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인용구
신문지색 하늘은 며칠째 우울을 쏟고 있었다.
한 남자가 우산을 쓰고 걷는다.
남자는 비가 익숙하다.
맑은 날을 바랐던 적도 있었으나 그것도 오래,
이제 남자는 기대 없이 장마를 견딜 뿐이다.
다만 그는 웅덩이를 증오한다.
그것은 발가락을 하얗게 시들게 한다.
남자는 발 디딜 곳을 살피며,
그저 집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별안간 비가 그친다.
오랜만에 맞는 햇살에 남자는 걸음을 멈춘다.
웅덩이도 숨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랗게 질린 웅덩이를 보며, 남자는 신이 난다.
'하하, 말라 죽어라 이놈.'
왠지 들뜬 남자는 목적지 없이 걸어보기로 한다.
평소 같으면 눈길도 주지 않을 카페에 들어가,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음료를 시킨다.
그의 전 애인이 늘 마시곤 했던 음료다.
남자는 그녀 생각을 부쩍 자주 한다.
돌이켜보면 좋은 시간 뿐이다.
그토록 다정했던 사람이 왜 떠나야 했는지
남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햇살이 남자의 손을 간질인다.
남자는 남은 음료를 해치우듯 털어 마시고
날씨를 즐기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선다.
그래, 오늘은 젖는 날이 아니다.
툭- 투둑.
얼마나 걸었을까, 남자를 놀리기라도 하듯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금세 굵어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남자는
카페에 우산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느새 비는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쏟아진다.
남자는 괜히 비참해진다.
차라리 하늘이 잠시 개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구름 뒤로 숨은 태양을 원망한다.
아, 그때 남자는 깨닫는다.
그런 이유로 너를 미워했다.
내 삶에 잠시 비친 네가
떠날 때 내 무언가를 가져간 것 같아서.
너 이전의 나보다 지금 나는 더 힘든 것 같아서.
그러나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느새 웅덩이는 목 밑까지 차오르고
남자는 비를 오래도록 맞았다.
빗물의 시선으로 우산을 본 적이 있다. 떨어지면 필히 죽을 높이에서 꼬물거리는 검은 정다각형들을 구경했다. 빗줄기가 만화의 강조선처럼 속도감을 부여하길래, 괜히 난간을 꽉 붙잡았다. 하마터면 물방울처럼 툭, 곤두박질 칠 뻔했다.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아,' 기분은 가끔 내게 장난을 친다. 그럴 때면 나는 정색을 하고 뒤로 물러나 팔을 잠가야 한다.
네가 보고 싶었다. 그건 불현듯 찾아온 생각이 아니라, 기억해낸 것이었다. 너는 항상 내 안에 있었고, 너를 끄집어낸 것은 고친 줄 알았던 습관 같은 것이었다.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한번도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었지만서도. 너와 이제는 사과도 용서도 주고 받을 수도 없지만.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