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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Oct 07. 2022

선행 자랑 좀 하겠습니다.

뭐 중학생 때 미적분까지 진도 뺐다 이런 거 아님


1. 중학생에게 삥 뜯긴 썰



    작년 9월의 일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이 와서 내 신분증 사진을 받았다. 엄지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가린 사진이었는데, 그래도 얼굴과 생년월일 역시 엄연한 개인 정보이기에 이를 낯선 이에게 받게 돼서 깜짝 놀랐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철없던 19살 때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자마자 신이 나서 SNS에 사진을 올렸던 기억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페이스북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 보니 아직도 그 사진이 있었다. 혹시 몰라 캡처해놓고 후다닥 지워버렸다. (개인 정보 노출 주의!!)

    그저 "당신의 개인 정보! 제가 지켜드렸습니다. ^^" 같은 선의의 연락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그 사람이 내게 연락을 한 이유는 나를 사칭한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테런 안 하시죠?"
"테.. 뭐요?"
"테일즈 러너요." 

나는 스타크래프트 종족 테란을 얘기하는 줄 알았다. 언뜻 테일즈 러너라는 게임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이 났지만, 나는 카트라이더 세대였기도 하고 사실 잘 몰랐다. 연락을 준 사람은 대뜸 통화가 되냐고 묻더니, (문자로 하자고 했다.)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테일즈 러너라는 게임의 유저 커뮤니티에서 아이템을 구매하기로 했는데, 판매자가 자신이 성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내 명의를 썼다는 것이었다. 3만 원인가를 입금했는데 판매자가 그대로 돈을 들고 날랐다고. 그래서 내 이름을 페이스북에 검색해 사람을 찾아보니, 사기범은 아닌 것 같고 (학벌이 좋아보였대 ㅋㅋ 공부 열심히 하길 잘했다;;) 나도 피해자인 것 같아서 연락을 줬다고 했다.

    당시에는 나도 상황을 조금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이, 우선 내게 이 사람에 대한 배상 책임이 있나? 그치만 나도 피해자인데? 라는 생각과, 내 신분증 사진이 나쁜 사람 손에 들어갔다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서 인터넷에 비슷한 피해 사례를 검색하던 중에, 내게 연락을 준 사기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를 또 모셔왔다(?!). 알고 보니 이 커뮤니티에서 비슷한 '먹튀'충들이 제법 있어서, 피해자 오픈 카톡방 같은 게 있다 하더라고. 피해자 2는 다른 신분증 사진을 받았는데, 입금 계좌가 같아서 어떻게 닿게 됐다고. 다행히 그 사람은 판매자의 연락처까지 받았다고 해서, 나도 내 명의 도용범의 목덜미를 잡을 수 있었다.

    3만 원을 뜯겼던 피해자는 돈을 돌려받았고, 그러면서 본인은 큰 피해가 없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으니 따끔하게 일러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가해자랑 통화한 얘기를 조금 하길래 들어보니 대충 그 도용범이 중학생이었던 것 같더라고. 이때부터는 살짝 나도 재밌어졌는데, '테일즈 러너 하는 중학생, 사기 규모 3만 원' 이게 너무 그냥 잼민이 같아서 뭔가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갔다. 그래도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이럴 때 어른의 단호한 모습을 보여줘야지. 엄하고 젠틀한 "이놈 아저씨" 놀이할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연구실 밖으로 나가, 용구 사칭범에게 전화를 걸자 정말로 "잼민이 그 자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아... ㅋㅋㅋ 앞선 피해자에게도 꽤 크게 혼났는지, 잔뜩 주눅 들어서 말까지 더듬으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이 녀석에게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었다. 그래도 목소리 아주 낮게 깔고 "학생, 이름이 뭐예요. 엄마는 이 일 알아요? 이거 진짜 큰 범죄예요."로 시작해서 화를 꾹 참고 있는 어른처럼 단단히 일러줬다. 사진은 지우고, 자필 반성문을 문자로 보내라고 했다. 얘는 선처해준 것이 그렇게 고마웠는지, 연거푸 감사합니다 외치면서 전화를 끊었는데 얘는 진짜 저쪽에서 그랜절을 박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생각보다 정말 순수하고 철없는 친구 같았다. 아, 이건 약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데 얘 이름만 공개할게요. 이 녀석 이름도 태민이다 ㅋㅋㅋ 아 ㅋㅋㅋ 탴ㅋ민ㅋㅋㅋ 어떻게 이름까지 잼민이 같냐 ㅋㅋㅋ. 한 15분 후에 반성문이 왔는데 그게 또 가관이었다.

