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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Apr 08. 2021

가슴도치

가슴도치의 가시는 안을 향합니다.

가슴도치

                                    인용구

여기, 한 가슴도치가 있습니다.

가슴도치의 가시는 안을 향합니다.
가시는 이별을 거듭할수록 많아집니다.


가슴도치는 사랑을 원합니다.
그러나 가슴도치는 늘 사랑 때문에 울었습니다.
가슴이 맞닿으면 가시가 심장을 누르는 까닭입니다.


가슴도치는 서로를 죽입니다.
가슴도치는 스스로 죽습니다.

어느 날 나는 말했습니다.
"우리 사랑 변치 말자"
가슴도치가 웁니다.
울면서 가슴도 칩니다.
"우리 변할 사랑 말자"
가슴도치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시가 돋았습니다.


슬픔은 아픔이지만
아픔이 꼭 슬픔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아픔보다 슬픔이 무섭습니다


 고슴도치 딜레마를 아마 철학과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우리 인용구 구독자 님들은 한 번쯤은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한다. 고슴도치 딜레마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우화로 제안하고 프로이트가 채택한 인간관계의 본성에 대한 딜레마를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서로의 온기를 위해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모여있었다. 하지만 고슴도치들이 모일수록 그들의 바늘이 서로를 찌르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추위는 고슴도치들을 다시 모이게끔 하였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수의 모임과 헤어짐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다른 고슴도치와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 사회의 필요로 인하여 인간이라는 고슴도치들이 모이게 되었지만, 그들은 인간의 가시투성이의 본성으로 서로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예의를 발견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의 거리를 지키기 위해 거칠게 말해지곤 하였다. 이 방법을 통해 서로의 온기는 적당히 만족되었으며, 또한 인간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릴 일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남을 찌를 수도, 자신을 찌를 수도 없었던 사람은 자신만의 온기로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 번역 출처: 위키피디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정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사회적 거리두기가 허락하는 2m? 입 냄새가 닿지 않는 거리 35cm? 그 사람과의 심리적 거리만큼 물리적 거리도 허용이 될 것이다. 연인과는 하루 종일 가슴 포갤 수 있는 거리에서 서로를 끌어안고만 있고 싶다. 그런데 또 하루 종일 그러고 있으면 많이 덥겠지... 한 20분까지는 좋을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인간이다. 그렇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결코 0이 될 수 없다. 나와 당신이 우리가 되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안에서 나를 잃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아주 모순적인 존재들은 아닐 것이다. 자연에서도 어떤 두 원자가 하나의 분자를 이루는 데에 적절한 결합 길이가 존재하지 않는가. 아무리 서로를 사랑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핵'이 있고 그 '핵'은 불가침의 영역이 필요하다.

원자는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핵 간 반발력이 작용하며 서로를 밀어낸다.

 그런데 연애를 많이 해보지 않았던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부정하고 싶어 했다. 나는 '밀당'이라는 컨셉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왜 밀어내지? 그 사람을 한없이 나에게 밀착시키고 싶어 했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 했고, 또 변치 않는 사랑을 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야말로 순수한 사랑 아닐까 생각했다. 그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를 억누르고, 또 잘라내고. 아파하는 나를 발견한 뒤에도 이런 게 사랑이려니 지독한 오해를 이어갔다.

 그런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불편했던 것 같다. 전 애인은 가끔씩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 아마 본심은 나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했던 거였겠지만, 나는 그에 어울려주지도 못했다. '나는 너를 계속 좋아하겠지만 네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연애를 내 마음대로 이어갈 수는 없지'라며,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그렇게 관계를 흔드는 말은 하지 말아 줘,' 라며 그 사람에게 사과를 받아내는 사람이었다. 화도 내지 않고, 유치한 질투나 오글거리는 애정 표현 하나 없이, 나는 그게 성숙한 연애인 줄로만 알고 그 사람을 답답하게 했다.

