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동시에 시원한 소리
인용구
어느 날 장마처럼 시작된 매미 울음은 어젯밤도 잠드는 순간까지 끊이지를 않았다. 기숙사에서 듣던 끝 봄의 개구리 울음처럼 이 역시 한철이거니 생각하다가도, 침묵만 눈처럼 쌓이던 작년 겨울은 적막해서 어찌 지냈었는지 돌아보았다.
11층이나 되는 우리 집 베란다 방충망에 매미가 들러붙기라도 하는 날에는 저 엄지만한 몸통에서 어떻게 그리 큰 소리가 나오는지, 경탄에는 조금 못 미치는 감탄을 품고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매미 배 밑의 그물창을 딱밤 때리듯이 튕길 때의 내 표정은 무심함보다 귀찮음에 가까웠다. 매미는 마음이 닫힌 관객 앞에서 노래를 멈추고 푸르르 날아가 버렸다.
노래, 왜 노래라는 표현을 쓴 걸까. 일반적으로 매미가 ‘지저귄다’라고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자지러지도록 폐 (폐가 있다면) 끝까지 쥐어짜 토해내는 울음에는 분명 가사가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어도 감동을 일으키는, 어떤 한(恨)이 서늘하게 분명 내게 닿았다.
그 섬짓함의 기원을 생각해보았다. 매미가 목청껏 쉼 없이 노래하는 이유를. 가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리라. 매미는 낙엽과 같은 색깔의 미련을 벗어 걸어놓은 채, 단단해진 몸통으로 햇빛을 맞아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한 달 남짓한 시간을, 찬란한 마지막 여름을 그들의 방법으로 살아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매미는 삶을 낭비하는 일이 없다. 십몇 년을 굼벵이란 이름으로 지새운 녀석들은 소나기처럼 소리를 쏟아냈다. 여름 동안 세상은 매미의 무대였다. 태양은 그들의 조명이었다. 오랜 시간 침묵한 명창의 목청은 햇살보다 예리하게 갈려서 여름 하늘에 산란했다. 대견하다. 아니, 그들이 미물이 아닌 사람이었다면 나는 존경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뜨거운, 동시에 시원한 소리를 마냥 시끄럽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은 매미의 사체가 발에 채였다. 자연사한 매미를 오랫동안 관찰했다. 평온하다. 한바탕 놀았으니 다음 무대로 떠난 것이다. 허물어질 껍데기는 다시 벗어던지고.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올해의 첫 매미 울음소리를 들었다. 장마라더니, 줄창 시원하게 비만 내리기나 할 것이지 덥다가 소낙비가 쏟아졌다가 한다.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았다가 온통 젖어서, 기숙사를 들러 샤워를 하고 왔다. 씻기 전에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지금 젖은 것이 빗물인지 땀국물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이토록 덥고 습한 날씨에는 불쾌지수가 높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그렇게 불쾌하진 않았다. 그보다는 진짜 여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맞는 비, 매미 울음. 시원해야 할 것들에서 체온 같은 더위를 느끼면 움트는 감정들이 있다. 갑자기 옛날에 썼던 글들이 생각나 뒤져보았다. 장마, 매미 같은 제목의 글들을 보는데 이것 참, 나에게도 여름이 있었구나 싶다.
2016년에 쓴 글이랜다. 타고 싶다 글과 비슷하게, 아주 뜨거운 글이다. 나도 매미처럼 가슴 터지도록 무언가를 불러본 적이 있었나, 온 세상에 나의 존재를 외친 적이 있었나. 그런 부끄러움을 갖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나 진짜 청춘(春)이었구나... 아니, 여름이었다. 그날의 더위로 오늘의 나를 더 위로할 수 있어서, 글을 쓰던 그때의 나에게 고맙다.
2022년도 절반이 지나간다. 벌써, 라는 말은 부끄러우니 하지 않겠다. 여름의 끝에 풍요로운 가을이 있기를 바라면서, 뜨겁게 살아서 이열치열로 본격적인 여름을 견뎌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