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부터는 기숙사를 1인으로 신청하여 혼자 살고 있다. 이전 룸메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2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드는 시점에 다른 성인 남성과 5평 미만의 방을 공유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도 맞았다. 혼자 사는 것은 확실히 편하다. 일단은 2인실을 혼자 쓰는 것이기 때문에 공간을 두배로 쓸 수 있고, 덕분에 맞은편 침대 위에는 너저분히 옷들을 늘어놓을 수 있다. 방의 반쪽은 폭탄을 맞은 것처럼 개판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아무도 방에 들어올 일이 없으니(...) 나만 신경쓰지 않으면 괜찮다. 냉장고도 있겠다, 방에서 간단한 식사를 해먹을 수 있다며 나름 살림도 차리기 시작했다. 시리얼을 말아먹기 위한 그릇부터 해서, 숟가락 젓가락에 과일을 깎아먹겠다고 과도도 샀다. 전열기구를 쓸 수 있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다 쓰임이 있다면서 소금, 후추, 간장에 참기름까지 장만했다. 이어폰 없이 영화도 보고, 늦은 시간까지 게임을 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이 작은 공간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한편 이 생활이 마냥 즐겁고 좋은 것은 아니다. 뭐랄까, 방을 돌아보면 온통 내 자취 뿐이라는 게...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외로움을 느낀다. 고독함이라기에는 알량하고, 공허함이라기엔 마뜩찮은. 감각은 무기력함이라고 해야할까, 죽음에 가까운 감각이다. 슬프거나 우울한 건 아닌데, 하염없이 무기력해져서 컴퓨터 앞에만, 침대 위에만 가라앉아있는 시간이 많다. 일단 연구실 출근이 정말 어려워졌다. 아침에 눈은 떠지는데 어영부영하면서 결국 점심시간까지 방에만 머무는 식이다. 룸메가 있었을 때에는 룸메의 루틴에 나도 어느정도 따라갔는데, 늦게 자거나 출근을 안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냥 마냥 한심하게 있어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치 안 보고 야동을 보고, 대낮에도 불끄고 게임을 켠다. 의식적으로 외출을 하려고 해도 방문을 나서는데 두시간이 걸린 날도 있었다.
어느 주말에는, 새벽까지 게임을 하다가 눈을 뜨니 1시였다. 아무리 늦게 자도 오전에는 일어났는데, 진짜 생활이 망가졌구나 싶더라. 암막 커튼 사이로 햇빛이 한가닥 들어오는데,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더니 2시였다. 어이가 없었다. 이게, 20대? 이게 내 삶? 방금 사라진 한시간을 뭐라 불러야 할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관측하지 않는, 나밖에 모르는 이 공간 이 시간의 나는 실존하는 게 맞을까? 누구도 찾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는 완전히 단절된 나는 존재의 의미가 있을까? 방금 내가 1시에 죽어서 2시에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해도 전혀 무방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지금 눈을 꿈뻑거리며, 산소를 낭비하는 시간도 죽어있느니만 한 것 아닌가.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우습게,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머리에 떠올랐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어쩌면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인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 속의 고양이는 50%의 확률로 살아있거나 죽어있다, 또는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다. 다시 말해 상자를 열어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의 상태는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있다 불러도 무방하다. 내가 그 고양이 같았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방 전체에 드리워져있었다.
시를 쓰게 된 것은 이런 생각에서 비롯했다. 물론 시는 조금 상태가 좋아졌을 때 이지적(理知的)으로 공들여 썼다. easy하진 않았다. 시의 제목은 양자역학을 꼬아서 <혼자역학>으로 정했다. 물론 나는 양자역학에 대해 아주 초보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이긴 하지만, 현대 물리는 존재와 인식에 대한 남다른 관점과 교훈을 선물한다. 대표적으로 E=mc^2라는 유명한 공식은 물질(m)과 에너지(E), 즉 존재와 그것의 무한에 가까운 포텐셜(i.e., 영향력, 가능성)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이해를 조금 넣고 싶어서 시에서는 빛의 이중성에 대한 비유도 집어넣었다."파동처럼 흔들리고 입자처럼 흩어지면서" - 이 부분인데, 나 스스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지금의 게으른 모습은 그저 오랫동안 남 눈치를 보며 숨겨왔던 한심함이었을까, 열심히 살다보면 겪을 수 있는 번아웃 같은 걸까. 나는 쓸모있는 인간일까, 오늘의 삶도 가치가 있는 걸까. 뭐 이런 생각.
"커튼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들어와" 부분 역시 알 사람은 알만한 전자빔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한 오마주다.
빛, 전자는 입자로도 파동으로 존재할 수 있다.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처럼, 질량을 가진 전자도 파동처럼 행동하며 간섭무늬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을 발견한 이 실험은 전자를 단순한 입자가 아닌 확률적인 양자(quantum), 또는 오비탈(orbital)로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누수된 메모리와 도체 내부의 전하"구절은 나름 전산학과-전자공학과 복수전공한 사람으로서의 귀여운(?) 비유였다. 사용된 메모리 소자가 프로그램의 오류나 갑작스런 종료 등의 이유로 free되지 않으면, 이른바 메모리 누수가 일어나면 시스템은 의미없는 값들로 채워진 메모리를 가득찼다고 인식한다. 도체는 표면에만 전하가 분포하기 때문에 내부의 전기장은 0, 전하량도 0이지만 겉보기로는 전하로 가득차있는 것과 구분할 수가 없다. 이렇게 쓸데없는 걸로 꽉 차있고, 껍데기만 멀쩡하고 속은 텅 비어있는... 그런 상태에 대한 이과생 같은 표현이었습니다. 뭔가 갑자기 존댓말이 나오네요, 맹장 얘기도 그렇고 아는척이 심해지는 것 같을 때 좀 민망해집니다.
흠흠, 무튼 해설이 많이 필요한 글이었다. 오랜만에 브런치로 인사드리는데 죄송합니다. 그래도 또 누군가의 취향에는 맞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끝으로 딱 하나만 더하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는 개념이 있다. "위치와 운동량 (또는 에너지와 시간)을 동시에 특정할 수 없다"라는 명제로, 이것도 양자역학에서 등장하는 상태의 중첩, A or B에 대한 내용이긴 하지만, 이것이 등장한 배경은 결국 '관측 행위는 관측 대상과의 상호작용으로 대상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두개의 물리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실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측 행위는 대상에게 영향을 준다. 관찰예능에서 보는 연예인들의 모습이 그들의 평소 진짜 모습과 완전히 같을 거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의식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 결과의 행동은 위선일지라도 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꼭 홀로 있는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혼자있는 나는 가끔 한심하고 밉상이더라고. 어쩌면 나도 내 삶을 관측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건 아닌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냥, 내가 잘 먹고 잘 자는지 관심가져주고 챙겨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랄까. 외롭긴 한가보다.
P.S. 아, "점멸하는 나는 이따금 죽기를 반복했지만" -이부분도 롤(리그오브레전드)를 하는 사람이면 이해하겠지만, 게임에 나오는 점멸을 노리고 쓴 구절이 맞다. 참고로 D점멸 F점멸 말이 많은데, 나는 처음 배울 때 돌팔이가 잘못 습괸을 잡아줘서 스페이스바 점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