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인용구
가을비 가늘게 내리는 날에는 나까지 비롭다
유화 물감으로 겨우 다 칠한 단풍이
그새 덧없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마른 잎 젖으면 타는 냄새가 난다
갈빛으로 그을린 가을 냄새가
타닥타닥 빗소리에 모닥불처럼 피어오른다
나는 걸음을 그치지 못하고 있다
두꺼워진 외투만큼 얹힌 것들이 많아
관성에 의지한 채 쓰러짐을 보류하고 있다
우르르, 구름처럼 뭉텅뭉텅 무너져
가을빛에 녹아지면 차라리 좋으련만
나는 왜 낙엽조차 흘리지 못할까
빗방울이 툭툭 나를 부추기기에
못 이기는 척 고개라도 떨구어본다
눅눅한 땅바닥이 쏟아질 듯 가깝다
나는 여름 장마가 아니면 대개 우산 없이 비를 맞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기분이 좋아서, 라고 하면 꽤 낭만적이겠으나 더 솔직한 이유로는 우산을 챙겨다니기도 들고 다니기도 귀찮아서 그렇다. 봄이나 가을에 내리는 가랑비는 시야를 흐리게 할 정도로 안경을 더럽히지도 않거니와 실내에 들어갈 때 민폐가 될 수준으로 몸을 적시지도 않으니 제법 맞을만하다. 뭔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환절기에 내리는 이 옅은 비는 꽃잎이나 낙엽을 함께 떨구기도 한다. 어차피 곧 내려앉을 것들이지만 괜히 비가 이별을 재촉하는 것 같아 아쉽고 섭섭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들은 빗방울보다도 약하구나. 가랑비 주제에 매몰차기도 하지.
가을은 떨굼의 계절이다. 봄과 여름, 푸름을 장식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겨울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정확히는, 다시 찾아올 봄을 준비하는 것이리라. 새 잎이 돋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색 바랜 잎들을 떨구는 것이다. 헤어짐은 아쉽지만 필요하다. 떠나보낸 것들을 그리워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떨어져 나간 자리의 허전함에 소스라치던 가지들을 나는 보았다. 그러나 "잎 앓이"가 무서워 이파리를 떨구지 못하는 낙엽수는 없다.
나는 나무랄 데 없이 미련한 놈인 듯하다. 이미 죽은 것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약속이나 나를 잊었을 관계, 유령에 시달리며 지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썩어가는 것들을 혹시 조금만 더 내가 붙들 수 있다면,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기억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나 보다. 이제 나는 안녕을 말하려고 한다. 안녕해지려고 한다.
마음에 비가 온다. 모질게 비를 뿌리기로 했다. 우산 없이 비를 맞을 것이다. 조금은 홀가분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