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용구 Jan 25. 2022

Appendix

꿈은 맹장 같은 것

꿈은 맹장 같은 것

Appendix

                            인용구


어릴 때 누구나 갖고 있었던 것

내 안에 남아있는지도 모르고

잊은 채 살다가 살아가다가

어느 날 너무 아파서

나를 아프게 해서

떼어내는 것


꿈은

맹장 같은 것



    혹시 여러분은 맹장 수술을 받으신 적 있나요? 저는 다행히도 아직까지 없습니다. 맹장은 대장 중에서도 소장과 연결된 위치에 주머니처럼 부풀어있는 부분을 말합니다. 정확한 명칭은 "막창자"라고 부르는데요, 우리가 즐겨먹는 돼지 막창은 항문 가까이에 있는 대장 끄트머리를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니 조금 다르네요. 우리 몸의 막창자는 큰창자가 막 시작되는 부분, 돼지 막창은 창자의 마지막 부분, 이렇게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맹장이 터졌다'고 할 때 이야기하는 기관은 엄밀하게 말하면 맹장 끝에 달린 "충수돌기 (충수)"라는 기관입니다. 충수돌기는 직경 5mm, 길이 6~10cm 가느다란 관처럼 생겼는데, 이것의 입구가 변 등으로 막히면 충수염이 생기는 것입니다. 폐쇄된 충수 내에 미생물들이 번식하게 되고, 염증이 심해져 팽창하다가 괴사한 조직이 터지면 그걸 '맹장이 터진다'고 부르는 것이죠.

    그렇다면 충수돌기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알려진 바로는 대장 안에 있는 유익한 균들의 개체수가 감소했을 때 우리 소화기관이 필요로 하는 균들을 배양하는 기능이 있다고 해요. 그러나 충수염이 생길 때 "맹장 수술", 다시 말해 수술적 절제를 통해 치료를 하는 것을 보면 충수는 삶을 지속하는 데 꼭 필요한 기관은 아닌 것이죠. 그래서 충수는 새끼발가락 보다도 쓸모가 없는 기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진화론의 아버지 다윈도 충수는 인류의 식생활이 바뀌면서 퇴화된 흔적 기관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말, 토끼, 소 등의 초식 동물들은 충수가 훨씬 길고 육식을 하는 동물들은 충수가 짧거나 없기도 합니다.


    시에 대한 해설은 안 하고 뜬금없이 생물학적 TMI들을 쏟아내서 당황스러우실 것 같습니다. 음, 조금이라도 유익한 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라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뜬금없이 맹장에 대한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맥락은 이렇습니다.

    며칠 전에 위기철 작가의 <아홉살 인생>이라는 소설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제 나이도 아홉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모처럼 쉬지 않고 책 한 권을 완독 하면서 뿌듯함을 느꼈는데, 그 어린 나이에는 어떻게 이 250쪽이 넘는 책을 읽었는지 신기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기사 그때는 소설이라면 하루에 몇백 장도 읽었으니, 독서력은 지금이 오히려 더 떨어졌을 수도 있겠네요.

    어렸을 때는 소설 속의 동갑내기 주인공 '백여민'에게 많이 이입해서 읽었습니다. 가난한 산동네에서 사는 여민이를 싸움을 잘한다는 이유로 내심 부러워하기도 했던 것을 보면, 저는 여민이만큼 어른스러운 아이는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책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다르기는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여자 아이들의 행동들도 제법 그 이유가 보이고, 지금의 제 나이 또래였을 '골방 철학자'의 비참하고 한심한 모습에서는 거울을 보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위기철 작가가 이 책을 썼던 나이가 스물아홉이라 하니, 참 대단하고... 배 아픕니다. 아야.

    주제만 바뀌었을 뿐 또 TMI를 늘어놓고 있네요. 빠르게 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소설에서 여민이가 좋아하는 여자 아이 "우림이"가 어느 날부터 학교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민이는 자신과의 오해 때문이 아닐까 걱정하지만, 학교로 돌아온 우림이는 맹장 수술을 받고 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어지는 장면을 공유합니다.


