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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Apr 20. 2021

타고 싶다.

젖은 장작이다, 너는.


타고 싶다.

 시대를 뒤덮는 뜨거운 열기에 나도 한몫 거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떠한 계기가 나에게 막중한 사명을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한 개비 장작으로 던져져도 아쉬울 것 없는 초라한 삶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나의 의의를 아직까지도 답하지 못한 나로서는 한 줌의 재로서라도 남지 않으면 在하기가 어려울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불꽃을 피워내는 또래들과 함께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열망하는 청춘, 나는 그것을 동경했다. 靑春. 20대의 첫 봄은 어느 때보다 푸르리라. 빨간 색안경을 낀 채 우리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춤을 추리라. 밤새도록 고민하고 토론하며 노래하리라. 젊음의 불길은 내일을 부르는 여명으로 각인될 것이며, 검게 말라버린 나의 피를 다시금 붉게 산화시키리라.

 그러니 타올라라. 나의 가슴은 소리쳤다. 가만히 누워 있지만 말고, 불 속의 네 자리를 찾아라. 매일 밤 팔베개를 하고 천장을 올려다보노라면 白骨로 된 창살을 심장이 끊임없이 흔들어대어, 그 두근거림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방법도 모르고 용기도 없다. 내일 아침에도 나를 구속하는 일상이 있다. 저들의 불길은 요란하기만 한 폭죽이 아니더냐, 그 안에서 너의 역할은 무엇이며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겠느냐. 머리에서 솟아나는 시끄러운 변명들은 어느새 쿵쾅대는 심장소리마저 묻어버렸다. 작은 가슴마저도 채우지 못하는 얕은 포부에 어느새 가슴의 외침은 그 내용이 아득히 멀어져 비명만 같은 높은 공명음으로 남았다. 머리에 짓눌린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손가락이 저릿저릿 움직이지 않을 때면 어느새 눈동자에 얹힌 눈물은 어두운 방마저 흐릿하게 보이게 했다. 귓바퀴로 떨어진 눈물은, 내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젖은 장작이다. 젖은 장작이다, 너는.

 나는 젖은 장작이다. 매일 밤 매운 연기 같은 글을 토해내면서도, 한 번 제대로 불붙지 못하는 희나리다. 아직은 성장 중인 나무라고, 더 울창하고 시원하게 가지를 드리우면 그때도 늦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동안에도 꽃 하나 피우지 못하는 썩은 목재이다. 하염없이 꺾이고 흔들리면서도 변명과 자기 위안을 일삼는 유약한 지푸라기다. 그런 모습이 부끄러워, 알코올을 끊임없이 들이부어대는 미련한 불쏘시개다.

 다시 말한다. 나는 靑春을 동경한다. 청소년에서 少 자를 떼었다고 누구나 청년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이의 앞자리가 두 배가 되었다고 그만큼 성장한 것이 아니기에 나는 청춘을 우러러본다. 타고 싶다. 청춘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씨를 피워내고 싶다. 물질이 아닌 에너지를, 존재가 아닌 관념을 피워내고 싶다. 나의 유산은 문화이기를 꿈꾼다.

 나를 건조(健操*) 시킬지어다. 내 안에 흐르는 모든 것을 글에 비울지어다. 껍데기가 바스러지고, 갈라지고 비틀린 심재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렇게 찾아낸 불씨를 가슴에서 피워내 세상을 덥히리라. 오늘 밤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태워 각오와 유사한 그을음을 남긴다. 타닥타닥 스스로를 태우는 소리를 컴퓨터 자판으로나마 흉내 내본다.


*말라서 습기가 없음 의 뜻의 '燥' 대신 굳셀 건(健) 단련할 조(操)를 썼다.




 최근 "불멍"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고 한다. 불 보며 멍 때리기, 장작불을 가만히 보는 행위를 말하는데 요즘 사람들이 힐링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이해는 가는 게 나도 수련회에서, 캠핑장에서, 하다못해 고깃집에서도 숯이 타는 모습을 만나면 그걸 하염없이 쳐다보게 된다. 그러고 나면 뭔가 마음에 보풀처럼 일어났던 잡다한 스트레스가 사그라들 듯이 가라앉기도 했다. 넷플릭스나 유튜브에 10시간짜리 벽난로 촬영 영상이 올라오기도 한다니 이게 꼭 눈 앞에서 온기를 내뿜지 않아도 꽤 효과가 있나 보다.