 그래서 헤어졌다. 이별 후에 그 사람이 남긴 자리를 보며, 폐허 속에서 나는 꽤 오랫동안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미숙한 것은 나였기 때문에, 그 사람을 원망하지도 못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사실 내가 나를 너무 오랫동안 속이고 있었다. 나는 무조건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그 컨셉을 변치 않는 마음처럼 평생을 숨길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혼자만의 시간을 절대적으로 필요하는 사람이었고, 고백하자면 나의 전부를 줄 수 있을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도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사랑한다고, 나만을 사랑하겠다고 연애의 결속을 맺기로 한 당신이 고마워서 나는 받는 만큼의 사랑도 주지 못한 채 납작 엎드리고만 있었다. 내게 남은 그 사람의 흔적보다, 내가 축낸 그 사람 마음의 저수지 빈터가 더 황량할 것이다. 연애할 자격도 없는 놈이다 나는.


 이것 봐, 글이 아주 한없이 가라앉는다. 방금 여러분은 용구와의 연애를 잠시 맛본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죠? 무튼, 위의 시는 그 철없던 시절에 썼던 글이다. 아주 그냥 이불킥 제대로다. 고슴도치 딜레마를 처음 들었을 때, '나를 아프게 하는 건 당신이 맞나?'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누군가가 너무 많이 가까워지면 그 사람의 '다름'이 미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는 그 사람의 다름을 맞춰주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미웠던 것이다. 또 그냥 내가 너무 못나서, 이따금 치밀어 오르는 열등감이나 유치한 심술이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 같다. 나는 서투른 사람이다, 나는 마냥 선한 사람도 아니고 가끔 쓰레기처럼 군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치부를 드러내고 도리어 성을 내며 가까운 사람들을 밀어냈다. 안을 향하는 나의 가시로 나는 당신들을 찔러댔다. 그래서 가슴도치를 만들었다. 좀 귀엽지 않아요? 가슴에 뭔가 돋친 거 같은 느낌. 되게 귀여우면서도 슬픈 게 고슴도치랑 아 다르고 오 다른 느낌을 준다.

 연애를 하면 나의 못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 모습이 나를 찌르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연애가 끝이 난다. 그러면 나는 더 못난이가 된다. 못난이는 다음 연애에서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상처 받는다. 다시 연애가 끝이 난다. 이런 반복되는 딜레마를 담아보았다. 개인적으로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부분은 4연인데,

"우리 사랑 변치 말자" <-> "우리 변할 사랑 말자" / 가슴도치가 웁니다. <-> 울면서 가슴도 칩니다. (가슴도치입니다.) 어순의 변화를 주는 '도치법'으로 사실은 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또 언젠가 역할만 바뀐 채, 가시의 방향만 바뀐 채 이런 대화를 반복해왔음을 대칭에 두고 표현해보았다. 어느 날 나는 말했습니다. <-> 가슴도치가 말했습니다. 역시 다르지만 대칭 관계에 있다는 것...으로 설명을 후략한다. (역시 구구절절 시 풀이하는 거는 참 모양 빠지고 말도 잘 안 나온다.)


 끝으로 페이스북에서 지나가다 본 만화, "붉은 선인장 이야기"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어린아이의 그림일기 같은 귀여운 그림체에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 한 번 보고 기억에 오래 남아 나중에도 몇 번 찾아보게 되더라. 스포일러지만 저 붉은 선인장의 가시도 안을 향하는데, 관계에서 상처 받기를 반복하면서 불신과 비관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는 것을 권한다.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출처는 DC갤이었는데 (읔) 그러니 만화까지만 보고 댓글이나 다른 게시글은 보지 않는 것이 정신에 더 이로울 것이다.


붉은 선인장 만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cartoon&no=279330


결합 길이에 대해 더 궁금하다면 여기도 들어가 보시기를.

결합 길이 그림 출처: https://stachemi.tistory.com/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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