아이고 태민아 ㅋㅋㅋ

    삐뚤빼뚤 글씨에 맞춤법도 엉망인 게 너무... 너무 귀여운 것이었다. 와중에 꿈은 의사래 ㅠㅠㅠ 분명 내가 얘한테 화를 내도 모자란 상황인데 진짜 귀여워 죽겠는 거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보니 호구 짓을 해버렸다.(?)

중학생한테 삥 뜯김

    뭔가 이렇게 혼만 나고 끝나면 이 친구한테 이 사건이 너무 나쁘게만 기억에 남을까 해서. 아냐, 좀 더 정확하게는. 잼민이 기억력으로는 죄책감도 며칠 안 갈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사건에 조금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주변 친구들은 호구냐고, 괜히 좋은 추억(?) 만들어 주면 또 그러지 않겠냐고 핀잔을 줬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원래 추억이 기억보다 오래 남는 법이고,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받는 선의는, 특히나 어린 사람에게는 좋은 방향으로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거창하게는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쥐어주던 목사님의 마음으로, 사실은 나도 태민이 덕분에 잠시 즐거웠으니 언젠가 받게 될 "병원 풀코스 (? 나쁜 거 아님?)"을 기대하며, 재밌는 인연 값으로 만원 낸 셈으로 쳤다. 태민이가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지는 모르겠지만, 태민이 손에 쥐어준 만원은 그날 쓴 돈 중에 제일 안 아까웠다.

    그다음 날인가 태민이네 어머님한테 전화가 왔는데, 이 친구한테 돈을 보내준 것이 사실이냐며, 돌려드리지 않아도 되냐고 내게 물었다. 속으로 '아이고 태민이 오늘 종아리 좀 맞겠네' 생각은 했지만, 괜찮으니 애 너무 많이 혼내진 마시라고, 대신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주의 주시라고 되게 어른스럽게 잘 대답했다. 통화 끝나고 '나 좀 방금 어른 같았다' 생각한 내가 너무 웃겨. 근데 솔직히? 내가 태민이 부모님이었으면 만원보다 비싼 기프티콘 하나 보냈다. bbq 황금올리브 뭐 이런 거... ㄲㅂ



2. 좋은 일을 했는데 기분이 안 좋았던 오늘


    뜬금없이 1년 전의 일을 들고 와서 좀 자랑하려니까 부끄럽다. 개인정보 간수 못해서 도용 사기에 이용당한 게?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가슴 훈훈한 일화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당시에는 관련 썰을 주변 친구들한테만 풀고 어디에 올리지는 못했던 게, 내 척박한 삶에 보기 드문 선행이었으므로, 그것이 모처럼 호의가 아닌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으므로. 그걸 어디에 올리면 약간 과시용 선행, 또는 위선처럼 변색될까봐 그랬다. 아무렴 어때,라고 생각하다가도 역시. 이런 자랑 할 때는 떳떳하지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런 글을 올리는 이유는,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날이어서 그랬다. 어제는 7시쯤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가 밤 10시에 다시 출근을 했다. 중요한 학회인 CVPR이 한 달 남짓을 남겨두고 있는데, 아직도 그렇다 할 결과를 뽑지 못했다. 몇 차례 아이디어를 갈아엎고, 같이 연구하는 석사 후배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공동 1 저자 논문을 내(도 되겠냐고 후배한테 허락 받음)-기로 했던 것이 일주일 전. 생각한 아이디어를 적용시켜 성능을 보려고 하는데 구현부터가 쉽지 않았다. 실험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므로, 오늘은 밤을 새워서라도 구현을 마쳐놓을 각오였다. 그런데 또 코드를 짜면서 한참 짱구를 굴리다 보면 아이디어에 빈틈이 보였다. 어떻게든 되겠다- 이건 이렇게 고치면 되겠다- 땜빵을 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눈을 몇 번 질끈 감았는데... 그래도 이것까지 엎어지면 올해도 말짱 꽝이라...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앉아있기만 해도 신음이 나왔다. 오늘도 한참 진도를 나가기는 했는데, 중요한 손실 함수가 발산해버리는 문제를 아직도 못 고쳤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밤새면 다음날 그냥 망가진다. 그래서 새벽 5시까지 좀 하다가, 유성온천 역 근처에 둔 자전거 찾으러 산책 나가는 김에 태평소 국밥 먹고 돌아와야지 - 또 마스터플랜을 세웠다가 (자전거는 엊그제 근처 갔다가 비 와서 두고 옴) - 국밥을 먹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연구실로 못 돌아오고 기숙사로 돌아와 점심까지 자버렸다. 오후에도 한참 일을 하던 중, 저녁에 멘토링 약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멘?토링? 나까짓 게 누구를 멘토링 한다는 것이 웃기지만, 고등학교 은사님 (하늘꿈 선생님)의 부탁으로 중학생 친구들의 연락처를 받아 가끔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이것저것 알려주고 있다. 올해 초에는 영재고 입시를 앞둔 친구의 물리 질문을 받아줬는데, 오늘은 정보과학 프로젝트 관련해서 이것저것 자문을 구한다는 친구의 상담을 해줬다.

