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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쿼카의 하루 Aug 29. 2024

워라밸의 실상

현실로 대체할 수 없는 꿈에 대하여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를 줄인 말인 워라밸이 우리나라에서도 어느새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이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자기에게 뜻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한다면, 조금 망설여질 것 같다. 직역하게 되면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이 되는데, 일하는 시간은 삶이 아니란 말인가. 고심한 끝에 통용되는 의미로 말한다면 '일과 여가의 균형'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의역하면 어쩐지 약간은 밋밋한 느낌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이 용어의 '삶'(life)이라는 부분에 숨겨진 의도를 놓쳐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내 식대로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생계를 위한 일의 시간과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시간의 균형' 1970년대 영국의 여성 노동자 운동가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 용어는 생계를 위해 돈벌이를 해야만 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자주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계만을 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만한 사람은 그러한 워라밸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소수이기는 하나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그다지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맞다.


  고민도 많고 탈도 많던 20대 초반시절. 그 때 나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금융권 회사 직원들이 캠퍼스를 걸어다니는 학부생들을 붙잡고 있었다. 대학생 대상의 연수 과정에 대해서 홍보중이었던 것이다. 나를 붙잡고도 호기롭게 홍보지를 펼쳐들었다. 나에게 연수과정과 인턴으로 채용될 수 있는 기회들에 대해 설명하다가, 장래에 어떤 직업을 생각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때 당시 나는 대다수의 중소기업으로 대표되는 사기업의 악명높은 소문에 익숙했다. 야근을 많이 한다, 야근을 해도 수당을 주지 않는다, 경쟁에 치이고 회식에 지친다 등. 그래서 상대적으로 여건이 여러모로 편하다는 공무원에 대해 많이 알아보고 공부할 생각도 하고 있었던 나는 공무원이라고 답했다. 그러더니 그 직원은 "아 저녁있는 삶같은 게 꿈이시구나"라고 말했고 나는 납득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몇 마디를 주고받고 갈 길이 다르구나 싶으셨는지 곧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 이후로 소심하게도 '저녁이 있는 삶이 꿈이라는 게 사실은 이상한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봤던 것 같다. 그리고는 왠지 내가 초라해보이기도 했고,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꿈이라든지, 로망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라 그저 저녁있는 삶일 수 있다는 것이 당장의 막막한 현실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엔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실감하고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 같다. '저녁있는 삶'으로 대표되는 워라밸을 위해서. 그 이후로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공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워라밸이라는 단어와 공무원을 많이 뽑는다는 기사에 힘을 내어 열심히 공부했고 운도 많이 따라 줘서 임용이 되었다. 내년에는 임용된지 3년차가 되고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은 합격의 기쁨과 공무원이라는 자부심은 거의 소멸되어 사라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달려왔던 동력이 꿈과 열정이었다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고 깨닫고 있다. 단순하고 딱딱한 지식을 요하는 공직의 업무는 재미가 없고, 안정을 중시하는 조직 문화는 다소 경직되어있다는 인상을 주곤 한다.


  요즘의 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공무원이 꿈일 수는 있으나, 워라밸이 꿈일 수는 없다고. 워라밸의 실상은 경제적 자유의 완벽하지 않은 대체재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자유를 누리고,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임을 넘어설 때, 워라밸을 논할 필요는 없어진다. 어른들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 일을 직업으로 삼으라는 말을 괜히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서야 내가 꿈을 버리고 현실을 택한 것이 후회가 된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방치해두었던 꿈을 조금이나마 다시 세우기 위해 이 글을 쓴다.


2023. 12. 29.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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