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첫째 주 - 전라남도 나주
8월의 첫 여행, 이번 주는 어디로 가야 할까 금요일 저녁까지 고민하다가 코레일 앱을 켰다. 항상 시외버스를 이용했는데, 이번에는 모처럼 기차를 타보고 싶었다. 가나다순으로 역 이름을 찾다가 금방 목적지를 정했다. 전라도 나주. 전라도가 전주+나주 해서 전라도인 건 알고 계시는가? (충청도=충주+청주, 경상도=경주+상주, 강원도=강릉+원주. 몰랐다면 또 저를 통해 좋은 정보 하나 알아가신다.) 전라도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생각해 보니 나주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나주 하면 무엇이 유명하더라? 나주 배, 나주 곰탕. 볼거리로는 나주 읍성이 있지 않나. 몰라, 가보면 알겠지. 즉흥성에 몸을 맡기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흥겹게 기차를 예매했다.
다음 날 아침, 기차를 타기 위해 이른 시각에 집을 나섰다. 서대전역에서 타는 무궁화호 열차였다. 나주에서 점심을 먹고 싶었는데, 정오쯤 도착하려면 이 열차밖에 없었다. 무궁화호는 오랜만이었다. KTX를 타면 절반의 시간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 기차의 낭만을 느끼고 싶었던 나는 오히려 좋았다. 차창 너머로 천천히 움직이는 풍경, 규칙적인 철마의 심장소리, 적당히 때 묻은 좌석과 연식이 느껴지는 객차 내부의 분위기. 그 모든 것이 만족감과 안정감을 주었다.
창밖을 하염없이 구경하다가 책을 펼쳤다. 이번 주 문뜨 소설 모임의 책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였다. '탐미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후배의 소개답게 정말로 문장이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단순히 대상을 미학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보며 느끼는 감정—아름다움에 대한 동경과, 그로 인한 열등감과 시기, 나아가 그 대상을 파괴하고 싶다는 욕망까지. 그 복잡하고 원초적인 감각을 분명하게 소묘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주인공에 완벽하게 공감하긴 어려웠지만, 어떤 세계를 간접 체험하기에는 충분한 필력이었다. 사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파괴'를 꿈꾸는 뒤틀린 심정을 긍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너무 아름다운 대상을 볼 때 '무결성'을 믿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 그 유한함과 연약함을 기대하는 심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쁜 꽃을 보면 꺾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 이라던 한 문뜨 선배의 말이 기억났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열차는 나주역에 도착했다. 아, 너무 일찍 출발해서 기차 안에서 좀 자려고 했는데. 그러나 잠 못 이룰 정도로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것은 또 하나의 행복이다. 그것을 아침부터 만끽할 수 있었으니, 벌써 여행의 시작이 좋았다.
나주에 점심까지 도착하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저녁은 곰탕을 먹어야 한다. 곰탕은 든든한 국물. 그럼 해장용 아닌가? Therefore, 점심에는 낮술을 즐겨야지. 완벽한 삼단 논법. (응응) 전날의 검색을 통해 결정한 점심 메뉴는, 홍어 정식이었다.
전국에서 제일로 쳐주는 것이 바로 흑산도 홍어. 그런데 그곳까지 가지 않아도 나주에서 흑산도 홍어를 먹을 수 있다. 알아보니, 옛날에 나주는 전라도에서 가장 번성한 동네 중 하나였다고 한다. (전라도의 '라'를 담당하는 곳이니 그럴 만하다.) 그 이유로 꼽히는 것이 바로 전라도 최대의 내륙 항구였던 영산포. 그리고 흑산도 홍어가 영산강을 따라 올라와 바로 이곳 나주 영산포에서 많이 거래되었다는 것이다.
혹시 홍어 못 드시는 분? 저는 잘 먹습니다. 아버지가 홍어를 워낙 좋아하셔서 생일상마다 홍어찜이 올라오기도 했고, 삭힌 홍어도 종종 먹었다. 물론 홍어를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어릴 적에는 애기 입맛의 소유자였으니. 그래도 애답지 않게 엄청 단 음식을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다. 탄수화물을 오래 씹을 때 나오는 은은한 단맛은 좋아했지만, 설탕이나 아스파탐처럼 대놓고 단맛은 싫어했다.
