곳엔 광활한 잔디 축구장과 그 둘레를 빙 두르고 있는 빨간색 러닝트랙이 펼쳐져 있다. 구분선이 그어진 7개의 트랙을 따라 걷고 뛰는 사람들은 낮밤에 관계없이 많이 볼 수 있다. 문으로 들어가서 빨간색 트랙을 러닝슈즈로 밟으면 항상 마음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얼른 다리를 움직이고 발을 구르고 싶지 않냐고. 그러면 해묵은 피로와 쌓인 스트레스를 몇 분의 뜀박질로 날려버리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해진다.


  퇴근 후에 오늘도 거르지 않고 러닝슈즈의 끈을 매고 종합운동장으로 향한다. 같이 동행한 나의 엄마인 숙씨도 함께였다. 걸어서 가기에는 먼 거리라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한다. 이동하는 동안 그녀와 나는 각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운동하기 위한 나름의 준비를 한다. 달리기를 하기 직전이라는 몸을 풀라는 신호를 각자의 몸에 전달하는 일이라서 이 과정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버스에서 내려 널찍한 실외 주차장을 지나서 주 경기장에 도착한다. 숙씨와 나는 별말 없이 다음 과정인 준비 운동을 하기 위해 자리를 잡는다. 구호를 말하며 목 스트레칭부터, 어깨, 허리, 다리까지. 간단하지만 빠짐없는 스트레칭이 끝나고 난 뒤에는 러닝트랙을 밟으며 각자의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달릴 준비를 한다. 나는 일찌감치 운동 어플의 시작 버튼을 누르고 거리와 시간을 측정하며 뛰기 시작한다. 뛰면서 뒤를 바라보니 오늘도 숙씨는 아직 뛰고 있지 않다. 조금 걷다가 여유롭게 출발하는 게 습관인 그녀이다. 


  숙씨는 몇 주 전부터 퇴직을 결심했다. 50대 중년 여성인 그녀가 퇴직을 결심한 이유는 어떤 다른 계획이 있어서인 것은 아니었다. 다시 취업을 할 생각이 있기는 했지만, 다른 좋은 직장에 다닐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직장을 지속해서 다니지 못할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유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단지 쉬고 싶어서였다. 숙씨는 자식 셋을 키우고 대학까지 보냈다. 남편의 실직 소식에 살림까지 도맡아 하며 업무 강도가 높은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자신이 다니는 직장을 소개해서 남편인 진씨와 같이 근무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빚을 갚기 위해서 계속해서 일했다. 시간이 지나서 결국엔 빚을 다 갚고, 자식 셋이 모두 취업을 했을 때에도 숙씨는 자기와 진씨의 노후를 위해서 진씨와 함께 계속해서 일하고 돈을 벌었다. 그러나 이제는 진씨를 비롯한 우리 가족이 모두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더 이상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벌이가 좋지만, 고되고 힘든 노동을 억지로 하며 긴장과 스트레스를 안고 살 필요는 없다. 나는 러닝 트랙의 한 바퀴 이상을 돌고 숙씨가 조깅 페이스로 달리고 있는 것을 본다. 그녀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달려 나가고 있다. 숙씨보다 오래 달리기를 지속해 온 선배인 나는 그녀를 앞질러서 달리기 시작한다. 그녀와 나란히 달리고 싶지만, 달리기 시작한 초반이니만큼 나는 내 페이스로 달리고 있다.


  숙씨는 결국 며칠 전에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그녀가 일하던 공장은 업무 강도가 워낙 세고, 직장 동료들의 성격들도 괄괄하고 드세서 항상 집에 돌아오면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소연을 하는 게 일상 다반사였다. 정신없는 기계의 소음 속에서 그녀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머리와 턱을 감싸는 하얀 작업용 모자를 쓰고, 역시 하얀 작업복을 걸쳤다. 새하얀 밀가루 반죽이 튀어도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 쉬지 않고 열심히 팔과 허리와 어깨를 움직여 가며 반복적인 작업을 한다. 민첩한 몸동작으로 바쁘게 케이크의 생크림을 펴 바르기도 하고, 생크림으로 디자인을 하기도 하고, 장식을 올려놓기도 한다. 나는 케이크의 빵을 만드는 과정들을 세분화해서 여럿이 작업하는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녀의 옆 동료직원은 기계의 큰 소음에 의해 사소한 정보도 고함을 쳐서 전달한다. 그녀는 쉴 틈 없는 작업에 어깨가 결리기도 하고, 한겨울에도 진땀이 나기도 한다고 했다. 화장실조차도 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갈 수 없다. 하루에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3번 정도의 기회가 주어질 뿐이었다.


  각자의 페이스대로 달리기를 이어가며 숙씨와 두 번째로 마주치기 시작했을 때 그녀와 나란히 달리며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본다. 숙씨의 옆얼굴을 보니 꽤 지쳐 보이는 표정이다. 팔과 다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서 잘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고, 지쳐서 눈은 조금 풀려있다. 달려 나가면서 옆에 붙게 된 나를 발견하자 숙씨는 나에게 수건을 건네며 땀을 닦으라고 말한다. 나는 숙씨에게 달릴만하냐고 묻자, 그녀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야 그 고된 노동의 시간을 조기 퇴직으로 마무리한 숙씨는 가끔 은연중 감출 수 없는 기쁨을 표현한다. 웃으면서 한다는 말씀이 "이제 아빠가 집에서 논다고 뭐라고 하면 쿼카가 도와줘야겠네"였다. 아직도 직장에서 벗어난 생활이 익숙지 않은지 다른 일자리를 빨리 찾아보려고도 하신다. 그러다가 퇴직금을 계산해 보고 내심 흐뭇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액수를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어떻게 굴릴지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이기도 하는데, 그러한 모습들 가운데서도 확실히 느껴지는 건 아직 전업 주부로써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일에 묘한 낯섦을 경험하신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런 모습에 평소 그녀와의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숙씨가 현재 생활에 좀 더 익숙해져서 결국 지금에 만족하고 즐거워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언제까지나 건강을 위해 꾸준히 즐겁게 해야하는 운동을 고된 노동으로 지쳤다는 것을 핑계삼아서 덮어둘 수는 없었고, 마침 숙씨가 퇴직을 한 것이다.


  숙씨와 나란히 한 바퀴를 모두 달렸을 때, 숙씨는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나에게 말한다. 나는 마지막 한 바퀴만 달리고 가자고 숙씨에게 말한다. 숙씨가 전업주부이자 진씨의 아내이자, 나의 엄마로서 숙씨가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한 것들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한다. 그녀는 집에만 있어도 어떻게든 일을 만들어서, 집안일이나 방 정리 같은 것들을 쉬지 않고 부지런하게 하는 스타일이다. 역시 그런 스스로의 부지런함을 감당해 내기 위해서는 좋은 체력이 필수일 것이다. 그리고 직장에 다니는 나와 진씨를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밝고 활기찬 마음도 필요할 터이다. 그렇기에 나와 숙씨는 오늘도 같이 운동을 한다. 나는 가족과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퇴직이라는 결정을 한 그녀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사랑은 마음으로만,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기에 오늘도 숙씨와 함께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들을 기쁨으로 지속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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