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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3)

by 인용구

3장.


영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도 너무 반가워서, 생각했던 것보다도 정말 정말 반가워서 그에게 바로 포옹을 날렸다.

“성주야, 나 땀. 땀 많이 흘렸어.”

그런 건 상관없었지만. 영호의 몸을 놔주고 그를 애틋하게 뜯어보았다. 아침의 옷차림 그대로, 남색 셔츠와 무릎 위로 올라오는 반바지를 입고 있는 그였다. 반쯤 푼 셔츠 단추 사이로 보라색 티셔츠가 보였다. 영호의 말대로 땀을 많이 흘렸는지, 걷어올린 전완이 젖은 모래처럼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추가된 소품들도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몇 개의 고무밴드 팔찌를 차고 있었다. 빨간색 민주노총 팔찌부터, 보라색 금속노조까지. 부스를 열심히 구경한 모양이었다. 슬링백에도 새로운 악세서리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몇 해 전부터 늘 달고 다니던 노란색, 보라색 리본 옆에는 분홍색, 초록색 리본이 새로 더해져 있었다. 여러 크기와 모양의 핀 배지도 주렁주렁 달아놓아서, 마치 보이스카우트의 어깨띠를 보는 것 같았다.

“어머, 안녕하세요.”

주연 씨가 영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영호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아, 두 분이서 같이 오신 거였구나.”

뭔가 흐뭇해 보이는 주연 씨 때문에 살짝 민망해진 내가 힐끗 영호의 표정을 살폈다. 영호는 아무 그늘 없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반대쪽 얼굴에 그려져 있을 혜성 같은 눈꼬리를 생각했다.

“네, 제 남자친구.”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주연 씨는 부럽다는 듯이 영호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솜사탕 기계 앞으로 달려갔다.

“솜사탕 드려야죠. 어떤 색이 좋으세요?”

“분홍색이요.”

영호가 귀에 속삭였다. 찌찌뽕이네, 나도 아까 분홍색 받았는데.


솜사탕을 뜯어먹으며 인파 속을 걷는 동안, 우리는 평범한 커플처럼 대화를 했다. 마치 지난 며칠 이루어졌던 묘한 냉전은 없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밥은 먹었어? 아직 못 먹었는데 괜찮아. 사람 너무 많지? 진짜 많긴 하네, 근데 괜찮아. 괜찮아, 라는 말 앞에 생략된 말을 속으로 쓰다듬었다. 네가 있으니까. 네가 지금 내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종각 앞에 도착했다.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트럭들이 도로 한 편에 줄줄이 서 있었다. 나는 슬쩍 영호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우리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려나. 그날, 종각을.




스물셋. 인정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나는 결혼은 할 수 없겠구나. 엄마 미안, 손주 구경은 못 시켜드릴 것 같아. 진짜 미안.

학창 시절 때는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이 그냥, 내가 공부에 집중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엄청 잘한 것도 아니었지만. 입결에 맞춰 겨우 인서울 대학교에 들어가고, 정신없는 1학년을 보낸 뒤 군대에 갔을 때. 두 기수 위 선임을 좋아했다. 그 선임이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러 나갈 때마다 너무 힘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사람이 상병일 때 헤어졌던가, 정말 목숨을 걸고 고백했는데. 그날 세탁실 한구석에서 그의 자지를 빨았고. 그 새끼가 전역할 때까지 그 짓을 몇 번 더 반복했는데. 결국 그는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연락하지 말라던 그의 마지막 문자를 받고, 불침번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밤새 숨죽여 울던 날. 인정하기로 했지. 나는 진짜 게이 새끼가 맞구나.

전역한 후에 동성애자를 위한 데이팅 앱을 깔고, 몇십 명의 남자와 몸을 섞었다. 부모님은 내가 오케스트라 부 활동을 열심히 하는 줄 알았겠지. 그러나 막차 시간이 끊길 때까지 내가 불었던 것은 클라리넷이 아니었다. 관계는 대개 일회성이었다. 번개가 끝나면 꼭 한 명이 톡방을 나갔다. 보통은 현타가 온 내 쪽이었다. 내가 아쉬울 때면 상대방이 그랬다.

