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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피 흘리는 사랑이 있다

헌혈, 해볼래요?

by 인용구

2024년 1월, 새해를 맞아 결심한 새로운 습관 중 하나는 '헌혈하기'였다. 1일은 공휴일이라 헌혈이 불가능하다기에, 2일 저녁 시간을 예약해서 퇴근 후 헌혈센터를 찾아갔다. 그렇게 인생 첫 헌혈에 도전했다. 처음 찾아간 낯선 공간에서 헌혈 전 간단한 문진을 하는데, 긴장한 탓인지 혈압이 조금 높게 나왔다. 다시 측정해도 여전히 높다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계단을 뛰어올라와서 그런 것 같아요"라며 핑계를 댔다. 잠시 밖에서 쉬었다가 다시 재도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선생님이 잠깐 고민하시더니 "괜찮을 것 같아요. 대신 밖에서 물 마시고 조금 쉬었다가 하시죠,"라고 말했다.

첫 헌혈이시네요, 하면서 헌혈 과정과 부작용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께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제가 옛날에는 채혈할 때도 좀 긴장을 많이 해서, 채혈 쇼크? 그 막 입술이 하얘지고, 숨도 못 쉬고, 어지럽고 한 적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그러자 선생님의 표정에 살짝 걱정이 묻어 나오기에, "근데 헤드폰 끼고 바늘 안 보고 하면 또 괜찮거든요. 옛날 얘기예요, " 하며 또 둘러댔다. 선생님은 진짜 괜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워서 하고, 끝나면 또 지혈하는 동안 앉아서 쉬면 괜찮기는 할 거예요. 근데 너무 힘들면 오늘 꼭 안 하셔도 괜찮아요."

꼭 안 하셔도 괜찮아요. 그러게요, 그래도 꼭 하고 싶어요.


이유는 사실 한 친구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잔디 군, 그 멋진 녀석 때문에. <착하게 살자> 글에서도 한 번 언급한 그 친구는 옛날부터 헌혈을 했다. 캘린더에 다음 헌혈 가능 날짜를 저장해 놓고,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했다. 헌혈을 하려고 그 좋아하는 술도 전날은 의식적으로 마시지 않았다. 왜 하냐고 물어보면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으니까," 라고 답하는 놈이었다.

이 친구는 심지어 2021년에는 조혈모 세포 기증까지 했다. 그러니까 얘는 이미 1인분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 20대에 벌써. 너무 존경스럽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이 친구가 너무 멋있어서 헌혈을 해보고 싶었다. 그냥 해보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헌혈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바늘이 무섭다는, 피 뽑는 건 아프다는 그런 나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선한 일을 하고 싶었다.

헌혈은 숭고한 일이다. 누군가를 위해 피 흘리는 거, 그거 예수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시간 조금 할애하면 나도 사랑을, 생명을 나눌 수 있다. 그런 거창한 의미 부여를 맘속으로만 작게 해 보면서, 헌혈에 도전한 것이다.


헌혈에 사용되는 바늘은 일반 주사 바늘보다 조금 더 굵다. 짧은 시간에 피를 뽑아야 하고, 적혈구의 손상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링거 한 번 맞아본 적 없는 나에게는 너무나 큰 두려움이었지만,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이 될 것 같아서 침대에서 기절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해보자는 각오로 누웠다. 따끔, 했는데 뭐 모든 주사가 그렇든 아픔이 오래가진 않았고. 대신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 피가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주먹을 쥐었다 피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데, 그렇게 힘을 줄 때마다 주삿바늘이 팔 속에서 조금 눌리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아파도 일단은 전문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맞겠다 싶어서 열심히 잼잼(?) 했다.

전혈은 피 뽑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헌혈을 마치고, 과자랑 이온음료를 받아 지혈하는 동안 기다리는데 좀 많이 뿌듯했다. 약간 긴장했던 놀이기구를 무사히 타고 내려온 듯한 느낌. 피식 웃음이 나고, 별 거 아니네? 같은 자신감이 붙으면서 스스로가 많이 자랑스러웠다. 이것을 늘상 해냈을 잔디를 생각하며 '내가 너 때문에 이런 것까지 해본다,'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응, 솔직히 내가 헌혈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피를 필요로 할 이름 모를 누군가를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예수와 같은 박애주의자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너를 생각했다. 착하고 멋진 나의 친구를 닮고 싶어서, 그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너로 인해 한 사람이 선행에 동참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했다. 그것도 사랑 아닐까.


막 자랑하고 싶었는데, 고작 한 번 해놓고 생색내기에는 곁에 일상처럼 하는 놈이 있는지라 1년은 꾸준히 할 수 있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으니. 자랑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작년에 헌혈을 꾸준히 했다. 적혈구까지 피 전체를 뽑는 전혈의 경우 한 번 하면 8주 후에 다시 할 수 있고, 1년에 총 5번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작년에 헌혈을 5번 했다. 오늘 6번째 헌혈을 하고 오는 길이다. 브이~~v^^v

뿌듯

나름 다음 헌혈 가능 날짜를 기록해 가며, 바쁠 때도 신경 써가며 열심히 했는데 고작 다섯 번밖에 안 되지만. 1년 해보니까 알겠다,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헌혈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겠구나. 두 달에 한 번 정도만 용기를 내면 된다. 아픔보다 얻는 기쁨이 크다. 헌혈을 도와주시는 선생님들도 마치 내가 되게 훌륭한 일을 해낸 사람처럼 친절하게 잘 대해 주시고, 영화 티켓을 비롯한 여러 사은품도 받는다. 물론 그런 것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사랑을 실천했다는 효능감이 있다.

한편으로는 헌혈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다. 생각보다 헌혈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다양해서, 몸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헌혈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1년에 한 번 정도 정밀 피검사를 해준다는 것도 헌혈의 한 장점이 되겠다.

그리고 또 하나 헌혈을 하면서 기뻤던 것은, 내가 헌혈을 하는 이유를 듣고 또 헌혈에 동참한 다른 친구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엄밀히 말하면 잔디 덕분이긴 하지만 저의 역할도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요? 농담이고 아무래도 상관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네가 얼마나 멋진 놈인지 알았으면 좋겠어. 조용히 아무 흔적 없이 살다 잊히고 싶은 삶이라고 했지만, 네가 존재만으로 발휘하는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배우고 싶은지 알았으면 좋겠어. 너 때문에 나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존경합니다


...뭐 그런 얘기다. 헌혈, 해주세요 여러분. 저를 뿌듯하게 해주세요. 사랑합니다. 사랑합시다~~


2025년 첫 선행 성공~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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