    다시 말하지만 나까짓  누구를 멘토링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7년이 넘어가는 나를 기억해주시고 추천해주셨으니, 나는  마음에 응하려고 최선을 다할 뿐이니까 놀리지 마라. 다행히 중학생 수준의 내용은 그래도 어떻게 커버가 돼서 애들 만족도는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친구들의 어머님들이  고마워하신다. 가정환경이 어려운 친구들을 선생님께서 각별히 생각하시고 인연을 이어주신 것이어서, 똑똑한 자녀를 둔 어머님들의 무거운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것도 하나의 역할이 된다. 애들은 확실히 머리도 좋아서,  작은 도움에도 크게 성장하는  느껴멘토링 하는 보람이 있다.  선생님과 어머님들이  친구들을 아끼는 마음도 내게 깊이 전해져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보수를 받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가끔 어머님들께서 기프티콘을 보내주신다. 이러면 시급 받는 느낌이라 싫다고, 부담스러워서 안된다고 점잔 빼기는 하지만, 아이들 시험기간에 bbq 황금올리브 하나 소매 넣기 할 때 부담이 없어서 주신 것은 감사히 받아서 쓰고도 있다. 사실 멘토링 끝나고 어머님께 잘 마쳤다고 연락드리면, 시간 내줘서 고맙다고 답장 오는 거 그거 하나만 해도 너무 보람이다. 나 교사 자격증도 없는데 선생님 소리 들음. 이래도 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은 이 친구를 봐주기 직전까지도 연구 쪽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정말 많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8시에 화상으로 만나기로 했는데, 7시 55분까지도 힐끔힐끔 시계만 보며 코드를 노려보다가 겨우 늦지 않고 접속했다. 다행히 친구한테는 어떤 짜증도 드러내지 않고 한참 얘기를 들어주고 관심 갖고 잘 마쳤는데... 시계를 보니 100분이 지나있었다. 하하. 아, 근데 솔직히 진짜 힐링이 됐다. 너무 똘똘하고 기특해. 물론 군데군데 참 엉성한 데도 많지만 그 나이의 나와 비교하면 정말 대단한 수준의 성취를 이뤄냈더라. 사실 오늘은 크게 도움이 될만한 말은 많이 못 해줬고, 그래도 이 친구가 진행한 프로젝트들 하나하나 관심 갖고 꼼꼼히 보면서 감탄해줬다. 카이스트 전산학부 입학하는 게 꿈이라는 친구에게 너무 잘하고 있다고, 오면 이런 것들을 하게 되는데 그게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거랑 너무 닮아있지 않냐고. 이것저것 알려주면서 응원도 많이 해줬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뭔가 엄청나게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정말 보람차고 뿌듯했는데, 동시에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라는 현타?가 찾아왔다. 100분 동안 즐겁게 정신없이 떠들고 나서, 빈 화면을 쳐다볼 때 몰려오는 어떤 '지친다'는 감각이... 기분 좋은 피곤함이었어야 할 그 감각이, '아 망했네' 같은 미련으로 돌아오며 느껴지는 혼란스러움. 밤을 새워서 더 그랬나? 무튼 그게 너무 싫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오늘 하루 중 이 친구에게 쓴 100분이 제일 귀했다. 그건 내가 한 사람 분의 시간 그 이상을 살아낸 시간이니까. 꼭 멘토링 같이 일방적인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내겐 늘 귀하다. 누군가의 삶에 잠깐 머무른 시간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감각(착각)이, 그냥 내 존재의 이유 같다. 너무 행복해.

    만약 내가 내 삶의 성취를 위해서 내 시간을 오롯이 쓴다면, 그것만으로는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잘 안 되면 속상할 것이고, 잘 된다 해도 나는 이기적으로 열심히 잘 살았으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혼자 성공해서 잘 살아도, 누구와도 상호작용하지 않고 그대로 나 홀로 죽는다면 그것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없었던 삶과 마찬가지다. 물론 내가 느끼는 나의 행복이 중요하지, 근데 혼자 열심히 해서 혼자 뿌듯해하는 건 재미없다고. 나의 행복만을 추구하기에는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너무 길고, 내가 소비하는 세상은 너무 귀하다. 나는 내 삶에 행복을 가져다준 사람들에게 보답해야 한다. 그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면서 나의 시간을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

    애초에 나는 포부가 작은 인간이고, 적당히만 살아도 충분히 행복하다가 조용히 스러질 인간이라서. 나보다 더 귀한 사람, 덜 귀한 사람은 또 어딨겠냐마는, 나보다 더 창창한 사람들, 또 너무 훌륭해서 내 자랑이 되는 이 사람들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쓰임이 되면 그것이 너무 황송하고 뜻깊고 그렇다. 그래서 오늘도 그냥 '오늘은 제법 잘 살았는걸?' 하면 됐다. 아주 멋진 청년에게 내 시간을 건넸다. 그런데 왜, 입에서 쓴맛이 맴도는 걸까.

