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브런치에 발표한 3부작 소설 <유월> 재밌게 읽으셨나요? A5 용지로 40페이지 분량이 되더라고요. 제가 여태 완성한 소설 중에서 가장 긴 분량의 중단편 소설이었습니다. 소설 자체를 많이 써본 경험이 없어서, 쓰면서도 이게 맞나 싶은 순간이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퀴어"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컸던 것 같아요. 그래도 완성한 작품은 마음에 듭니다. 물론 아쉬운 부분들도 많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독자 여러분들께 오롯이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릇 좋은 작가라면 작품을 내놓고 어떤 첨언도 하지 않겠지만, 저는 허접이니까 짧은 작가의 말을 남겨보겠습니다.
*경고: 안 짧음.
제가 창작물로서 퀴어 서사를 다뤄본 것이 <유월>이 처음은 아닙니다. 2016년 겨울, 은막에서 찍었던 영화 <공허한 에덴: void eden()>에 동성애자 주인공이 등장하거든요. 은막 최초의 SF 영화이자 유일무이한 퀴어 영화. 무려 10년 전에 메타버스와 포스트휴머니즘을 다룬,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죠. 흠흠.
간단하게 시놉시스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프로그래머 웅환과 성민, 그리고 생물학자 민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정보를 보존한 아바타를 디지털 가상공간 에덴(EDEn, Evolving Digital Environment)으로 업로드하는 Gene-Sys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한다. 프로젝트 책임자인 성민은 약혼자 민하에게는 비밀로 한 채, 웅환에게 특별한 부탁을 건넨다. 그것은 바로 에덴에 추가할 순수한 인공지능 객체인 이브(EVE, Emotive Virtual Entity)를 만드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성민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성민을 남몰래 사랑해 온 웅환은 충격과 슬픔 속에서 금지된 결심을 내린다. 성민의 아바타에 그들이 만든 인공지능 이브를 이식해, 에덴 속에서 그를 되살려내려는 것이다.
창백한 화면 속 에덴에 성민의 모습을 한 아바타가 나타나고, 웅환은 감정에 북받쳐 화면을 쓰다듬는다.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민하는 배신감과 충격에 사로잡혀, 프로젝트의 주요 투자자였던 동진에게 이를 알린다. 결국 Gene-Sys 프로젝트는 전면 중단되고 마는데...
이렇게만 끝나면 너무 예고편 같죠? 여러분이 영화를 보실 일은 없을 테니, 뒷내용도 스포를 하겠습니다.
동진이 압수해 간 서버 장비에는 웅환이 미리 심어둔 판도라 바이러스가 있었고, 웅환은 그것을 이용해 과업을 마무리할 마지막 기회를 얻습니다. 하지만 이브를 에덴에 올리기 직전, 그는 지난 일을 떠올리며 이브의 프로그램을 아주 살짝 수정하게 되죠. 단 한 줄의 정언 명령을 추가한 것입니다. 바로 자신, '창조자(CREATOR)'를 사랑라는 명령이었죠. 그러나 그의 욕망에서 비롯한 이 작은 개입은 결국 이브에 치명적인 오류를 일으키고, 웅환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첫 각본/감독 연출작이기도 하고, 많은 애착을 느끼는 작품입니다. Gene-sys, EDEn, EVE 같은 성경 레퍼런스의 발칙한(?) 네이밍과 설정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성경의 최초의 여성인 이브와 함께 그리스 신화의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바이러스로 등장시켜 '열어선 안 되는 파일'(판도라의 상자)로 연출한 부분도 재치 있었다 생각하고요. 주인공 웅환의 이름은 아담 대신 단군 신화의 신의 아들, 환웅에서 끌어다 썼답니다.