마찬가지로 사 먹는 음식에서 느껴지는 'MSG' 맛도, 그것이 무엇인지 구분할 줄 알게 되면서 별로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MSG 넣으면 물론 맛있다. 입에 쩍쩍 달라붙죠, 그쵸. 다만 그걸 많이 넣는 순간 이제 MSG 맛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쉬운 길을 택한 순간 그 음식이 갖는 차별성이 없어진다. 비슷한 예로 라면스프 맛 김치찌개, 라면스프 맛 매운탕. 뭔지 알죠? 그럴 거면 그냥 라면을 먹지.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른바 '미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하게 달고 짜고 매운 음식, 기름에 범벅된 음식보다 절묘한 간을 추구하게 되었다. 재료 본연의 맛, 그 매력을 살리는 최적의 조리법. 이런 걸 구현하는 식당과 요리사에게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어려운 음식이 있다. 그러나 식재료가 내가 선호하는 맛과 벗어난다고 해서 그것을 배척하는 짓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세상에 나쁜 식재료는 없어, 내 입맛에 맞는 조리법을 찾지 못했을 뿐. 이 과정에서 나는 '다름'의 가치를 깨닫게 됐다. 익숙하지 않은 맛, 새로운 맛은 무조건 점수를 먹고 들어간다. 그 고유함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의 세계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맛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을 나는 즐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홍어를 '진짜 맛있다,'라고 찾아먹기 전부터 나는 홍어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아, 이게 홍어 맛,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맛.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도전하는 과정이 하나의 사랑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노력하지 않아도 그 대상을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몇 번 시도하다 보니, 잘 삭힌 홍어와 그렇지 않은 홍어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홍어를 먹는 이유를, 그 고유한 매력과 존재의 의의를 이해하게 되었다.
열린 마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스스로 한계를 규정하지 마. 넓은 세상을, 누군가는 열렬히 사랑하는 무언가를 영영 놓치고 살 셈이야?! 이것이 나의 홍어부심, 사랑에 대한 하나의 철학이다. 그것을 증명하러, 먼 길을 왔다. (개똥철학은 원래 말이 길어지는 법이다..)
영산포는 나주역에서 시내 방향 반대로 버스를 타야 한다. 강만 건너면 금방인데, 버스에서 내리니 또 '문학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 이놈의 문학은 나를 놔주질 않는구나.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이라고, 영산강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을 기념하는 문학관이었는데 잠시 구경했다. 입장료도 무료고, 에어컨도 잘 나와서 편히 구경했다. 작가님의 작업 공간도 공개되어 있었는데, 꾸며놓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곳에서 집필활동도 하시고 문학관 관리도 하시는 듯했다. 살아생전에 소설이 드라마화도 되고, 문학관도 생기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웠다.
아무튼 슬슬 배도 고파 얼른 영산포 홍어거리를 찾았다. 가자마자 홍어 밴드 캐릭터 조형물이 나를 반겼다. 홍어가 보컬, 김치가 드럼을 치고 돼지가 키보드, 막걸리가 베이스를 치고 있었다. 아아, 홍어 삼합 + 막걸리, 홍탁밴드구나. 묘하게 귀엽고 열받게 생긴 녀석들을 뒤로하고 식당을 찾았다.
내가 방문한 곳은 "영산포홍어 영농조합법인" 건물 2층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주변에 홍어 정식 하는 곳은 많았는데, 왠지 이름이 좀 믿음이 가잖아. 그리고 1인 정식도 먹을 수 있다는 리뷰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메뉴판을 보는데, 칠레산 – 국산 – 흑산도산 순으로 가격이 달랐다. 2인 이상 방문하면 인당 5천 원이 싸다는 걸 확인하고 조금 눈물이 났지만, 참았다. 혼자는 익숙하니까. 나는 국산 홍어 정식을 주문했다. 칠레산을 먹을 거면 굳이 나주까지 오진 않았겠지. 그렇다고 만원이나 차이나는 흑산도 홍어를 먹기에는 조금 부담이 됐다. 차라리 그 돈으로 막걸리 두 병 먹는 게 이득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 병을 먹었다.) 한 끼에 4만 5천 원을 썼으니, 거의 평창 한우급 고급 식사였는데 말이죠. 후회는 없었다. 진짜 맛있었다. 그리고, 혼자 여행을 와서 이번 숙소는 찜질방으로 골랐거든. 킥킥, '미식' 경험하려고 숙소값 아낀 셈 쳤다.
