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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물한 영원

너는 영원의 증명이야

by 인용구

네가 선물한 영원*

인용구

지키지 못한 약속이

거짓말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요즘 너를 자꾸 생각한다


전부라던가, 영원 같은 말

유치한 말들, 진부한 염원을

쉽게도 말하는 네가 싫지 않았다

그 말을 돌려주지 못한 건 내가 T라서

영원은 됐고, 평생만 사랑하자고 했지

너는 기뻐서 웃었고, 나는 네가 웃어서 기뻤어


어떤 순간은 영원하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늦장 부리며

무거운 이불 아래서 키득대던 기억

오렌지 게임처럼 사랑을 부풀리다가

다시 살을 맞대고 숨을 나눴지

전부 같고 영원 같았던 그때도

시계를 확인하는 건 항상 나였고


종교가 있냐고 했잖아

신보다 간절했던 건 맹신

사람을 믿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며

늘 밑지고만 살던 너란 사람을

눈먼 사랑을 미친 척 믿어볼걸

영원의 맹세, 그거 어려운 거 아니었는데


영원은 종료 직전의 카운트다운

경종처럼 울리는 경적과 함께

이제 네가 없다 영영 없다

평생은 저마다 다른 길이여서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어

내 안에 살아있는 너를 발견한 날

나는 이제 죽을 수도 없고

다 꺼졌으면 했는데 정말 캄캄했어

별 하나 감히 빛나지 않았어

이 터널도 끝이 있을까


영원은 직선이 아니라 나선이래

불멸이 아니고 회귀의 성질이래

너는 영원의 증명이야


요즘 너를 자꾸 생각한다


너를 많이 닮았어

네가 선물한 영원은


*영원: 永遠, 0₩, 01, eternal, young one.




아래 해설은 여러분의 감상을 해칠 수 있으니 주의해서 읽어주기 바랍니다. (몇 번 더 읽고 와!)




가을학기 문뜨 첫 정모에 들고 간 시—는 아니고, 어떤 서사와 운율이 담긴 문장의 나열. 여름방학 소설 모임에서 읽었던 최진영의 소설 <구의 증명>에 나는 가장 낮은 점수를 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의 배경 설정은 그 소설에서 출발한다. 연인의 죽음 뒤, 남겨진 여성 화자의 이야기.


조금 더 부연하면, 글에서 암시하는 화자의 상황은 이렇다. (해설주의)

"내 마음은 전부 네 거야,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게," 뭐 이런 거창한 말들도 잘 해주던 구김 없는 남자친구. 하지만 나는 끝까지 영원이나 무조건적인 사랑 같은 낯간지러운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남자친구가 교통사고로 죽고, 나는 병원에서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자친구를 매일 떠올리고, 그러면서 어떤 형태의 영원을 믿게 된다.


사실, 이렇게 해석하지 못했어도 좋다. 뜨락 동인 분들은 임신에 대한 이야기를 캐치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내 안에 살아있는 너를 발견한 날" 이라던가 "너를 많이 닮았어 / 네가 선물한 영원(아이, young one)은" 같은 구절에 암시를 넣긴 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제재가 '영원'이란 추상어고, 전개 방식도 넋두리나 방백에 가까워서 전통적인 개념의 '시적 완성도'로 보면 다소 벗어나있다. 그런 까닭에 서두에도 시는 아니다,라고 깔고 가긴 했다. 다만, 독자에게 어느 부분 공감이나 감동을 일으키면서도, 동시에 언어의 유려함이나 말재간을 뽐내는 글이라고 생각해서 부끄럽지는 않다. 테크니컬하게, 전달력 있게 잘 썼다고 자부합니다.


퇴고를 거치면서 기교가 엄청 많이 들어갔다. 인용구의 독자라면 여기서도 발음을 활용한 말장난이 빠짐없이 활용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영원이라는 단어를 극한으로 해체해 보았다. 전부와 영원, 진부한 염원 / 0원의 맹세(稅) / 01은 카운트다운 -> 00 없다 / 이 터널(eternal)의 끝 / 영원, young one... 한편으로는 운율감을 살리려고 신과 맹신 / 믿다, 밑지다, 미치다 / 경종과 경적 / 영원과 병원 / 길이여서, 길이었어 따위의 어휘 선택에도 발음을 생각하며 고심하기도 했다. "어떤 순간은 영원하다"라던가, "이 터널도 끝이 있을까" 같은 문장으로 모순적, 역설적 요소를 넣은 것도 물론 의도했다.


이미 구질구질하게 해설을 늘어놓은 김에 조금 더 자화자찬을 늘어놓자면, 작가 스스로도 마음에 드는 표현은 "오렌지 게임처럼 사랑을 부풀리다가" 이 부분이다. 여러분 오징어 게임은 들어봤겠지만, 오렌지 게임도 아시나요? 왕년에 유행하던 술게임인데, 앞사람이 묘사한 오렌지보다 더 큰 오렌지를 표현해야 하는 게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오렌지의 크기를 과장하기 위해, 몸짓도 목소리도 커지다가 나중에는 천체만큼 크다는 걸 표현하려 망원경으로 보는 시늉을 한다던가, 오렌지의 중력에 빨려 들어가는 마임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그것이 연인끼리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이런 말을 주고받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영원은 직선이 아니라 나선이래" 이 구절도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기하학적으로,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로 가져온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영원불멸, 영원회귀. 이런 철학적인 개념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세상에 끝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것이 끝난 뒤에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 항상 있다고 믿는다. 그런 영원의 이미지를 죽음과 탄생, 전진하면서도 계속 과거와 재회하는 이야기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개인적으로 만족스럽다.


수능풀이식 작품 해설은 이쯤 하겠다. 이렇게 시의 화자 성별을 바꾸고, 말장난을 욱여넣으며 글을 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마냥 나와 동떨어진, 글을 위한 글은 아니다. 내 이야기가 분명 담겨있고, 그걸 진솔한 언어로 적었다. 다만 픽션으로 쓴 것은 작가를 분리시켜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고, 언어유희를 덧바른 것은 독자에게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그대로 전가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거짓말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 생각하여 삼켰던 말들, 끝내 거짓말보다 나쁜 비밀이 되어버린 말들이 나는 더 슬프다. 그때 네가 나에게 주었던 사랑이 진실했음을 안다. 끝의 형태를 가늠하느라, 당장 눈앞의 너를 온 맘으로 대하지 못했던 내가 미안하다. 많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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