작품의 주제를 한 줄로 표현하면 "사랑과 금기"였습니다. 비인간(프로그램)을 향한 인간의 사랑, 남성을 향한 남성의 사랑. 기술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려는 시도 같은 거요. 결국은 사랑에서 비롯된 비윤리(?)를 과연 죄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저는 동성애나 영화 <Her> 속 AI를 향한 사랑 같은 것이 금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술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겠다, 이것도 어찌 보면 현대 의학이 꾸준히 노력하는 내용 아니던가요. 웅환의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존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상대의 '자유 의지'를 제한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바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찍고 2년 후인가, "영미 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는데요. 존 밀턴의 <실낙원(Paradise Lost)>이라는 성경 기반의 서사시에서도 '자유 의지'가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더라고요.
만일 그들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들은 하지 못하고 오직 해야 할 일들만을 해야 할 것이니, 진실한 충성심과 변함없는 믿음이나 사랑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참된 증거로 보여줄 수 있겠느냐. 만일 의지와 이성, 이 둘 다 자유를 빼앗겨 쓸모없고 공허한 것이 되어 버려서, 자유롭게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필연을 섬기게 되어 있다면, 그들이 무슨 칭찬을 받을 수 있겠으며, 그들의 그런 순종으로 인해 내가 무슨 기쁨을 얻을 수 있겠는가.
- <실낙원> 3권 중
소재와 주제가 비슷한 것도 놀라웠지만, Paradise lost와 void Eden()이라는 제목이 의미적으로도 유사한 부분이 있어서 소름이 쫙 끼치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원래는 C언어에서 함수 선언하는 것에서 따온 거였거든요.)
아무튼. 고백하자면, 처음 시나리오를 구상했을 때는 주인공을 동성애자로 만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여자 부원이었던 친구가 영화 참여가 어렵다고 해서(...) 급하게 시나리오를 수정했죠. 어찌저찌 잘 설득해서 결국은 '민하' 역으로 등장하게 되었지만요. 결과적으로는 주제와 인물 설정이 잘 맞아 들어간 것 같아서 저는 좋았습니다만, 졸지에 우리 기수를 대표하는 겨울 영화가 퀴어 영화가 되자 다른 부원의 반발도 있었습니다. 그 설득과 타협의 과정도 지난했습니다. 아, 정말 힘들었다. 저 그때 스무 살이었어요. 그치만 해냈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작품에서 퀴어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미숙한 부분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동성애를 '금지된 사랑' 정도로만 치부했던 것 같아서요. 누구에게 고백조차 할 수 없는 애달픈 짝사랑, 그것은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해서 제가 감히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자만했어요.
동성애는 죄가 아니야! - 이 말을 하기에는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웅환이 성민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암시와 에피소드를 넣기는 했지만, 정작 성민의 캐릭터를 충분히 매력적으로 그려내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결말에서 웅환에게 삶을 포기하도록 만든 선택은 무책임했다고 생각합니다. 웅환아, 미안해! 만약 이 작품이 제 필(筆)모그라피의 마지막 퀴어 작품이었다면 저는 많이 부끄러웠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대학 생활을 하며 여러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에게 커밍아웃을 해준 다양한 퀴어 친구들도 있었어요. 그들이 사랑 속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들은 충분히 공감 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똑같이 질투하고, 상처받고. 콩깍지도 쓰고, 깨도 쏟으며 평범하게 연애하더라고요. 또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이라는 요소를 빼고 보면, 여러 부분에서 공유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동성에게 고백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명에게서요. (물론 이성한테도 고백받아봤습니다.^^) 연애로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아무래도 저는 결혼해서 가정도 꾸리고 애도 키우고 싶으니까요. 근데 꼭 결혼 생각하면서 연애하나? '동성이라는 이유로' 연애를 못한다는 게 좀 스스로도 짜친다(?)고 느꼈습니다.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을 그들의 마음을 거절하는 자신이 좀 싫더라고요. 친구로서 많은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제 안에 존재하던 호모포비아적인 면을 발견하고, 반성하고. 퀴어에 대해서도 여러 경로로 찾아보고, 고민하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정과 사랑의 경계, 연심과 성애의 구분에 대해서. 남자와는 절대 불가능? 이런 의심도 품어보았고요. 아무래도 평범한 이성애자는 평생 하지 않을 생각들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도 퀴어가 맞았습니다. LGBTQIA+에서 고르자면 Q (Questioning)이라고 할까요. 심지어 저도 남자에게 고백을 해보는(!) 경험까지 발생했더랬습니다. 대차게 까였지만요.
