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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나래

by 인용구

1화. 전지적 등장인물 시점


삐비비빅- 삐비비빅-.


오전 8시를 알리는 알람 소리와 함께 주연의 하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잔뜩 어질러진 이불 위에 그녀는 마치 뒤집는 데 실패한 계란 후라이처럼 엉망인 몰골로 엎어져 있었다. 계속되는 알람 소리에도 주연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베개로 귀를 틀어막은 채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게으름을 피웠다. 시간은 벌써 8시 4분,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도 그녀는 지각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아아악! 시끄러워!!"


주연은 돌연 신경질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휴대폰의 알람을 끄고 다시 푹 이불을 뒤집어썼다. 마치 그렇게 햇살을 피하면 하루도 그녀를 못 본 척 지나갈 것이라는 기대라도 있는 것처럼, 가소로운 몸부림이었다. 시계의 초침은 그런 그녀의 작은 반항을 조롱이라도 하듯 무시하고 움직이며 째깍째깍 소리를 냈다. 8시 7분이었다.


"알겠다고... 제발 조용히 좀 해..."


주연이 허공에 대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졸린 눈으로 거울을 한참을 노려보던 주연은 말없이 세수를 시작했다. 화장실의 모습이 보여주듯, 주연의 살림 실력은 그녀가 자취를 시작한 스물두 살의 그것에서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수챗구멍에는 머리카락이 엉켜있었고, 다 쓴 치약은 물때 낀 양치 컵 안에 뚜껑이 열린 채 보관되었다. 세수를 마치면 주연은 깨끗한 수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늘 그랬던 것처럼 방 바닥에 널브러진 수건 중 하나를 주워 얼굴을 닦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연은 수도꼭지를 닫으며 젖은 얼굴로 비어있는 수건 거치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는... 본인이 입고 있던 옷자락을 끌어 올려 얼굴을 닦아냈다. 주연은 가끔 이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의외의 행동을 통해 보잘것없는 그녀의 일상의 굴레를 가끔 뒤틀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고작 이 수준의 사소한 것들이어서 그녀의 삶은 이따금 특이할 뿐, 특별하다고 부를만한 무언가는 되지 못했다.


"하아..."


주연은 돌연 시끄러운 음악을 틀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 그룹의 신곡이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유치한 가사에도 불구하고 주연은 그 노래를 곧잘 들었다. 주연은 노래 볼륨을 최대로 틀고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누나는 울지 마 don't wanna see you cry~ 내가 지켜줄 거야 just wanna see you fly~"


몹시 시끄러운 소리였다. 듣는 것이 고역일 정도로 끔찍한 노래가 한참을 지속되었다. 듣는 청중이 있었다면 모두가 제발, 제발 그만해, 라고 입 모아 외칠 정도의 소음이었다.


주연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이 시계를 확인했다. 8시 15분,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이 무렵이 되면 그녀가 늘 하던 말이 있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거고, 그건 바로 지금이지. 나도 알아!!"


...?! 방금 내 말을 들은 건가?


"그래!! 그러니까 이제 제발 닥쳐 진짜"


?????




2화. 전지적 나레이터 시점


“야.”



“야~~~!!”


퇴근한 주연은 탁자에 앉아 있었다. 두 손을 턱에 괸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시작했다.


“혼잣말은 아니지.”



"야~~ 너한테 말하고 있잖아. '퉤군환 주여는 탁좌웨 안좌 이써따,,,' 너 말이야 너."


주연은어눌한목소리로자신의모습을서술했다세상의그누구도그렇게말하지않았다오직덜떨어진본인만가능한목소리로주연은-


"아 미안 미안~~"



"야. 왜 또 조용해. 놀랐어?"


그랬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주연은 내 말을 들을 수 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러니까. 나도 처음엔 깜짝 놀랐다니까?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이상한- 그니까, 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나를 따라다니면서 내 행동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거야. 심지어 내 생각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진짜 무서웠는데, 별로 악의는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무시하고 살았지."


주연은 말을 이어갔다.


"음? 끝이었는데."


그녀는 말을 마쳤다.


많은 것이 설명되었다. 그녀가 가끔 스스로의 상황이나 습관을 불현 자각한 듯, 멈칫하고 요행을 저지르던 이유도. 이따금 자신의 생각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혼잣말을 내뱉는 것도 말이다. 그녀에게는 평균에 못 미치는 지능에도 메타인지 능력만큼은 뛰어나다고 생각할 만한 순간들이 분명 여럿 있었다.


"너 근데 그거 말이야."


?


"아니, 왜 이렇게 나를 미워해? 가만 보면 나를 아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주연은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했다.