그래서 홍어 정식. 밑반찬 몇 개와 함께 나온 첫 홍어 요리는 생 홍어 애였다. 홍어의 간. 생선 간은 왜 이렇게 맛있을까? 아귀 간 알아요? 안키모,라고 해서 오마카세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그 녀석. 우리 아버지가 또 아귀에 사족을 못 써서 어릴 때부터 아귀찜 맨날 먹으러 다니고, 집에서도 아귀탕 해 먹었거든. 근데 이제 아귀탕 먹을 때 제일 맛있게 먹었던 게 아귀 간이었다. 녹진하고 크리미한 그 맛. 그런데 익히지 않은 생 홍어 간이라니. 이건 진짜 현지 아니면 못 먹을 것 같은데? 벌써 좋은 경험을 한 기분. 바로 막걸리 한 병 시키고 맛있게 즐겼다. 애간장 녹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그 뜻 아님.)
다음으로 나온 것은 홍어 삼합이었다. 삭힌 홍어와 수육, 그리고 물에 씻은 묵은지의 조합은 완벽했다. 홍어 특유의 암모니아 향이 묵은지의 신맛과 단맛을 만나면 어느 정도 완충이 된다. 거기에 이제 수육. 익숙한, 아는 맛. 그게 진짜 밸런스를 잘 잡아주는 느낌이란 말이지. 신기하게 수육과 겉절이의 조합도 국룰이잖아요, 김장 끝나고 배추에 싸 먹는 그 맛 진짜 최고 맞죠. 근데 또 홍어 삼합은 무조건 묵은지여야 한다. 황금색 묵은지에서 우러나오는 단맛, 또 삭힌 맛이 필요하다는 거지. 거기에 또 고기는 무조건 수육이어야 됨. 구우면 안 된다. 무조건 촉촉한 수육. 그러니까, 홍어 삼합은 조상의 지혜로 완성시킨 최고의 페어링인 것이다. 곁들이는 김치의 숙성 정도와 고기의 조리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완벽한 삼합. 여기에 막걸리라니. 발효의 삼중주, 말 그대로 시간의 맛 아닌가. 그 맛은 감동, 또 감동이었다. 한 다섯 점 나오는 것을 얼마나 아껴먹었는지. 특이하게 또 삼합에 김을 더해서 먹으라고 김도 내어주었는데, 맛있는 김도 아니었고 홍어 사합은 근본이 없는 느낌이라서 처음에만 넣어보고 말았다.
그다음은 홍어 무침. 음…. 얘는 뭐 그냥 새콤하니 적당하게 맛있었다. 쫀쫀한 식감, 침 나오는 맛. 밥 땡기는 맛. 막 감동적이진 않은, 반찬. (현저하게 낮아진 호응도)
이어서 나온 홍어 전과 튀김. 와, 얘네는 진짜! 쉽지 않던데요? ㅋㅋ 홍어의 향이 열을 받으면 훨씬 진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경험하니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온기로 가속화되는 브라운 운동, 진짜 코를 사정없이 때리는 그 세기는 홍어 코를 먹을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의 감각이었다. 그럴 때마다 막걸리 한 모금이 그 고통을 씻어주었다. 매운 음식 먹을 때 쿨피스를 먹는 것처럼, 홍어를 먹을 때는 무조건 탁주가 있어야 한다.
홍어 찜은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던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반가웠다. 나도 이제 아버지의 입맛을 닮아가는구나 싶었다. 살을 발라 먹다가 나중에는 아예 뼈째 씹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식사로는 홍어 애탕이 나왔다. 나주 곰탕이랑 홍어 애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저녁에 어차피 곰탕은 먹을 거니까. 그리고 그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근래 먹었던 빨간 국물 요리 중에 제일 맛있었다. 내장탕 느낌으로 칼칼한데, 묘하게 시원해. 그리고 중간중간 만나는 홍어 애는 진짜 별미였다. 맛있게 먹었던 홍어 정식. 홍어를 좋아하거나, 제대로 접해보고 싶은 분들께는 영산포 홍어거리를 추천, 또 추천이다. 이 가격대에 이렇게 다양한 홍어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것이 나주의 은혜? 다음에는 흑산도 홍어를 한 번 먹어보고 싶긴 하다. 옆 테이블에서 시키는 걸 봤는데, 진짜 생선 때깔이 다르더라고..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나주 시내로 향했다. 작은 동네였다. 사실 나는 ‘나주읍성’이 유명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의외로 볼품이 없었다. 나중에 보니 순천 낙안읍성과 헷갈린 것이었다. (바보바보) 문화재로 금성관이라는 객사가 있긴 했는데, 건물 주위로 넓은 공터만 있어 조금 황량하게 느껴졌다. 바로 앞에 100년 역사의 곰탕집 “하얀집”이 있는 것만 확인하고, 동네를 더 둘러보았다.