남은 생에 사랑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그냥 유부남이나 욕구 불만인 남자들 좆에서 정액이나 뽑아내면서, 20대라는 메리트가 사라질 때까지는 그렇게 살 수 있다지만 그 다음은. 차비 몇 푼 쥐여 주는 그들에게 꾸벅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한없이 외로웠다. 그들은 자신의 욕정을 풀면 바지춤을 올리고 사라질 뿐, 누구와도 관계다운 관계를 이어갈 순 없었다.

그날은 2017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부모님은 해외여행을 가셔서 마음 편히 외박할 수 있었던 날. 잡았던 번개 약속이 파투가 났다. 시계를 보니 11시 20분, 집으로 돌아갔다간 버스 안에서 새해를 맞이할 것 같았다. 마침 나는 광화문 근처였다. 얼굴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올려다본 교보생명 건물 간판의 글귀가 찬바람처럼 가슴에 스몄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허형만, <겨울 들판을 거닐며>. 2017.12 ~ 2018.02 게시


눈밭을 가로지르는 발자국. 그 위로 보리싹 같은 풀이 피어난 그림이 배경으로 있었다. 나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내 발자국도, 새싹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말조차 함부로 할 수 없게 된 나는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둘둘 씩, 삼삼오오 씩 무리 지은 모습이었다. 어릴 적 연말이 되면 티브이 앞에서 부모님과 보았던 연기대상 시상식이 기억났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공중파 방송국 모두가 서울의 한 장소를 보여주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거대한 행진에 몸을 실었다.




“We will never stop,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잠시 후 2025 서울퀴어문화축제의 행진이 시작됩니다.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과 에이섹슈얼, 트랜스젠더와 모든 퀴어 여러분. 그리고 함께해주시는 스트레이트 앨라이 분들은 질서 있게 퍼레이드에 참여 부탁드립니다.”


저만치 앞에서 사회자의 안내가 들려왔다. 브라질의 카니발 축제에서나 볼 법한, 깃털이 많은 옷을 입은 사내였다. 분홍색 깃털이 후광 같은 둥근 배경을 만드는 모습이 꼭 홍학과 공작 사이의 무엇 같았다. 사회자가 호명(?)할 때마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도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문득 영연방이 떠올랐다. 드랙 퀸을 섬기는 퀴어 공화국의 백성들.

살짝 고개를 돌려 영호의 표정을 보았다. 영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종각으로 가는 동안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더니, 결국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보신각종을 중심으로 마치 눈이 쌓이는 것처럼 몇 겹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타종 행사를 가까이서 보려는 사람들은 그 틈을 비집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덕분에 종각역 일대는 잘 뭉쳐 놓은 눈덩이처럼 단단하게 사람들로 들어찼다.

나는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깊게 찔러넣은 채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을 보았다. 연인과, 어린 자식과, 친구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모두 다가오는 신년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들 중 나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나만 그 모든 것에서 도태된 인간처럼 느껴졌다.

순간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려서 차갑게 얼은 볼을 녹였다. 소란스러운 그 공간에서 나의 통곡은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적어도, 그런 줄 알았다.

“왜 울고 있어요.”

내게 손수건을 건네는 남자가 있었다.




“영호야.”

“…….”

“영호야, 왜 울고 있어.”

그 남자가 내 옆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늘 나에게 위로를 건네왔던 남자는 소리 내어 우는 법도 몰랐다. 영호가 코를 삼키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내가 준 손수건으로 눈을 훔쳤다.

“몰라아, 즐거워서.”

“즐거운 사람이 왜 울어.”

“그러니까, 너무 바보 같지.”

아니, 바보 같지 않아. 말하는 대신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좀 외로웠던 것 같아.”

외로웠구나, 그날의 나처럼.

“퀴퍼를 올 때마다, 밝게 웃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그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건지, 애써 밝은 척을 하는 건지 궁금했어.”

그랬구나, 너도 그랬구나.

“근데 지금은 진짜로 즐거워.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걸 스스로 되뇌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미안해. 그동안 너를 이곳에 혼자 오게 해서 너무 미안해.

그때 사회자의 음성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그럼 카운트다운 후에 퍼레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십! 구!”

주위의 퀴어들이 입을 모아 수 세는 것에 동참했다. 유월의 종로는 십이월의 종로와 놀라울 정도의 기시감을 선물했다.

팔, 칠.

