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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May 09. 2022

발소리

저녁저녁, 새벽새벽

발소리

                            인용구

기-ㄴ 노을 걸쳐 입고

바다 너머 하루 갈 때

젖은 밑창 저벅저벅

저녁저녁 소리 나네


파도처럼 밤 걷히고

별 밟으며 하루 올 때

마른 하늘 사박사박

새벽새벽 소리 나네


저녁저녁 멀어지고

새벽새벽 다가오네

오늘의 발소리


    해가 뜨고 지는 일은 말 그대로 매일 있는 사건이지만, 보고 있자면 언제나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에게, 또 시작하는 이에게 인사처럼 건네는 풍경은 우주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그들은 이름도 예쁘다. '여명(黎明: 검은색의 밝음)'과 '황혼(黃昏: 노란색의 어둠)'이란다. 낮과 밤의 성질을 반씩 나눠가진 시간의 풍경에 대해 전에도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날이 밝아온다.

새벽하늘에서는 어떤 노란 기운도 찾을 수 없다.
황혼이 붉게 지듯이, 여명은 푸르게 밝아온다.

어둠은 자신의 색으로 진다.
감췄던 색깔을 살짝 드러내고 수줍어하면, 태양은 그제야 제 빛을 완연히 펼쳐 어둠을 덮는다.
자신의 붉은 기운은 최후까지 숨긴다.

빛을 내는 존재라면, 그 정도 배려를 갖추는 것이다.
물들이는 것이 아니라, 밝히는 것이기에.

(2016년 6월 10일, 새벽 5시 쓴 글에서.)


    사실 태양은 흰색에 가깝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푸른 새벽'과 '붉은 노을'이 나타나는 것은 빛과 어둠의 진짜 색깔과는 관련이 없고, 지구 대기에 의한 현상(레일리 산란 현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태양은 붉고 어둠은 푸르다. 그들이 서로에게 하늘을 양보할 때 잠시 동안 내비치는 광채, 또는 암영은 하루의 몫을 다하고 '지는 것'의 마지막 커튼콜 인사이다. 우리에게 내일을 기약하는 안녕인 동시에, 이제 내가 반대편의 지구를 낮으로, 밤으로 인도할 테니 뒤를 맡긴다고, 오늘도 잘 부탁한다고 서로에게 건네는 응원이다.

    위의 글은 태양의 관점에서, 왜 일출의 순간은 일몰보다 단출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떠오르는지, 푸름과 붉음의 시각적인 심상을 생각하며 썼던 글이다. 이번에는 낮과 밤의 경계에 대해 글을 쓰는데, 청각적인 연출을 주고 싶었다.

    일출과 일몰 = 여명과 황혼 = 새벽과 저녁. 여명과 황혼이란 단어는 위의 뜻풀이처럼 색을 표현하는 시각적인 단어였다면, 새벽과 저녁은 우리말이어서 그런지 소리 내어 읽기도 쉽고 반복해서 읽다 보니 약간 의성어처럼 느껴졌다. 약간 억지를 보태서, 발소리 같았다. 저녁저녁. 새벽새벽. 저벅저벅인데, 조금 지친 발걸음으로, 젖은 밑창으로 걸으면 저녁저녁. 사박사박인데? 이제 설탕처럼 쏟아진 별 위를 걸으면 새벽새벽.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읽으면 그렇게 들린다. 아님 말고, 흥.

    새벽과 저녁의 대비되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 '갈 때' <-> '올 때', '젖은', <-> '마른' 같은 단어를 연 상에서 같은 위치에 두기도 했고, 또 반복되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하루'라던가 '소리 나네'를 마찬가지로 배치하기도 했다. 공통과 대비를 같이 두면 제법 시적인 표현이 된다. 아님 말고, 흥흥.

    그래도, 혹시나 시가 괜찮게 읽힌다면 기쁠 것 같다. 살짝 동시 같은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모처럼 감각적으로 써 내려간 글이어서 마음에 든다. 국어사전에는 없는, 지어낸 표현이 누군가에게 비슷한 느낌으로 전달될 때의 짜릿함이 있다.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끼리, 처음 보는 표현에서도 유사한 뉘앙스를 공유할 수 있다면, 통하는 게 있다면. 그것이 언어의 힘이 아닐까 싶다.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쪼록 혹시나 복잡한 마음으로 하루를 끝내는 사람이 있다면, 또는 밤을 지새운 사람이 있다면. 머릿속 소음을 비우고 오늘의 발소리를 들어보기를 권한다. 가만히 귀 기울이며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을 바라보자. 그게 나한테는 위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다가올 모든 새벽과 저녁을 응원한다.

사진 출처: pixabay

*레일리 산란 현상까지 언급했으니까 한마디만 더하면, 하루가 오고 간다는 나의 글도 너무나도 천동설(?)에 기반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사실은 지구가 자전을 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생기는 건데 말이다. 자꾸 이과충처럼 굴어서 미안하지만, 하늘의 색깔도, 낮과 밤도 모두 사실 우리 지구가 대기가 있어서, 또 자전을 해서 생기는 기적임을 인지하는 것은 그것대로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모든 기적은, 감동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 써놓고 보니 눈에 띄는    하나는 '푸른 새벽' '붉은 노을' 모두 노래의 이름이기도 한데, 아마 이문세의 "붉은 새벽" 유명할 거야. "푸른 새벽" 그룹의 "푸른 새벽" 앨범에 "푸른 새벽"이란 노래가 있다. 그냥 앨범 자체가 명반이니까 혹시 늦은 시간까지   드시는 분이 있다면 들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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