결과적으로는 그 과정이 저에게는 성장이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존중하게 되고,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전보다 더 포용력 있는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성소수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혐오와 차별에 대해서도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럴만한 사건도... 있었고요.
원래도 인권 문제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에 관심이 많았지만,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에는 다른 문제들과는 다른 특수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중 첫 번째 이유는, 퀴어 정체성은 커밍아웃하지 않는 이상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는 점입니다. '게이는 게이를 알아본다' 같은 말도 있지만, 그건 정확하지도 않을뿐더러 실례죠. 피부색이나 성별, 혹은 일부 장애처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정체성의 경우, 설령 누군가가 약간 차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더라도 그들 앞에서는 말조심하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성소수자는 커밍아웃하지 않는 한, 자신을 향하지 않은 비하 표현일지라도 혐오 표현을 맞닥뜨리는 일이 많습니다. 눈앞에 당사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하지 않았을 말들, 그런 '악의 없는' 편견에 훨씬 더 자주, 더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둘째로, 성소수자는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 등 가장 가까운 관계로부터도 지지를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당장 부모님만 해도 대부분은 시스젠더/헤테로섹슈얼로 살아오셨을 테니, 자녀가 자신처럼 '정상 가족'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기대일 수도 있죠. 어떤 경우에는 퀴어 정체성을 후천적,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착각, '고칠 수 있는 질병'이라고 오해하기도 하고요. 친구나 동료들 역시 커밍아웃 이후 '징그럽다'거나 불쾌하다는 이유로 관계를 단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도 어떤 오해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 많은 것 같아요. 내 동성 친구가 게이라고 해서 그가 나를 성적 대상화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애자가 모든 이성을 향해 그런 시선을 보내지 않는 것처럼요. 이런 이유들 때문에 퀴어는 더욱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게 되고, 심한 자기혐오에 시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퀴어'라는 범주가 너무 넓은 것이 또 하나의 특수성인 것 같습니다.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사실 하나로 묶어 표현하기에는 너무 다른 성향과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에요. 말 그대로 무지개 속 색깔처럼, 이름 붙이기 나름인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그렇다 보니 내부에서의 연대가 단순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도 특정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비존중과 혐오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Pride Month 행사와 퀴어 퍼레이드가 특히 흥미롭고 인상적인 이벤트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퀴어들이 가시화되고, 서로 다른 스펙트럼을 지닌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위해, 그리고 함께 꿈꾸는 미래를 향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이 펼쳐지니까요. 언젠가 꼭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도, 퀴퍼에 참여한 한 게이 친구의 후기를 들었을 때였습니다. “혐오하는 사람들을 보면 늘 화가 나고 무서웠는데, 퀴퍼에서 행진하며 다시 마주친 그들은 더 이상 무섭지 않고 오히려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눈물이 났어요. 그렇구나, 그래서 퀴퍼를 하는 거구나. 그런 의의가 있구나.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혐오도, 공동체와 연대 속에서는 다른 감정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거구나. 소설 <유월>의 배경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이라면 당연히 소설은 읽어보셨겠죠? 아 이쯤 되면 한 번 읽어줘라! 부탁드립니다.
<유월>
1장 2장 3장
소설 <유월>은 남자친구 '영호'를 위해 퀴어 퍼레이드 현장을 처음 찾아온 은둔 동성애자 '성주'의 이야기입니다. 총 세 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각각의 장은 퀴어가 마주하는 서로 다른 혐오를 다루고 있습니다. 각 장에는 그 혐오에 저항하는 인물도 등장합니다.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복장에 퀴어를 상징하는 무지개 색을 넣었답니다.