그때 종각에서. 쉼 없이 눈물을 닦아내던 내 곁에 너는 말없이 서 있었지. 손수건을 돌려줄 때 보았던 너의 표정을 나도 기억해.

육, 오.

너는 이미 다 운 사람처럼 보였지. 이미 한 생의 눈물을 다 소진한 사람처럼,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사람처럼 서글프게 나를 바라보았어.

사, 삼.

그때 네가 나와 같다는 건 몰랐지. 너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서, 이곳에 연인처럼 나란히 서서 제야의 종소리를 기다렸어. 각자 주머니 깊이 손을 숨기고. 코를 훌쩍이면서.

이, 일.

“우리 손잡을까?”

“응?”

종소리 대신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환호성이 종로 거리를 가득 메운 그 순간, 나는 영호의 손을 잡았다. 놀란 영호가 어쩔 새도 없이,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대낮에 밖에서 그와 스킨십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영호의 얼굴에 햇살처럼 기쁨이 번졌다. 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더 단단히 잡았다.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겪었던 모든 것들을 혼자 견뎌낸 사람. 외로움 속에서도 단단함과 다정함을 지켜낸 사람. 경직된 내 마음에 물결표를 그려 넣는 사람. 만약 우리가 어떤 이유로 헤어진다고 해도, 나는 지금의 네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너는.

유월의 너는.



에필로그


퍼레이드 행렬은 탑골공원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틀었다. 반대쪽 인사동 거리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이라도 난 듯 지켜보았다. 평소의 나 같으면 얼굴을 붉히며 맞잡은 손을 놓았겠지만, 나는 영호의 손을 잡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그들을 향해 힘차게 흔들었다. 그들 중 몇 명이 손을 흔들며 답해주었다

그들 뒤로 낙원상가 건물이 보였다. 낙원상가 일대는 게이 전용 소주방, 커피숍, 호스트바 등이 모여 있는 동네라고 들었다. 이쪽 커뮤니티에 더 익숙한 영호가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 수상할 정도로 잘 안다, 놀리는 나의 말에 영호가 얼굴을 붉히며 화제를 돌렸다. 이따가 저기 익선동에 냉면이나 먹으러 가자. 을지면옥 맛있어. 귀여웠다.

퍼레이드 중간중간의 차량에서는 음악을 틀며 흥겨운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트럭 위에서는 퀴어 안무가들이 아이돌 음악에 맞춰 안무를 선보였다. 퍼레이드를 따라 걷는 사람들도 핵심 안무를 곧잘 따라하는데, 그 춤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역시 게이들 끼는 알아줘야 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즐겁게 보았다.

노래가 바뀔 때마다 선곡에 신난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그중 한 곡이 나왔을 때는 전주를 듣자마자 나도 소리 높여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연초에 여의도 집회 현장에서 자주 들었던 노래였다.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나는 영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영호도 입으로 노래 가사를 따라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몸을 흔들며 노래를 함께 불렀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행렬은 명동을 지나 신세계백화점 사거리에서 다시 우회전을 하고 있었다. 아까 반대 집회를 보았던 곳을 정면으로 지나가는 경로였다.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몇 시간 전의 구호를 반복하고 있었다. 신기하지, 분명 처음 혼자 보았을 때는 두렵기만 했던 그들의 모습이 지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마로니에 사장님도 근처에 있으려나. 벌써 어디 모텔에서 즐거운 섹스를 하고 있을지도. 주연 씨는. 만약 아직도 부스에 계시면 인사해야지.

반대 시위대 중 한 명이 뛰쳐나오다가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뭔가 하나님, 사탄 어쩌구 외쳤던 것 같은데, 이쪽에서 아멘, 할렐루야 하며 명랑하게 받아치는 소리에 묻혀 정확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

잠깐 행진이 멈추기도 했는데, 앞쪽에서 누가 온몸에 똥을 칠하고 길을 막아섰다나. 그 이야기를 듣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직접 보지 않아서 다행이지, 영호에게 말하자 영호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올해 퀴퍼는 눈 호강은커녕 이상한 꼴만 볼 뻔했네.

뭐야, 서영호 씨, 눈 호강을 못 했다뇨. 제가 보이지 않습니까? 나의 너스레에 영호가 혜성 같은 눈꼬리를 씰룩거렸다. 냉면은 됐고 빨리 집을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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