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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Dec 28. 2021

겨울

내게 겨울은, 겨우 우울


내게 겨울은, 겨우 우울

겨울

                            인용구


생은 짧은데 밤은 길더라 

별 만한 희망에 잠 못 들다 
푸르게 몰려오던 새벽 
해로 운 날들, 우르르 


긴긴밤의 시작을 기억해 
없던 일로 하기로 한 나의 고백을 
매년 반복되는 거절의 계절 
거울만 보면 흐느끼던 겨울 


내게 겨울은, 겨우 우울




    2021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따뜻하고 행복해야 할 연말에 조금 무거운 시를 들고 오게 되어 조금 미안하지만, 글의 시점이 이미 몇 년 전의 일이니 가볍게 읽어주시면 된다.


    절친한 친구에게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너무 분명하게 '친구'인 사이였는데 어느 날 꿈에서 그 녀석이 '연인'으로 나타났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그 꿈을 복기해보는데, 그것이 징그러운 악몽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전까지 한 번도 상상도, 기대도 하지 않았던 관계의 모습이 내 머릿속 한 곳을 자리 잡았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불가능한 꿈을 꾸게 됐다. 그렇게 혼자 몇 달을 끙끙대다 툭 던지듯이 고백을 해봤다. 자칫 진지한 고백은 이미 충분히 소중한 우정을 흔들 수 있으므로, 정말 떠보듯이, 만우절 농담처럼. "우리 이럴 거면 그냥 사겨!" 갈겨버렸다. 그러자 그 녀석은 너무 능글맞게 "이미 사귀고 있는 거 아니었나?"라고 답했다. 뭔가 엄청 분했는데, 그 대답의 가벼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대수롭지 않은 말이 내 마음을 너무 쉽게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혼자 열 받았던 것 같다. 와중에 그 말이 듣기 좋아서 이후로도 몇 번을 '고백으로 혼내주기' 해버렸다. 그래도 그 친구가 정색하며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이니? 우린 친구잖아,"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연애보다 깊은 우정, 법률혼은 아니어도 사실혼쯤은 되니까. 그걸로 되지 않았나?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내가 한 것은 만족이 아니라 체념이었더라. 둘 다 연애 중이 아니고, 서로 가장 소중한 친구이지만 연인은 될 수 없는 관계. 연인이란 뭘까, 친구라는 건 뭘까. 우리는 왜 연애를 할 수 없는 걸까? 허기처럼 하루에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비참함에 내가 미련이 있다는 걸 알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의 미련은 우리가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단 한 번도 내 진심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장난치듯이, 거절을 당하더라도 도리어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치냐며 너스레를 떨 수 있도록 나는 내 마음을 장난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건 내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안 될 걸 알지만,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내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나 지금 너무 무서운데, 정말 큰 용기 내서 하는 말이니까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좋겠어... (중략) 우리의 관계를, 서로 연애라고 부르는 관계가 될 가능성은. 정말 일말의 여지도 없는 거니?"


    약 2.72초 후에, 너는 '응, 없을 것 같아'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아프다기보다는 후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본 1400만 개의 미래 중에 네가 내 고백을 받아주는 미래는 없었어. 내가 너와 연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공유하는 사이잖아. 심지어 성별까지 같았더랬지.

    서로 야동까지 공유하는 불알친구랑 연애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가 뼛속까지 헤테로인 걸 나도 아는데, 나 역시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좋은 부모가 되는 게 꿈인데. 나도 애초에 내가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었다고. 차라리 네가 '그래, 사귀자'라고 했으면 많은 것들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백일몽은 여기서 끝나는 게 맞았다.

    너는, 아니 그 친구는 참 고맙게도 그날의 고백을 '없던 일'로 해주기로 했다. 그다음 날도, 그 이후로도 계속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내줬고, 나도 친구로서 그를 대할 수 있었다. 너무 다행이지. 괜한 주책으로 친구를 잃을 뻔했잖아. 그리하여 해피엔딩이다. 먼 훗날에 '네가 나한테 고백했었잖아,'하며 웃을 해프닝으로 남을 수도 있겠다. 아냐, 아마 평생 비밀로 남겨두지 않았을까.


    시를 쓴 것은 그로부터 또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해 독감처럼 나를 지나간 그 감정에 대해 나는 오랜 기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남자에게 연정을 느끼다니, 내 성적 지향에 대해 한참을 질문하기도 했고. 사실 시의 자세한 배경을 설명하는 지금도 공개적으로는 처음 이런 시간이 내게 있었음을 고백하는 일이라 무척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비참함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때의 고백을 더 이상 '없던 일'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 내 마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계속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그런 마음을 가졌던 것이 돌이켜봐도 잘못은 아닌 것 같아서. 2021년이 가기 전에 용기 내서 시의 해석을 적어본다.


    별 만한 희망에 잠 못 드는 밤이 있었다. 별 같은 희망이 있구나, 작고, 아른거리고, 닿을 수 없는 희망이. 고백을 하는 동안에도 절대 기대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거절을 당했을 때 비참함이 없지 않았다. 실망을 느낀 것을 보니 먼지만큼, 밤하늘의 별만큼 나는 기대를 했었나 보다. 보다 정확하게는, 나는 각오를 했었다. 네가 내 마음에 응해준다면 나는 내 평범함을 포기할 각오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자친구를 기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할 각오를, 세상의 혐오보다 무서운 자기혐오를 마주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만큼의 진심이 있었다. 그 마음이 무엇이었을까, 그 마음을 없던 일로 두어도 좋은 걸까. 거절을 당한 그 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을 설쳤다. 그러는 동안에 창밖에는 푸르게 새벽이 몰려오더라. 그날 밤은 정말 길었는데, 내 생애보다도 길었던 것 같은데. 해가 뜨고 새들이 우는 소리에 나도 우르르, 울고 말았다.


    이맘때쯤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내 사랑의 형태는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 궁금해했다. 몇 계절이 지나도록 나는 친구에게 고백했다 차였다는 진부한 이야기조차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누군가가 왜 그렇게 침울해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겨우 조금 우울하다고밖에 답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다. 그저 그 해의 겨울을 생각하면, 겨우 우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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