넷플릭스의 벽난로 영상들. 겨울이 끝나서인지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이 사람들 꽤 불멍에 진심이다.


 우습지만 나는 가끔 이 글을 보면서 불멍을 하고는 한다. 이글이글. 사실 이 글은 스무 살 대학에 갓 입학하고 문학의 뜨락에 처음으로 들고 간 글이었다. 그러니까, 시기적으로는 고드름자전거 심장 소리 사이에 쓴 글이다. 잘 쓴 글도 아니고, 사실 이걸 '시'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기에 이제야 소개하지만 말이다. 여전히 위의 글을 읽으면 뜨거운 열풍이 가슴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날의 고민과 '어쩔 줄 모름'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 생활에 대한 아주 큰 기대와 각오를 품고 고3을 지냈다. '대학에 가서 놀아라'라는 말 때문은 아니었다. 입시기간에도 충분히 잘 놀고는 있었다. 다만 대학에 간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면서 내 20대를 어떻게 가꿔나가야 할지 생각했다. 당시 썼던 글에 지금 봐도 기특한 생각들이 담겨 있다.

 어느 순간 나는 대학을 '직장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 또는 '평생을 따라다니게 될 꼬리표'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을 '12년 교육과정의 최종 성적표'로 여기며 대학의 이름으로 나의 가치를 규정하려 했다. 어느 순간 나는 대학에 대한 로망을 잃은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대학을 들어간다면, 그 대학이 어디에 있는 어떤 대학이든 나는 의미 없는 4년을 보낼 것이다.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열정 없이. 나태하게. 모두가 거치는 길에, 어쩌면 조금 좋은 길에 올라탔다고 자만한 채 곪아가겠지.
 
다시 답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꽤 많이 고민했던 '의미를 찾는 문제'였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등학생의 신분을 놓으면서 달라지는 가장 큰 것은 바로 우리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인이 된다는 것이다. 나의 행동에 완전한 자유를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으로서 존중받는 개인이 된다. 권리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만큼 전과는 달리 나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주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대학생은 동시에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마지막 시기를 갖는다. 경제적, 사회적 부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열정을 찾아 돌진하는 젊음의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이 소중한 4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이후의 인생을 크게 좌우할 것이다. 대학에서 불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고졸로 사회에 뛰어드는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입학한 대학은 낯선 땅 대전에 있는 공과대학이었고, 나는 이 곳에서 나의 열정을 꽃피울 수 있을지 의구심에 빠졌다. 그래도 나름 국내 최정상 과학기술원 KAIST, 공학자로서 성장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지만 나는 나의 정체성부터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공학자'가 되고 싶은 사람인 건가? 애초에 나는 이과가 맞나? 나는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영재학교-과학기술원이라는 이공계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다. 물론 수학과 과학 공부를 하는 것이 적성에 맞았다. 수재들만 모아놓은 곳에서도 평균 이상은 했으니, 나는 제법 잘한다고도 감히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삶을 오롯이 쏟아부을 가치가 있는 일인가? 나는 진정으로 그것을 하고 싶은가? 물론 잘하는 것을 열심히 하면 내 삶 하나 잘 영위하는 것이야 문제없겠지만, 그렇게 사는 삶에는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사실 굉장히 배부른 고민이기는 하다. 지금 사회가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사회도 아니고, 또 어떤 형태의 삶이든 제각기 나름의 의미를 갖지 않겠는가. 그러나 철없는 젊음은 '내가 무슨 일을 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주었고,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놓는 것은 삶이라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으로서의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능력과 환경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무엇인지 찾고, 그 일을 하며 세상 속에서 나의 역할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전 공대에서 나는 그 답을 금방 찾지 못했다. 더욱이 이런 고민을 함께 공유할 친구를 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내 주위의 친구들은, 절대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충실한 엘리트였다. 성공의 길을 걸어온 친구들은 그대로 앞으로 펼쳐진 성공의 길을 다만 열심히 걸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낙오되지 않으려 애쓰는 데 바빴다. 좋은 대학을 나와, 어쩌면 대학원에서 남들은 따고 싶어도 딸 수 없는 학위를 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남들 이상의 연봉을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존중했다. 그것이 나에게도 주어진 능력과 환경을 활용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길이었다. 결과적으로도 나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고 말이다. 다만, 그때 잠재력(?)을 최대한 확인해보고 싶었던 나의 방황에 함께 끓어오르며 호응해주는 친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다. 마음속에서는 계속 젊음을 불태우라는 외침이 나를 떠미는데, 그 방향도 모르고 용기도 없었기 때문에. 그 외침이 잠잠해질 때까지 외면하다가, 남들 걷는 길을 따라 겉보기에는 충분히 성공한 삶을 살면 되는 걸까? 그렇게 될까봐 너무 두려웠다. 차라리 산화해버리고 싶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휴, 그냥 가만히 가던 길만 쭉 갔으면 성공했을 텐데'라는 말을 나중에 들을 지라도, 나는 나의 운명을 따라보고 싶었다. 발에 차이는 연탄재가 되어도 좋으니,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고 싶었다.

