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가 말했다. 곧 번역/카피라이팅 팀이 구조조정될 거라고.
"정말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안타깝고 또 미안하지만, 곧 있으면 우리 팀이 사라질 것 같아요. 이렇게 되지 않도록 정말 노력했는데, 손쓸 방법이 없었어요. 적어도 예상할 수 있도록 이야기는 미리 해두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 직속 상사가 말했다. 이것이 그의 탓이 아니라는 점은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 네, 알겠습니다. 미리 예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라고 말하고 다시 하던 일을 마무리 지으러 올 수밖에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전혀 아니었다. 얼마 전 동료 하나가 일을 그만두었다. 계약 종료가 이유였는데, 사실상 회사에서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전부터 동료가 말했다. 회사 내부에서 계속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고. 빨리 직무를 전환해서 옮겨 가야 한다고 그렇게 말을 했다. 그의 말에 나는 100퍼센트 공감하면서도, 어쩌면 시간이 조금 더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본업은 작가. 그리고 번역가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각종 다양한 층위의 번역을 하지만, 그중 나의 가장 안정적인 수익원은 내가 프리랜서로 하프타임을 2년간 유지해 온 외국계 패션회사였다. 각종 명품 브랜드부터 스트리트 브랜드까지, 패션계에서는 알만한 사람들은 안다는 그 기업이다. 매일 쏟아지는 신상품들이 올라올 때면 나는 그 신상품의 상세한 스펙과 브랜드 카피를 번역한다. 아주 까다로운 일은 아니지만, 정확함과 신속함이 중요한 일이었다. 작가로서 창작을 하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이 지루하고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제품들을 기꺼이 지난 2년간 번역해 왔다. 아주 많은 돈을 주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럴 만했고, 그래서 별 불만 없이 일했다. 그렇게 비축한 에너지를 일을 하지 않는 날동안 개인 작업과, 다른 번역 일들, 이를테면 전시 서문이라던가 비평문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근데 카피라이팅 팀이 없어진다는 통보를 받으며, 잘릴 각오를 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한국계 회사도 아니라, 사회 안전망 같은 것도 없어서 잘리는 순간 바로 무일푼이 될 것이었다.
처음 이 회사에 들어가게 된 것은 잠깐이나마 풀타임 회사에 들어갔다가, 작업을 할 시간이 없어서 결국은 뛰쳐나온 이후에였다. 다양한 프리랜서 일로 생계를 이어가다, 아무런 일도 없는 달이 있었다. 약 1달간 지속되었는데, 역류성 식도염이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안정적으로 돈이 들어오면서도, 전처럼 너무 많이 내 시간을 차지하지 않을 그런 일이 필요했다. 무작정 구직 사이트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찾게 된 회사였다. 처음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우리 일은 지루해요. 이력서를 보니 크리에이티브 분야에서 많이 일했던데, 이런 지루한 일도 괜찮겠어요?"
나는 답했다.
"저는 지루한 일을 원합니다. 매번 새로운 일이 아니라 제가 전문성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내 이력서는 디자인, 영상, 번역 등 다양한 직군에 분산되어 있었다. 대학원 시절부터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했고, 그러다 보니 직군 또한 너무 다양했다. 나는 무엇을 데이잡으로 하고 싶은가 보다 어떤 일만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가를 더 정확하게 알았다. 나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데이잡으로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영상 작업은 체력적으로 너무 부쳤고, 그래서 데스크 잡을 원했다. 그리고 여러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글 쓰는 일만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삶의 안정성을 원했다. 내 작가라는 본업이 본디 흔들리는 직업이라, 다른 삶보다 더 불안했기 때문에 안정성을 더 갈구했다. 그래서 나는 전문직을 원했다. 카피라이팅, 번역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내 범주의 전문직이었다. 이런 전문직과 같은 커리어 한 줄이 있다면, 좀 더 안정적인 삶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지루하지만 철저함을 요하는 전문가와 같은 이 일을 원했다. 또한 재택으로 근무가 가능하다는 점 또한 큰 메리트였다. 이런 시간을 아껴서 작업에 더 쓸 수 있을 터였다.
2021년, 나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3년, 나는 지금 잘리게 생겼다.
2년 전 내가 절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친구들이 논문이나 책을 읽기 전에 챗GPT로 쉽게 설명해 달라고 주문하고, 10초도 되지 않아서 줄줄이 요약을 해줄 때 나는 알았어야 했다. 아니, 영어 논문을 AI로 번역해서 읽는 친구들을 볼 때라도 알았어야 한다. 내가 생각했던 전문직이라는 범주가 곧 대체될 것이라는 것을. 동료가 퇴사하기 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어와 일본어와 같은 경우는 구글 번역기를 먼저 돌린 후, 거기서 수정만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한국어 번역은 그렇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머릿속에 번역 매뉴얼이 들어 있었고, 동료와 내가 통일해 놓은 용어집이 있었다. 그 규칙에 따라 철저하게, 회사의 브랜딩에 맞는 어조로 번역을 해 모든 글이 일관되게 만들고, 소위 '있어 보이는' 설명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나는 당연히 다른 언어들 또한 그런 줄 알았다. 그때라도 알았어야 한다. 곧 나는 대체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한국어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다고 착각했다.
그날도 그냥 평소처럼 일하던 날이었다. 오후 즘이었나, 내가 하지 않았던 번역들이 이미 되어 있었다. 다른 직원이 했나 생각했는데, 그 정도의 속도가 아니었다. 한국어뿐만이 아니었다. 중국어, 일본어 또한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업데이트가 되어 있었다. 다만 완벽하진 않아서 조금씩 다시 읽으며 수정을 했다. 하지만 놀라운 수준이었다. 거의 80%는 손댈 것이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나는 곧 완벽하게 대체될 것이구나. 그렇게 시스템에 ai가 도입되고 난 날 오후, 상사에게 곧 구조조정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AI가 번역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게 실제로 일어나고 난 후의 기분은 형용하기 어려웠다. 내가 생각했던 전문직이란 무엇이고,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 주는 무언가는 대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어떻게 내가 AI로 잘리게 되는 첫 번째 직업군일 수 있는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AI가 대체할 직종을 검색해 보면 기술직, 미디어 직종, 법률업 직종, 회계사와 같이 내가 '전문직'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있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다. 가장 안정적이고 대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전문직들이 가장 먼저 대체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던 창작 분야가 AI가 대체할 수 없을 직종으로 꼽힌다. 이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내게 돈을 전혀 벌어다주지 못하는, 크리에이티브 분야가 대 AI 시대에서 살아남을 직업이라니. 이건 기뻐해야 할 일인가? 적어도 지금 당장은 기쁘지 않았다.
이 시리즈는 AI에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현재 진행형의 내 인생에서 어떤 직업으로 갈아탈 것인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때까지 써보려고 한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N잡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를 대체한 AI에 대해서 좀 더 집요하게 파보려고 한다.
대체되지 않을 내 삶의 닻을 찾고 싶다. 어쩌면 크리에이티브 분야에서 수입을 벌어들이기 위한 경쟁을 하지 않고 순수 예술 분야에만 머물고자 했던 선택이 사실은 회피였던 것일까? 왜 미국에서 시집을 낸 나는 내 창의적 글로 먹고살 수 없는가? 쉬지 않고 N잡을 하다 끝끝내 공황이 온 지금, 나는 내 삶을 돌아볼 때이다. 내가 설 곳은 과연 어디인가?
(이 글에서 구체적으로 회사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약간의 각색이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