    처음에는 '이게 다 뭔 소용이냐, 바쁜 와중에 잘하는 짓이다.' 같은 허무함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위에 상기한 이유들이 그것을 반박했다. 절대 내가 그 시간을 그렇게 깎아내릴 위인은 못 된다. ㅇㅇ 바쁜 거 맞는데, ㅇㅇㅇㅇ 잘하는 짓 맞음. 곰곰이 생각해보니 허무함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오늘 그런 소중한 시간을 보내서 너무너무 행복했는데,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는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두려움. 카이스트 전산학부 졸업생? 그게 뭐 대단한 거냐고도 묻겠지마는, 나는 이미 오늘 만난 친구의 꿈을 이룬 사람이다. 하늘꿈 선생님이 나를 이 친구에게 소개해준 것도, 내가 멘토라는 수식어가 붙어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도. 내가 지금껏 잘해왔기 때문에, 베풀 것이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근데 그런 사람이 되려면 일단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내 상태가 "훌륭"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겁이 나는 것이다. 여태껏 잘해온 것 같기는 한데, 앞으로도 잘할 자신이 별로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분명했던 학창 시절과는 달리, 대학원이라는 망망대해 속에서는 너무 많이 방황하고 실패한다. 그 결과물이 초라할까봐, 내 볼품없음이 들통날까봐 두렵다. 그러니, 일단 이기적으로 내 현생부터 챙겨야 하는데!- 라는 조바심이 들었던 것이다. 내 가치를 높여야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해줄 텐데~ 그래야 내가 뿌듯함과 효능감에 빠져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그들을 명목으로 살아낼 텐데~

    지긋지긋하다. 이런 불안함, 마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열등감에서 기인한 강박. 내가 무언가를 잘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누군가에게 더 좋은 동료/선배/아들/etc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런데 목적과 수단을 망각하면, 그저 '내 앞가림부터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 되면 그때는 그저 우월감을 좇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물론 나는 존중받는 것이 좋다. 사람들이 나를 유능하다고 생각하고 의지해줬으면 좋겠다. 근데 그게 잘 안 되니까 불안한 거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음 한 편이 무거운 거다. 그럴 필요는 없다.

    재수 없는 전교 1등보다, 나는 차라리 물어볼 때마다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전교 32등이 되고 싶은 사람이니까. 아냐, 그냥 네가 제일 좋아하는 반 꼴찌도 괜찮으니까. 일단 좋은 사람부터 되자. 귀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고. 바쁘다는 핑계로 하고 싶은 일, 내가 "진짜" 해야 하는 일 미루지 말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고민도 멈추지 말자.

        근데 길게 쓰고 보니까, 사실 이것도 다 변명이긴 해. 내가 만약 논문을 못 쓴다면 그것은 100분의 재능 기부 때문이 아니라, 유튜브 보고 늦게 출근하면서 낭비한 시간 때문이겠지. 누군가에게 바쳤던 소중한 시간을 깎아내리며 탓할 게 아니라, 나 홀로 흘려보내는 시간, 게으름부터 깎아내야 할 것을... 게으르고 무능한데 착한 사람 말고, 착하면서 부지런해서 유능한 사람 하자.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은 그 사람들에게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고, 나의 발전은 나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밀도있게 써서 이뤄내자. 그런 다짐을 하는 하루였다.


P.S. 태민이 얘기로 글을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어그로가 맞고. (명의 도용 사기당한 썰 푼다.) 뒤에 내용이 좀 무거워서 가볍게 시작하고도 싶었고. 오늘은 '용구 착하네 잘하고 있어'라는 말이 '용구 힘내 잘할 수 있어' 보다 더 많이 필요한 날이라서... 마침 오늘 멘토링한 중2 친구를 보니까 태민이 생각도 나서 들고 와 봤다.


P.S.2. 넷플리스 애니메이션 <아케인>에서 되게 멋진 대사 나오더라.

"In the pursuit of great, we failed to do good."
(위대한 일을 행하려 하는 동안, 선함을 행하는 것을 실패하고 말았어.)

영어 문구가 멋있음. 맥락은 살짝 다르지만 뭔가 비슷한 얘기 같아서 기억났다. Good 다음에 Great을 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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