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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Feb 20. 2021

자전거 심장 소리

잘, 잘 가고 있다고

자전거 심장 소리

                                            인용구

[사진 출처] Pixabay, from Pexels

달려야 한다

밟아야 한다

추면 넘어질 거야

허리 푹 숙이고 쉬지 말고

려야 한다 밟아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셀 수 없이 늘어선 가로등을 지나치며

나는 똑같은 풍경 속에 갇힌 듯했다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 같은 착각이

얼굴로 느껴지는 지금의 속도가

무서워져서 다리가 무거워져서

나는 그만 페달질을 멈추었다


잘잘잘 체인에서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조금 쉬어도 멈추지 않는다고

잘, 잘 가고 있다고

말 없는 응원에 흘렀다, 뜨거움


어떻게 눈물은 체온보다 뜨거운가

턱에서 마르는 눈물이 가슴까지 적시는가

녹아내린 가슴에 노을이 번진다




    개강한 지 3일 만에 숙취로 오전 수업을 전부 놓쳤다. 아빠의 부재중 전화 두 통을 보고 내가 참 한심해졌다. 씻지도 않고 식당으로 가서 라면을 시켜 먹었다. 떡진 머리와 슬리퍼를 장착한 채, 예쁘게 꾸민 새내기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나도 새내기인데'라는 생각을 애써 지웠다.


    벌써 힘들었다. 새 학기, 너무 많은 인간관계가 한꺼번에 시작되었다. 아싸인 척을 숨기고 애써 활발하게 사람들을 마주하며 술자리를 빠지지 않고 나갔다. 나는 술을 입에 대본 적 없는 어릴 때부터 제발 내가 술을 잘 먹는 사람이기를 바랐었다.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N차까지 가자고 할 때, 기꺼이 응해주며 그들의 깊은 진심을 듣고 잊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달까. 새터반의 총무를 자처한 이유도 그거였다. 술자리를 끝까지 지키며 맨정신으로 술값을 계산하고 사람을 챙기는 것을 통해서,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이 사람들에게 나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걸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이 서툰 풋내기들은 술을 그냥 미친놈처럼 비워댈 뿐이었다. 진지한 대화, 마음을 터놓고 서로를 알아가는 자리를 원했으나 의미 없는 술 게임과 객기만 가득한 주량 내기를 반복하며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몸이 아팠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이*도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하듯, 온갖 나쁜 생각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있지도 않은 장기를 준비해 동아리 면접을 보고,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보는 선배들(나를 술로 죽이겠다는 각오를 내비치는...)과 웃으며 술을 먹다가. 번아웃이 왔다. 스트레스에 민감한 편도 아니고,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하는 줄도 몰랐을 때라 그때는 그게 번아웃인지도 몰랐었지만. 그냥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때려치울까... 어른이 되면 진짜 친구 만들기는 어렵다더니, 나 벌써 어른 된 거야? 이런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 명제 'p -> q'의 이는 '~p -> ~q'다.


    그날은 해동검도 동아리를 등록하는 날이었다. 사실 운동 동아리를 하는 것은 계획에 없었는데, 새터반 선배의 영업에 당해버린 것이다. 운동 시간을 맞춰 체육관을 찾았더니 사람들이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입회원서를 쓰고, "오늘부터 운동 시작하실래요?"라고 발랄하게 묻는 회장 선배의 질문에 나는 '아, 선택권이 있는 거였어요?' 하고 당황했다. 당연히 당장 운동 시작해야 하는 줄 알고 온 것이긴 한데, 정말 억지로 아픈 몸 끌고 온 거였거든. 선배의 어깨 너머로 딱 봐도 오늘 등록한, 같은 새내기 회원들이 띠를 묶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다음 주부터 나오겠다고 얼버무렸다.


    그대로 나와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자전거를 샀다.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 대전은 주로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넓은 캠퍼스 안을 이동하기에는 자전거가 편했다.) 갑자기 생긴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했다. 그대로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울까 생각을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생각나는 목적지가 없었다. 목적이 없었다. 어디라도 좋으니, 여기서 멀리 나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학교 앞에 흐르는 갑천으로 나와, 방향을 정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식당에서 몰래 본 잔뜩 꾸민 새내기들, 새터반의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유쾌한 친구들, 방금 본 해동검도회 신입 동기들까지 모두가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나만 벌써 슬럼프 같은 게 온 거지, 걔들이랑 친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분명 나는 아파트와 상가들이 솟아있는 도시를 지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가 온통 갈대밭이었다. 아스팔트 바닥이었던 자전거 도로는 어느새 끝나고 나무판자로 된 길이 펼쳐졌다. 자전거로 달리니 기차 비슷한 소리가 덜컹덜컹 났다. 얼마나 멀리 온 것인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불안하다기보다는 오랜만에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경이 퍽 좋았다. 길 위에 다른 사람은 하나도 없고 구수한 갈대 냄새만 가득했다.

[사진 출처] Pixabay, from yeonhee lee

    기분 전환이 되더라. 평화로워졌다. 갈대 하나를 꺾어 까딱까딱 흔들자 녀석이 살살 웃었다. 뭔가 '갈 데' 없었는데. 찾아왔네, 갈대. 이런 말장난을 생각하니까 피식 웃음도 났다. 앞으로 가끔 너무 힘들 때면 자전거를 타고 이곳을 찾아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에게도 "갈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벌써 친구 하나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렇게 힘을 얻고 오니 또 괜찮아지더라. 어느 정도 사람들에 익숙해지니까 나도 조금 긴장을 풀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학기만 볼 사람들, 어쩌면 정말 오래 보게 될 것 같은 사람들이 파악이 되니까. 적당히 힘을 풀고 나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검도 동아리도 그날 괜히 나만 첫날을 놓친 것 같아 잠시 걱정을 했었는데, 아무 상관없었다. 의외로 학부 내내 열심히는 아니어도 꾸준히 했다. 잘 지냈다. 잘 못 지낼 때도 가끔 있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무렵에 썼던 글이다. 생각보다 '관성'이라는 것은 정말 강하다. 페달질을 멈추어도 자전거는 바로 멈추지 않는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 잠시 주저앉는다고 바로 나락으로 떨어뜨릴 정도로 세상은 무심하지 않다. 가끔 잘 살아온 사람이 안녕하기를 실패할 때가 있다. 그 시간을 잘 버틸 수 있는 까닭은 그전에 쌓아둔 것들이 어디 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나는 게으름도 부려보고, 어리광도 피우며 적당히 한심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나를 믿고 기다려준 당신들 덕분에 잘, 잘 가고 있다고.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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