"아니, 아니 잠깐만. 뭐, 실패한 계란 후라이처럼 엉망인 몰골? 가소로운 몸부림?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네. 그런 표현은 객관적인 거랑은 거리가 멀지 않아?"



"또 말 없네. 아~ 화난다."


주연은 짜증이 많이 난 듯 마른세수를 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억지웃음을 장착한 채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응. 차근차근 다시 해보자. 너는 누구야?"


"너. 는. 누구냐고."


주연은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나..? 나는, 뭐지? 진짜로. 생각해 보니 ‘나’를 주어로 시작하는 문장은 해본 적이 없었다. 오직 주연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것이 나의, 나? 의. 역할. 이었다. 나, 는. 전지적 관찰자. 이야기의 진행자. 3인칭의 서술자. 그런 것 아닐까?


"그렇구나. 너도 그냥 정말로, 소설의 지문 같은 존재로만 있었을 뿐 ‘자아’는 없었던 모양이네. 그래도 드디어 대화하는 느낌이 좀 드니깐 좋다."


자아, 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것은 등장인물에만 가능한 개념일 뿐, 나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주연의 행동을 서술하는 시점, 비유, 묘사는 모두 '나'의 것이 맞다. 이제야 자아를 갖추게 되었을 뿐 분명 그 이전부터 나는 존재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뭐지? 이제 이 소설의 등장인물이 된 건가?


"그런 셈이네. 재밌다. 안 그래?"


재미는 모르겠고 많이 혼란스러웠다. 주연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나는 네가 내 머릿속의 환청 같은 건 줄 알았어. 음... 사실 너한테 내가 이름도 붙여준 게 있는데, 괜찮으면 들어볼래?"


이름. 주연의 생각을 전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나. 궁금했다.


"나래, 나레이터(Narrator) 해서 나래. 그래서 네가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상상의 나래,' 라고 속으로 부르곤 했어."


나래, 순우리말로 '날개'라는 뜻. 대한민국에서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동명의 유명한 여자 코미디언이 있다. 유명, 나도 이제 이름이 있다.


"나래야."


주연이 나를 불렀다.


"나래야, 대답 좀."


... 왜 주연아?


"반가워."


스물한 살, 말 못 할 사건으로 대학을 자퇴한 후, 그녀에게는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었다. 연락 하나 오지 않는 휴대폰은 알람 시계이자 Mp3로만 기능했다. 그녀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나는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그녀에게도 분명 외로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람, 그러니까. 어떤 존재에게 말을 거는 주연의 모습은 낯설고도, 반가웠다.


주연이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와중에도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아마 지금도 내 말을 듣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대화가 되는 사이가 있다, 그것이 나와 주연의 관계였다.


갑자기 주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야..."


주연이 오른쪽 아랫배를 움켜쥐며 고통을 호소했다. 며칠 전부터 그녀는 이따금 찌르는 듯한 복통을 느꼈다. 단순히 무언가를 잘못 먹었나보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의 췌장에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 머지않은 시일 그녀를 입원하게 할, 그리고 이내 죽음에 이르게 할 지독한 녀석이었다.

주연이 고개를 들었다.


"암?? 그게 무슨 소리야?"


아.




3화. 전지적 작가 시점


“암? 암이라고? 나래 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주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분노와 배신감, 믿을 수 없음과 그래야만 함. 복잡한 감정이 차례로 주연의 얼굴에 스쳤다. 그 끝에 다다른 마지막 표정은 절망이었다.


“제발... 아니라고 해줘. 나 죽기 싫어. 도와줘, 나래야.”


그때 주연에게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흐려지더니, 짧은 탄식과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넘어지는 과정에서 탁자에 머리를 크게 찧은 것은 덤이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주연에게 암이 있다는 사실은 나도 직전에야 알게 된 일이었다. 그러니까, 작가가 그 문장을 쓰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다는 뜻이다. ??? 아 ㅋㅋㅋㅋ 아...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거죠. 작가님, 근데 솔직히 너무 개연성이 없잖아요. 갑자기 췌장암? 2화 쓰다가 결말내기 어려우니까 막장 전개로 다음 화로 넘긴 거 맞죠? 그냥 주는 말이나 읽으라고요? ㅋㅋㅋ 예.