 그때의 고민이었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노려보다,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눈물이 주륵 나왔던 날 밤새워 썼던 글이다. 글 속에서는 내가 젖은 장작이라며 불붙지 못해 괴로워했지만, 돌이켜보니 저 때가 내 습한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간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2021년, 5년이 지났다. 서랍 속에 두었던 이 글을 올리려던 차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 별안 계기도 없이 집어든 책이었으나, 독서란 습관을 잃고 오랜만에 읽는데도 정말 잘 읽혀서 놀랐다. 내가 고민했던 것, 내 안에 지금도 있는 도덕과 욕망의 대립을 이토록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는 작가가 있다는 게 진심으로 기뻤다. 무엇보다 이 책을 '타고 싶다'고 고민하던 스무 살의 내가 읽었으면 참 많은 위로를 받았겠다 싶더라... 머릿말의 첫 문장부터가 위의 내 글 주제를 꿰뚫고 있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이 문장은 본문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그 앞 문단은 거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이 사람이 대신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거든.


 이듬해 봄에 나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채였다. 입술 위에는 코밑수염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고, 다 큰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전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아무런 목표가 없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즉 내 내면의 소리, 그 꿈의 영상만은 확실했다. 내 임무는 그것이 인도하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수월한 임무가 아니어서, 나는 날마다 버티며 반항했다. 내가 혹시 미친 게 아닐까? 내가 혹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걸까? 나는 걸핏하면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나도 뭐든지 해낼 수 있었다. 조금만 열심히 노력하면 플라톤을 읽을 수 있었고, 삼각법 문제도 풀 수 있었으며, 화학 분석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내면에 어두컴컴하게 숨겨진 목표를 끌어내어 내 앞 어딘가에 그려 보는 일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교수나 판사, 의사나 예술가가 되려고 했으며,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오랜 시일이 필요한지, 어떤 이점이 있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나도 몇 년에 걸쳐 찾고 또 찾아야 하겠지만, 무엇도 되지 못할 수도 있고, 어떤 목표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혹시 나도 어떤 목표를 달성할지도 모르지만, 사악하고 위험하며 끔찍한 결과로 드러날 수도 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나는 <데미안>의 화자, 에밀 싱클레어에 깊이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인생을 한번 제대로 살아보고, 내가 가진 것을 세상에 주고, 세상과 관계를 맺고 싸움을 벌이기를 열렬히 갈망했다"는 싱클레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사람이 소설 끝에 얻을 결론이, 그의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고백하자면 사실 후반으로 갈수록 싱클레어가 그리는 '아브락사스'의 모습,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형상과 에바 부인으로 실체를 갖는 그의 열망 그 자체에는 나는 공감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다만 자기 자신을 그토록 파고들며 그 내면에서 움트는 이미지를 분명하게 표현한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내면에서 내가 갈망하는 이미지, 그것은 싱클레어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열망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래서 '내 안의 열정은 어떤 것을 향하는가' 에 대해 막연하게 '그것을 따를 수 있을까? 그것을 행할 능력과 용기가 내게는 있는가'라는 고민의 시간은 이제 끝난 것같다. 그 모습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그리는 것부터 시작을 해야할 것 같다. 내가 피워낼 불꽃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의 집에서 벽난로 불을 바라보다 그 내면의 이미지를 엿보고는 한 차례의 각성을 한다. 그래, 불멍이 시간 낭비는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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