하얀집 옆에는 “행운분식”이라는 작은 상점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무엇을 사 먹고 있길래 나도 따라가 보았다. 그 정체는 사라다빵. 도나쓰처럼 튀긴 빵 속에 두툼한 소시지와 투박하게 썰린 양배추가 들어 있고, 머스터드와 케첩으로 버무린 아주 클래식한 맛이었다. 대단한 맛까진 아니었는데, 왜 사람들이 줄까지 서가며 먹었는지는 의문. 그래도 사라다빵에서 기대하는 맛을 잘 구현해 놓았고, 회전율 덕분에 갓 튀긴 빵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메리트가 있었던 것 같다.
또 나주 하면 ‘배’가 유명하니, 혹시 배 막걸리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하나로마트를 들렀는데 아쉽게도 없었다. 차를 타고 빛가람동까지 나가면 ‘월하주’라는 이름의 배 막걸리를 파는 술집이 있다던데, 저녁은 곰탕을 먹기로 했으니 미련 없이 포기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도 방문해보았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이름조차 낯설었는데, 이번에 발단과 전개를 공부할 수 있어 좋았다.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라 하는데,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한일 학생들 간의 작은 시비가 계기가 되었다고. 가만히 보면 이런 커다란 사회 운동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사촌누나를 희롱하는 일본인에게 사과를 요구했을 때 박준채의 마음속에는, 거창한 항일정신이나 민족적인 대의가 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인을 위해 나서는 마음,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 어쩌면 이런 사소한 것들이 위대한 변화의 초석이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땡볕 아래에서 나주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 나는 아까 봐둔 “하얀집”으로 곧장 들어갔다. 사실 곰탕이란 음식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설렁탕과는 뭐가 다른 거지? 곰국과는 같은 건가? 대학원에서 흔히 ‘논문 쓰기=곰국 끓이기’라 표현하곤 했기에 (논문을 뒤집으면 곰국이 된다) 친근한 단어였지만, 정작 내 돈을 내고 곰탕을 사 먹는 건 처음이었다.
검색해 보니, 곰탕은 고기로만 국물을 내고 설렁탕은 뼈를 우려낸 사골 국물이라 한다. 그래서 설렁탕은 뽀얀 흰 국물이고, 곰탕은 투명하고 맑다. 그리고 곰탕과 곰국은 같은 말이었다. 탕(湯)은 그저 국을 한자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하는데,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 것 같긴 하다. (아래 링크가 잘 정리한 것 같아 공유한다.) 어감상 국보다는 탕이 조금 더 재료의 맛이 충분히 우러날 때까지 끓였다는 뉘앙스를 주는 것 같아, 앞으로는 그냥 곰탕이라 부르기로 했다. (곰국은 이제 지긋지긋하기도 하니까.)
앉아서 주문을 하고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음식이 나왔다. 역시 K-패스트푸드, 국밥이다. 과연 맑은 국물 안에 고기가 넉넉히 들어있었고, 밥이 말아져 나왔다. 국밥에 밥을 따로 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괘념치 않는다. 오히려 큰 솥에서 밥을 토렴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뛴다. 밥알 하나하나가 국물 안에서 풀어지는 것은 또 내가 직접 말아먹는 거랑은 느낌이 다르니까.