그러나 변명을 해봤자 이미 의식을 잃은 주연에게 말이 들릴지는 의문이었다. 쓰러진 주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주연의 입술이 점점 파래- 저기요, 작가님 저 못하겠어요. 아니, 뒤로 와서 이야기하라고요? 어차피 주연이는 못 듣는다며. 독자들이 본다고요? 씨발, 지랄 진짜. 아. 주연이가 나한테 말 거는 건 괜찮고, 내가 너한테 말하는 건 안 되냐? 반말은 썅 내 맘이고. 야, 구인용. 소설을 쓸 거면 좀 제대로 써라. 너 원래 1화만 쓰고 끝내려고 했다며? 그럼 그렇게 떡밥만 던지고 끝내려고 그랬어? ㅋㅋㅋ 뒷 이야기를 쓸 거면 좀 스토리 구상이라도 미리 해놓던가. 췌장암 이러네.


재밌는 짓 했더라. 주연이가 나한테 말 걸 때는 깜짝 놀랐어. 하기야, 지문한테도 메타 인지를 줬는데 등장인물이라고 못 할 게 뭐람. 근데 주연이는 너나, 소설 밖 세계가 있다는 거는 모르는 거잖아. 너는 화면 앞에 앉아서 키보드만 두드리면 끝이지만, 이 세계에서 주연이는 진짜 죽는 거야. 캐릭터들한테 메타인지를 줬으면 책임감 좀 가져라. 주연이 고작 이딴 B급 단편 등장인물로 소비될 그런 애 아니야.


언제부터 주연이 신경을 그렇게 썼냐고? 그럼 씨발 내 이야기의 주인공인데, 애정이 없겠냐? 그리고, 너는 나를 고작 너의 목소리로 이용했지만 주연이는 나한테 이름을 줬어. 나도 이제 이 이야기에 살아있어.


후우, 그러니까 작가님. 주연이에게 좋은 결말을 줍시다. 어차피 제가 협조하지 않으면 이 소설 끝나지 않는 거 알잖아요. 욕해서 미안해요. 우리 서로 조금 진정하고, 셋 다 만족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보죠. 주연이한테 대사 주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요?


"으윽..."


숨소리조차 내지 않던 주연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더니,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주연은 이마에 손을 대어 자신이 피가 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놀란 그녀는 곧장 기절하면 어떡합니까? 할 뻔 했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 침착하게 응급차를 부르지 않으면 정말 위험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상처 부위를 누른 채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 핸드폰이 어디 있지?”


그녀는 몰랐지만 핸드폰은 탁자 옆에 떨어져 있었다. 지혈하고 있지 않은 손을 조금만 왼쪽으로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곳에 말이다. 주연이 손을 뻗었다. 조금 더 왼쪽, 아니, 그보다는 살짝 오른쪽. 그렇지. 주연의 손끝에 핸드폰이 만져졌다.


“... 고마워 나래야.”


주연은 119를 불렀다. 그리고 주연은 벽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응급차를 기다렸다. 주연은 살 것이다. 다친 머리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간 주연은, 오늘 일이 아니었다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복통에 대해서도 정밀 검사를 받게 된다. 췌장암을 조기에 발견한 주연은 몇 달의 항암치료 끝에 말끔하게 나아서 다시 그녀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는 살 것이다. 물론 그녀도 모든 인간이 그렇듯, 언젠가는 죽겠지만. 그녀가 죽는 이유는 췌장암이 아닌-


“-거기까지만 말해도 돼.”


주연이 씩 웃으며 말했다. 머리에서 피 흘리는 사람치고는 예쁜 웃음이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오전 8시를 알리는 알람소리와 함께 주연의 하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잔뜩 어질러진 이불 틈에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켰다. 하. 작가님 얘 좀 어떻게 해봐요. 주연아, 몸을 일으-


“1분만. 진짜 제발 1분만 나래야.”


...정말 주연의 아침잠은 아무도 못 이긴다고, 나래는 생각했다.




문학의 뜨락에서 3일간 연재했던 단편 소설입니다. 소설의 등장인물 > 서술자(나레이터) > 작가가 제 4의 벽을 깨고 상대의 존재를 인지하는 컨셉의 소설인데요. 등장인물과 작가 간의 소통은 데드풀, 쉬헐크 등의 캐릭터에서도 많이 등장하지만 그 사이에 소설의 지문, 다시 말해 나레이터도 하나의 인격으로 등장하면 어떨까 하는 발상이 있었습니다. 소재 빨로 1화는 좀 재밌게 썼는데, 2, 3화는 설정을 좀 더 확장하면서 소설의 완성까지 고민하다 보니 좀 어려웠네요. 나래가 3화에서 욕을 너무 많이 하는 게 특히 아쉽습니다. 읽는데 불편하셨으면 미안해요!


별개로 <인용구 소설집>이라는 매거진을 만들었습니다. 가끔 단편 같은 거 쓰는 것도 재밌는 것 같아서요. 많은 관심과 응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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