1장. 퀴어 커뮤니티 밖에서의 혐오 - 빨간색 해병대 모자, 주황색 티셔츠, 노란 반바지의 '마로니에 사장님'
2장.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의 혐오 - 초록색 머리, 파란 청바지를 입은 트랜스젠더 '주연 씨'
3장. 퀴어 개인이 겪게 되는 자기혐오 - 남색 셔츠와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영호'
혐오를 다루는 이야기지만, 그것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로 제시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인물들이 지닌 모순과 복잡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퀴퍼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도 성주와 부딪혔을 때 진심으로 사과하기도 하고, 반대로 퀴퍼에 참가하는 사람들 중에도 트랜스젠더에 대해 차별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합니다. 당장 주인공 성주도 동성애자이면서 동시에 호모포빅한 면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1장에 등장하는 마로니에 사장님은 이 소설에서 제가 가장 애정하는 인물입니다. '퀴퍼를 배경으로 혐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던 단계에서, 실제로 원고지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사장님이라는 인물을 구체적으로 세워낸 뒤였습니다. 짱구 복장에 해병대 모자를 쓴 근육질 덩치 아저씨를 상상하니까 너무 웃긴 거예요. 1장에서 푹푹 찌는 더위 속 혐오 세력을 헤치고 나온 성주와 독자들을 위해 코믹 릴리프를 주고 싶었어요.
동시에 이태원의 이야기도 하고 싶었습니다. 박상영의 <믿음에 대하여>라는 소설에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 당시 이태원에서 발생했던 슈퍼 전파자 때문에 고통받는 "임철우"라는 인물이 나오거든요. 읽으면서 '그러게, 게이 커뮤니티는 그때 정말 힘들었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2022년 이태원 참사도 분명 큰 상처를 남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로니에 사장님은 그런 시련들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유머와 다정함으로 무장한, 필요할 때는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강한 어른을 그리고 싶었어요.
2장의 ‘주연 씨’는 사실 마지막까지도 고민을 거듭했던 인물입니다. 퀴퍼 부스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성주와는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인물을 소개하고 싶었거든요. 서로 기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지만, 결국 서로의 행복을 위해 연대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퀴어 커뮤니티 내부에도 여전히 몰이해와 혐오가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드러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보수 성향의 퀴어. 실재합니다. 애초에 정치색도 스펙트럼이라, 진보 진영 내에서도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혐오를 내비치는 사람들이 있고요. 일례로 TERF를 보세요 - 저는 그들을 진보 진영이라고 보지 않기는 합니다. 혐오 세력이죠. 정치인의 실명을 거론하는 것이 망설여지긴 했지만, 올해 퀴퍼가 대선 직후에 열렸다는 점을 떠올리면 오히려 그런 현실감이 작품의 몰입도를 높여줄 것 같았습니다. 그나저나 그 부분 대사가 너무 상스럽죠? 죄송합니다. 요즘 애들 말투가 그래요..
3장은 연출적으로 힘을 좀 많이 주었죠. 1,2장에선 과거 시점의 영호와 성주의 갈등 장면, 카톡 메시지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영호를 마지막에 실제로 등장시키는 것 자체가 쓰면서도 어떤 카타르시스가 있었습니다. 이 장에서는 단순히 둘의 화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 또 여전히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는 내면의 자아를 위로하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강조하기 위해 '종로'라는 장소의 특수성을 잘 활용한 것 같아서 만족스러워요. 유월의 종로와 연말의 종로가 가진 서로 다른 온도와 공기, 그 대비를 활용해서 서사의 절정을 잘 장식한 것 같습니다. 카운트다운 연출이 특히 좀 잘 쓴 듯.
*연출하니까, 소설 마지막 문장이 "유월의 너는" 이잖아요? 제목이 <유월>인 이유도 퀴퍼가 이루어지는 6월이란 의미도 있지만, you were (너는)이라는 뜻도 있었답니다. 이건 말하지 말걸 그랬나요? 문뜨에서도 별로라 하던데. 까비.