국물은 담백하면서도 고기맛이 잘 살아 있었다. 먹자마자 대전의 명물 "태평소국밥"이 잠깐 떠올랐는데, 그것보다 훨씬 깔끔했다. 태평소국밥은 무의 존재감이 확실해서 소고기뭇국에 가까운 정체성을 보이지만, 하얀집 곰탕은 순수한 고기 국물 맛이었다. 먹자마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맛. 끓이는 동안 계속 위를 걷어내는지, 거품 하나, 기름방울 하나 뜨지 않는 맑은 국물이 인상 깊었다. 약간 이 국물을 차게 식혀서 메밀면을 넣으면 평양냉면 느낌도 나겠다, 싶은 슴슴하고 담백한 맛이었다. 고기도 부드러웠다. 오래 고아서 국물에 맛을 모두 뺏겼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국물 속에서 다시 육향을 머금은 듯했다. 계란 고명까지 더해져 씹는 맛도 적당했다.
사실 설렁탕을 먹고 나면 사골 국물 때문인지 다소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우유를 마신 듯 든든하지만 무겁다. 곰탕은 그보다는 ‘디톡스’ 같은 느낌이었다. 더한다기보다는 빼는 느낌. 한 숟갈 뜰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씻겨 내려가듯 맑아지는 기분. 숙취도, 스트레스도 뚝배기 하나에 사라질 것 같은 개운함을 주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다시 말해서 살짝 포만감이 모자란 기분?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말이죠. 곰탕 2차를 뛰었다(...) 하얀집 주위에 곰탕집이 여럿 몰려있었다. 애초에 이름이 곰탕거리인가 그렇다. 그중 "노안집"과 "남평할매집"이 하얀집과 묶여 '나주 3대 곰탕'이라고 하니, 비교를 안 해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실 하얀집의 곰탕이 엄청 맛있긴 했지만, 이게 곰탕이란 음식이 원래 다 이런 맛인지, 이 집이 잘하는지를 알 수가 없으니까.
사실 나주가 그렇게까지 볼거리가 많지는 않아서, 언제 다시 올까 싶긴 했던 참이다. 차가 있다면 해남이나 목포 내려가는 길에 잠깐 들러 한 끼 정도는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내가 나주 곰탕을 지금처럼 탐구할 기회는 흔치 않은 것 아닌가. 하얀집과 맛이 비슷하다면, 이미 맛있게 먹은 한 그릇을 리필할 수 있으니 성공이고. 차이가 확실하다면 그것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겠지. 이런 합리화를 마치고, 미친 척하고 "노안집"으로 들어갔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유명인들의 사인이 기대감을 주었다. 이번에는 수육곰탕(아롱사태가 들어감) 대신 2천 원 싼 일반 곰탕(양지)으로 주문했다. 이미 한 그릇 먹은 시점에서 완벽한 공정 비교는 어려운 상태. 국물은 어차피 같은 솥에서 내는 듯했으니, 고기의 질감 때문에 노안집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먹은 노안집 곰탕. 얘도 한 숟갈 먹고 바로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추구하는 방향성이 다르구나. 가장 크게 느낀 것은 후추맛. 소금, 후추의 간이 강하게 느껴져서 국물이 거의 칼칼하다 싶을 정도였다. 하얀집의 곰탕은 고기와 국물이 식감만 다른, 어우러지는 하나의 존재로 느껴졌다면, 노안집 곰탕은 국물의 강한 간을 고기와 밥으로 중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하얀집의 압승. 하얀집 국물이 조금 밍밍하다 싶을 정도로 슴슴해서 직관적으로 맛있다고 말하긴 어려운데, 한 그릇 다 먹을 즈음에는 은은한 여운이 남는, 진짜 평양냉면 같은 매력이 있었다. 여기는 그냥 향신료 맛으로 혀를 두드려 패는 느낌이 좀 아쉬웠다. 그럴 거면 고기를 그렇게 열심히 고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다시다 국물에 해도 비슷할 것 같은데 (헉) 배부름을 고려하고도 노안집은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완뚝은 해야지.
식사를 마친 후에는 광주로 이동하는 버스를 탔다. 나주에는 묵을 곳 찾기가 어렵더라고. 광주의 찜질방에서 오랜만에 목욕도 하고, 거실 같은 분위기에서 잠도 잘 잤다. 불편하긴 했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뭐. 젊을 때니까 할 수 있는 여행이지. (이제 젊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사실 관광지로서는 애매했던 나주였지만, 너무 즐거운 먹거리 투어를 해서 좋았다. 곰탕은 하나의 훌륭한 기준이 생긴 것 같고, 홍어는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먹고 싶네. 아, 대전에는 홍탁집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