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조금 더 천천히 가도록.
우리 서쪽으로 걷지 않을래?
오늘이 음력으로 3일이거든. 서쪽 하늘에 초승달이 예쁘게 뜰 거야. 그거 아니? 초승달은 사실 초생달인 거. 처음 초(初)에 날 생(生)을 쓴대. 그러니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달이란 뜻이지, 달의 생의 처음. 그러다가 이 생, 저 생이 이승 저승이 된 것처럼 초생달도 초승달이 된 거래.
옛날 사람들은 달이 차고 지는 한 공전 주기를 하나의 생애로 생각을 했나 봐. 나도 우리가 매일 잠드는 게 사실은 정말로 죽었다가, 다음날 눈을 뜨면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 틀린 말은 아니려나,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어제의 나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매일매일이 각별하지. 어제의 기억은 전생의 기억이니 애틋하고, 아침에 눈을 뜨는 건 부활이니 기적 아닐까 싶어.
응. 응. 그치. 맞아.
와, 벌써 해가 지려고 하네. 저기 노을 좀 봐. 어떻게 저런 색을 내지? 진짜 말도 안 되게 예쁘다. 날씨만 좋으면 우리는 저런 광경을 매일 볼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평소에는 일한다 뭐 한다 바쁘다고, 저 장관을 자주 놓치고 사네. 서럽다, 우리네 인생. 아니야, 전생의 기억 따위로 씁쓸해하지 말고 오늘 노을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자. 너 혹시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딧 다 본 적 있어? 우리 저 노을을 완벽했던 하루의 엔딩 크레딧이라 생각하고, 질릴 때까지 한 번 볼까? 노을이 다 질 때까지만 계속 걷자.
...혹시 손 잡아도 돼? 노을 끝나면 놓을게. ㅋㅋㅋ 장난이야. 말장난 어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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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어, 초승달이다. 그거 알지? 초승달은 원래 초저녁에 떠서 금방 지는 거. 너 그럼 그것도 알아? 달도 노을이 있다? 진짜야, 달 지기 직전에 하늘을 보면 살짝 새하얗게 푸르스름한 기운이 돈다니까. 진짠데. 내기하자, 직접 보면 되지.
그럼 우리 저 달이 질 때까지만 계속 손잡고 걸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