    "수술 자국이 아파?"
    "아프진 않지만..."
    우림이는 수줍게 웃었다.
    "보기에 무척 흉측해. 하지만 만일 네가 내 수술 자국을 정말루 보고 싶어 한다면, 난 보여줄 수도 있어. 왜냐하면 나는 너한테 내 흉한 모습을 속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그게 너무 흉측해서 갑자기 내가 싫어진다 해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림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절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 아이가 어째서 절망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술 자국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냐구? 그건 내가 부끄러워하는 상처이기 때문에 상관이 있는 거야. 맹장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어. 나만 빼놓고... 나는 수술 자국을 볼 때마다 그걸 몹시 부끄러워하게 될 테지."
    "하지만 맹장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한 거야?"
    "물론 맹장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하지만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걸 내가 못 가졌다는 사실이야. 난 그걸 참을 수 없는 거야. 이해할 수 있겠니?"
    물론 이해할 수 없었다. 아홉 살은 사람들의 부질없는 허영심까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므로. 그러나 허영심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나는 알게 되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맹장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조차 기필코 차지하려 드는 멍텅구리들이 세상에 뜻밖에도 많다는 사실을. 우림이는 그렇게 허영심이 많은 아이였다.

<아홉살 인생> 중에서


    뭐랄까. 조금 아픈 글귀였네요. 저는 우림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불안함'이었던 것 같아요. 모두가 갖고 있는데, 나만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 그런 불안함으로 열심히 살았던 것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저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도 너무 많이 신경 쓰며 살아왔던 것도 같습니다. 그 불안함을 '허영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아무 반박도 할 수 없는 것이 부끄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별개로 '맹장'이라는 되게 신선한(?) 소재로부터 이렇게 묵직한 주제를 꺼내다니, 작가의 센스에 허가 찔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맹장이라는 것이, 보이지도 않고 특별한 쓸모도 없는 게 어느 날 뒤집어져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기관이잖아요. 이거 시 한 편 뚝딱 나오겠다, 생각해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정말 맹장은 아무 역할이 없나? 맹장은 왜 터지지?라는 이과  호기심 때문에, 잘 알아보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위에 올렸던 내용을 공부한 거고요.


    어릴 때 우리 모두 꿈이 있었습니다.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여러 갈래의 길 위에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삶은 하나뿐이라 분명 모두 이루지 못한 꿈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꿈이 많았으니까요. 이를테면 저는 호그와트를 입학하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여민이 나이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답니다. 영국 나이는 만 나이를 따지니까, 저에게도 어느 아침에 호그와트 입학 통지서가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었죠. 스무 살의 저에게는 맥도날드 알바를 해보고 싶다는 꿈도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빅맥 햄버거 조리법을 배우는 건 삶의 한 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아가 젊을 때 '안 해본 일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알바를 하며 경험을 쌓고 싶기도 했습니다. 현장 경험이 많은 멋진 어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호그와트 입학은 불가능한 꿈이었지만 맥도날드 알바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지 못했습니다. 안 했죠. 아마 모두가 열심히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만 휴학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 허영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저는 골방 철학자처럼 남은 20대를 계속 공부만 하면서 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저에게는 꿈이 있나 생각해봅니다. 사실, 그 고민을 5분 이상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꿈을 말하는 것이 공염불 같달까요. '쓰잘 데 없는 생각할 시간에 지금 할 일이나 잘 하지,'라며 괜스레 저를 다그치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못 이룬 꿈들이 아랫배를 쿡쿡 쑤셔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꿈은 누군가가 물어볼 때 한심해 보이지 않기 위해 지어내는 변명에 불과했던 것도 같습니다. 뭐, 지금의 장래희망은 일단 졸업이죠. 그러나 대학원 졸업 후에 어떤 삶이 펼쳐질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그림이 없습니다. 이런 한심한 인간이라도 불러주는 회사가 있다면 넙죽 절하며 들어가 돈 벌고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통장에 꽂히는 월급을 보며, 그것으로 사 먹는 몇 끼의 맛있는 식사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만족하며 흐린 눈으로 여생을 살아도 그리 나쁘지는 않지 않을까 솔직히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 시를 쓰는 순간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꿈을 절제해버린 것입니다. "미래의 꿈보다는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면서 살기로 했어요"라는 허울 좋은 변명까지 마련해놓고 저는. 평범한, 그래도 어디서 꿇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우수한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꿈, 그것은 있으나 마나 한 맹장 같은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맹장 수술을 받으셨나요? 아아, 저는 제가 꿈 절제 수술을 이미 받은 줄 알았습니다. 지금의 통증을 느끼기 전까지 말입니다. 위기철 작가를 보며 느꼈던 배아픔도 작가에 대한 저의 꿈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먼 미래에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삶의 어느 시점에는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비밀스러운 꿈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 역시 또 하나의 허영심일 수도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제 주변에는 너무 훌륭한 사람들이 많아서, 꿈 없는 사람이라는 게 들통나 뒤쳐지기 싫다는 마음에 다시금 꿈을 찾아보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꿈은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충수돌기는 '대장의 유익한 균들의 개체수가 감소했을 때 우리 소화기관이 필요로 하는 균들을 배양하는 기능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복습까지 시켜드림) 다시 말해 설사 등의 장애를 겪으며 우리 몸이 약해졌을 때, 충수는 해로운 균들이 번식하지 않도록 개체수를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면역력에 작은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은 우리가 흔들리고 마음이 아플 때,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강한 인력으로 우리가 오늘을 살도록 합니다.