3장이랑 대비되어서 그런지 소설 초중반이 너무 '다큐멘터리 같다'는 피드백도 받았는데, 그것도 의도한 바였어요. 다큐멘터리도 결국 PD가 연출을 위해 다양한 컷을 배치하며 스토리텔링을 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유월>에서도 성주의 시선을 따라가며 조명하는 다양한 인물상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퀴퍼를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독자라도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장르 특성상 리얼리즘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정작 제가 퀴퍼를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이 함정이지만요.
퀴퍼에 대해서는 인터넷 친구들의 후기와 뉴스 기사를 통해 접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이번 소설을 쓰면서 정말 많은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현장 사진도 많이 보고, 실제로 퀴퍼를 가본 친구를 인터뷰하기도 했고요. 심지어 소설의 배경인 을지로-종로 일대를 직접 걸어보기도 했습니다. 철저하게 고증하고 싶었지만 현실과 다른 부분도 있긴 합니다. 예를 들어 퀴퍼 반대 집회 '거룩한 방파제' 시위는 을지로 롯데호텔 앞이 아닌 서울시의회 앞에서 진행되었답니다. (관련 기사)
당사자성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오픈 퀴어가 아닌 제가 퀴어 소설을 써도 되는가? 사실 그것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글을 쓰고 있네요. 많이 고민해 본 주제이고, 잘 다뤄보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필력 이슈로 엄청난 명작은 될 수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쓰면서도, 쓰고 난 다음에도 많은 애정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소설을 공개하면 '너 게이였어?' 같은 질문을 받을까봐 조금 겁이 나기도 했거든요. 다행히 아직까지 그렇게 무례한 사람은 없었네요. 아무도 안 읽어서 그런가? 하하; 한 번만 읽어주세요...
아, 마지막으로. 그래서 영호는 왜 퀴퍼를 매년 갔던 걸까요? 작품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영호는 어떤 연대나 참여를 통해서 소속감과 자존감을 채우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월호와 이태원, 오송 지하차도와 무안 공항을 기억하며. 퀴퍼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소외받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지를 보내며.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 내밀면서 위로를 건네는 것이, 저는 스스로를 구원하기도 한다고 믿거든요.
반대로 성주는 오직 영호를 위해 퀴퍼를 갔던 것이었잖아요. 그 경험이 성주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영호와 함께라면 성주가 내년 퀴퍼도 가지 않을까 생각해요. 차별금지법 제정, 동성결혼 합법화. 사회 정의 실현과 인권 보장. 이런 정치적 대의가 있지 않아도 괜찮아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응원을 보내는 마음. 그 마음만으로도 행진에 동참할 수 있다는 말이, 결국 궁극적으로 소설 <유월>을 통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나는 사실 오이에 대해 잘 모르고, 오이를 막 좋아하지도 않지만 나의 친구가 나를 오이 관련 행사에서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참가할 것이다. 그곳에서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맛있는 오이를 건강하게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것은 오이가 갖는 영양학적 올바름(?)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와 연대하는 것이 도덕적 올바름에 취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 친구를 위해서. 지극히 사적인, 그러나 내겐 중요한 이유다.
- 2018년 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중에서
소설도 그런 마음으로 쓰였어요. 주변의 퀴어 친구들, 제게 커밍아웃을 해주었든 그렇지 않든. 사랑하고 응원합니다. 내향형 인간이지만 언젠가는 퀴퍼를 직접 가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네요. 가면 성주와 영호를, 마로니에 사장님과 주연 씨를 만날 수 있을까요?
... 짧게 쓴다던 작가의 말이 10,000자를 돌파했습니다. 진짜 개허접 인증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료 조사 과정에서 구경한 퀴퍼 현장 사진 중 소설이랑 같이 보면 좋을 듯한 컷 몇 개 공유하며 정말로 글 마치겠습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