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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Oct 10. 2024

마라크림햄버거 만들기

물론 대학원 이야기입니다.

    시월입니다. 가을이네요. 시를 좋아하는 저에게는 이름부터가 마음에 드는 달이지만, 징검다리 연휴를 퐁당퐁당 건너고 나니 벌써 시월 하고도 중순이 되었네요. 어제는 한글날 겸 중간고사 전 문뜨 마지막 뒷풀이라고 또 거창하게 즐기고 널브러져 있기도 했습니다. 잘 놀고 있는데, 사실 엄청 바쁜 시간이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가장 고단한 연말을 보내게 될 것 같고요. 근황 전하고 싶은데, 자세한 이야기를 풀기에는 조심스럽고 또 바빠서 그냥 가볍게, 요즘 제가 어떤 상황인지 비유 하나를 들고 와서 이야기드려보겠습니다. 뇌 빼고 읽어주세요.


1. 대전의 한 요리학교. 그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맛보고 싶다는 이유로 이곳에 온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5년째 요리사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참 많은 일이 있었어요. 한식, 양식, 심지어 중식에 인도 음식까지, 주인님, 아니 선생님이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단 했던 나였으니까요. 참... 많은... 일들이 있었죠. 밥을 하래서 쌀을 씻어 안치면 저쪽 가서 피자 도우를 반죽하라고 하질 않나, 그래서 또 손을 밀가루 범벅으로 만들면 그건 됐고 만들던 밥으로 볶음밥을 완성하라고 하질 않나. 결국 죽도 밥도 되지 못한, 새까맣게 탄 누룽지를 밥솥에서 긁어낼 때면 나는 도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싶기도 했습니다.


2. 요리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레시피를 읽고, 재료 손질을 하고. 데이고 베이는 것은 일상.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나만의 개성을 더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하다 보면 아주 가끔, 먹을만한 게 나옵니다. 그럼 조리법을 조금씩 바꾸고 간을 맞춰가며 수십, 수백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세상에 요리를 선보이는 겁니다! 물론 알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잔인한 비평가들이 내 자식 같은 음식 앞에 혹평을 쏟아내는 것만이 부지기수. 결국 소비기한이 지나버리는, 처음 모습 그대로의 잔반 접시를 받아 들면 나는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던 그 음식을 다시 입에 욱여넣으며, 목메임을 울음 삼켜 참으며, 먹고사는 일의 의미를 헤아려야만 했습니다.


3. 그러던 내가, 햄버거를 만들어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은 작년의 일이었습니다.


4. 평범한 햄버거. 근데 이제 장조림을 곁들인. 이게, 고기가 간장에 살짝 조리면 정말 맛있거든요. 결을 살린 고기로 식감의 재미를 줘서, 드시는 내내 약간 그... "나야, 장조림" 그... 파, 파도 맛있습니다. 물론 여기 들어간 건 양파지만.


5. 그래서 저는 졸업하면 버거집을 차리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너무 많거든요. 저는 원래 맥도날드 좋아하고. 이제 제가 경험을 해보니까, 결국 이 세트는 철거가 되기 때문에, 다 떠날 거예요. 마음을 비우고...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기쁨은 다 허구다. OHW(One-hit wonder)가 되지는 말자. 한식을 하고 싶었습니다. 근본 있잖아요. 꼭 음식점을 차리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한식의 길을 정진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말했습니다, "어림 없지."


6. 그러고는 나에게 새로운 과제를 주셨습니다. 연말까지 중화풍의 양식 퓨전 햄버거를 만들어라. 마지막 요구가 될 테니, 이건 네가 책임지고 완성해라. 거절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이곳,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솔직히 할만해 보였거든요. 곧바로 계획서를 썼습니다. 요즘 로제-햄버거가 또 나왔다던데, MZ 트렌드가 로제에서 마라로 넘어간 게 벌써 꽤 됐거든요. 저는 마라-로제-햄버거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것이 로제-햄버거보다 맛있으면 성공인 거잖아요? 그것이 올해 초의 일이었습니다.


7. 분명히 로제-햄버거가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조리대 앞에 서서 레시피를 꼼꼼히 읽어보니, 뭔가 수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이 로제 소스 정체가 뭔데. 고추장 기반이냐, 토마토 기반이냐. 로제-햄버거를 개발했다는 사람들마다 이야기하는 방법이 달랐고, 그 로제-햄버거를 실제로 먹어보았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른 로제-햄버거를 판매하라는 사람들의 원성을 들으며, '혹시 속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이 바닥이 이렇습니다. 나는 레시피의 빈 곳들을 축적한 요리 지식과 시행착오를 통해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로제-햄버거. 맛이... 없어..?!


8. 마라-로제-햄버거는 로제-햄버거가 일반 햄버거보다 맛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창작 요리였습니다. 햄버거의 구조적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로제 소스를 추가하는 원리를 응용해서, 마라 맛 한 스푼을 더하면 끝나는 간단한 과제였죠. 그런데 로제-햄버거가 아무리 배합을 해봐도 맛이 없었습니다. 동료와 머리를 맞대고 며칠을 고민해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101번째 로제 소스가 실패하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에서 로제 소스의 메슥거림이 느껴지기에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도저히 안 된다고, 나는 못 하겠는데 어찌하면 좋을지 알려 달라고. 적어도 시간이라도 더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9. 그런데 선생님은 내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어, 그래 앉아라. 네가 온 지 몇 년이 됐더라? 슬슬 나갈 때 됐지. 이거 하나만 잘 마무리하고, 이제 가거라. 이것만 딱 네가 잘 마무리하면 그만 나가도 좋다.


10. ... 그래서 요즘 저는 마라-크림-햄버거를 만드는 중입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로제가 안 되면 크림으로!! 생각해보니 마라+로제는 좀 너무 매울 것 같죠? 마치 선생님이 채찍 끝에 달아 흔들던 당근처럼요. 갑자기 새로운 아이디어와 열정이 샘솟습니다. 몸에 누적된 피로는 그대로인데, 왠지 지금은 쉬면 안 될 것 같달까요? 11월 중순까지 만들어야 하는데,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걸 해내야 요리사 아닐까요? 그 다음에는 선생님께 프로포즈를 하려구요.


주인님, 당근을 흔들어주세요. 그러면 저는 마지막까지 춤을 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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