    시의 제목이 Appendix인 이유만 말씀드리고 글 마치겠습니다. Appendix, 아마 단어의 뜻을 이미 아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책 등의 "부록"을 뜻하는 영단어인 동시에, 충수돌기의 영어 이름이기도 합니다. 저도 두 번째 뜻은 이번에 알았습니다. 애초에 충수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군요. 부록도 충수돌기처럼 있으면 유용하나, 본문에 포함시킬 정도로 중요하진 않은, 그래서 시간이 부족하거나 인쇄할 용지가 부족할 때면 떼고 읽는 장이네요.

   우리의 자서전에 appendix가 달린다면, 그곳에는 제가 삶의 어떤 시점에서 꾸었던 꿈들을 기록해놓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9살의 용구 - 호그와트 입학하기

20살의 용구 - 맥도날드 알바하기

이렇게 공유하기 민망한 TMI들을요. 오늘 밤에는 26살 용구의 꿈을 기록해보아야겠습니다. 언젠가 (불혹의 나이에) 색인(index)처럼 제 삶을 들춰볼 때 이 부록이 소중한 자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3년 전에 제가 꿈에 대해 썼던 글이 있네요. #나는꿈캠페인 이라고, 자신의 꿈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 그리고 마법의 주문을 쓰는 활동이었는데... 아싸인 탓에 많은 참여를 이끌어내진 못했고요. 언젠가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면 다시 시도해보고 싶은 꿈도 있습니다. 혹시나 참여하시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정말 환영합니다. 글 남겨주시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댓글에 참여 방법 적어놓을게요.)



#나는꿈캠페인


나는 꿈꾸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나의 재능과 시간과 마음이 당신에게 이롭게 쓰이기를
나의 존재로 당신이 조금 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듯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가 더 서로 깊이 연결되는 세상을 꿈꾼다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위로와 도움을 건네는 세상
미움 없는 따뜻한 경쟁을 하며 더불어 성장하는 세상
다양성을 인정하고 모두가 존엄한 삶을 사는 세상을 원한다


나는 사회에서 더 큰 나를 발견하기를 꿈꾼다
더 많은 사람과 가치를 나누고 공감하며
서로 닮아가는 우리를 발견하기를 원한다
당신의 꿈이 나의 꿈이 되고 나의 꿈이 우리의 꿈이 되어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당신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공학을 한다

당신에게 감동과 생각할 거리를 주는 글을 쓴다

사람과 사회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나의 역할을 고민한다

새로운 경험을 쌓으며 나의 생각에, 당신과의 관계에 깊이를 더한다


꿈은 나를 이루고

나는 꿈을 이룬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