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용구 May 21. 2022

징검다리

강물이 콸콸콸 흐르고




    선의로 대함으로서, 성의를 다함으로서, 일을 망쳐버릴 때가 있다. 작년의 일이다. 과제 관련해서 여러 명이 나눠서 쓴 보고서를 취합하는데, 사수 형에게 하나의 문서로 합쳐서 드리려고 했더니 그림과 표의 숫자가 제멋대로였다. 그걸 고쳐서 드리겠다고 도합 15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를 하나하나 넘기며 수정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숫자 17이었나를 두 번 입력해서 다시 실수한 지점부터 뒤의 모든 숫자를 수정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잡무'를 한 시간 가까이해서 전달드렸더니, 알고 보니 애초에 우리가 취합한 내용도 전체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내가 했던 일은 의미가 없었고, 오히려 번호의 자동 완성 기능을 내가 편집하는 과정에서 삭제해버려서 일만 두배로 번거로워졌다.

    사수 형은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잠깐 보더니,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어렵게 골라 건넸다. 그러고는 내가 편집하기 전의 원본을 다시 받아갔다. 내 시간을 한 시간 낭비한 것 빼고는 사수 형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엉망이었다. 부질없는 짓을 했구나.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냐, 으이구 x신 하면서 자책을 했다. 만약 사수 형이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요,"라고 꾸짖기까지 했다면 더 속상했을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형에게 고마움이 컸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선의와 노력을 생각하며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나도 되고 싶다.


    살짝 더 나아간 이야기인데,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도미노 쌓기 게임을 단체전으로 한 적이 있었다. 같은 시간 동안 누가 더 많은 개수의 도미노를 연결하냐를 갖고 경쟁을 하는 내용이었는데, 우리 팀이 참 잘하고 있다가 갑자기 따르르르, 멀리서부터 도미노가 빠른 속도로 넘어지더니 결국 우리가 여태 만들었던 도미노들이 몽땅 쓰러진 적이 있다. 곧바로 우리는 범인(?) 색출에 들어갔고, 실수한 친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들어보니 도미노 간격을 일정하게 맞추려고 하다가 그랬다고 했다. 도미노를 새롭게 쌓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놓여있던 도미노들을 굳이 건드린 게 이해가 안 돼서 타박을 주었는데 지금은 많이 후회가 된다. 어차피 쓰러뜨릴 도미노, 즐겁자고 하는 게임에서. 그깟 호승심에 가뜩이나 자책하는 친구를 괴롭히는 게 참 못됐다. 근데 나는 요즘도 그렇다... 롤 할 때도 게임의 패배로 이어지는 작은 실수를 한 친구에게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한다. 사실 도미노, 그거 중간에 몇 개 빼놓으면 작은 실수를 해도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롤도 패배의 지분이 나에게는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구조의 게임이 아니다. 나는 그 패배의, 실패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남탓을 하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죄책감을 느끼는 당사자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조금은 안심을 했다. 실수한 친구가 가장 거지 같은 기분일 텐데, 그에게 원망을 내비쳤던 내가 참 비겁했다는 반성을 한다. 아이고... 애들이 착해서 나랑 놀아주는 거지, 누가 나랑 같이 놀고 싶어 할까. 동료의 실수에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들이 내게 보여주는 너그러움만큼 나도 베풀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동료로 남는 것인데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발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