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 알레르기 반응을 갖고 계시는군요
계절이 바뀌고 추위가 깊어지는 매년 이맘때에는 더욱 심해지는 훌쩍임과 바늘구멍처럼 막힌 콧구멍을 강한 압력으로 일순간 밀어내어 풀어내는 휴지가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일수록 띵한 두통과 관자놀이 근처에서 느껴지는 묘한 어지러움은 비례적으로 높아진다.
수년 전 언젠가 봄꽃이 지천이던 날에 훌쩍임이 생겨 사람이 영 칠뜨기처럼 부족해 보이는 게 싫어 동네 이비인후과를 갔는데 의사양반은 저만치에서 대뜸 '꽃 알레르기네' 하며 알레르기검사를 하자고 한다.
아니 환자가 오면 우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어떤 말이라도 들어 보고 청진기를 엉덩이에라도 대어 보던지 해야지, 진료실 문 열고 들어선 환자에게 '꽃 알레르기네'라고 하는 게 맞나 싶어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꽃가루가 한창 날리는 때이니 꽃 알레르기 환자가 많아서 그랬나 보다 싶다가도 영 왠지 마음이 닫혀 그곳엔 두 번 다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작년 벚꽃이 흐드러진 날 쯤에도 다시 훌쩍이고 맹한 소리를 내는 게 팔뜩이처럼 영 시원찮게 보일 것 같아 동네 다른 이비인후과를 가서 알레르기검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의사에게 먼저 요청했다. 의사도 그러자며 아까운 피를 꽤나 뽑아내었고 검사결과는 1주일 정도 걸린다고 하니 좀 기다리라고 한다. 이제나저제나 목 놓아 기다린 끝에 결과를 받아 보니...
헐... 진짜? 대박일세.
리액션 3종세트가 여기서 나올 줄이야.
사과알레르기 외엔 전혀 문제가 없는 튼튼한 대한남아라고 한다. 아니 그럼 꽃알레르기라고 단번에 호언장담한 그 의사양반은 뭐야? 세상 Stone-Seller인가? 벽엔 자랑스레 대한알레르기의사협회에서 인정하는 의사라고 표창장 같은 게 걸렸던데? 허참. 어이가 없어서...
그나저나 그동안 즐겨 먹던 사과를 못 먹는다는 슬픔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번 생에 가까이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니 꽤나 아쉬워졌고 사과보다 가성비 좋은 과일이 또 있을까 싶어 이미 홀쭉해진 지갑을 괜히 툭툭 쳐보았다.
그렇게 알레르기 결과를 안 후 사과를 멀리했고 그 이유인지 한동안 비염 증상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환절기 때면 감기인지 비염인지 재채기며, 콧물이며, 목 안쪽이 붓는 등 여러 가지로 불편하여 새로 생긴 이비인후과를 찾아갔고, 처음 만나는 의사양반은 "환자분은 코가 비뚤어져서 비염증상이 호전되지 않는 거예요. 수술적 치료로 원인 조치를 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매번 이렇게 약물치료를 할 수밖에 없어요. 약물치료도 일시적인 거라 재발할 겁니다."라고 한다. 그동안 다른 곳에서도 이런 얘기를 몇 번 들었는데 이번에는 귀에 쏙쏙 담기니 이상할 따름이다.
코가 비뚤어진 정도를 확인하자며 CT를 찍자고 했고, 같이 영상을 보니 '흠... 이렇게 좁아진 콧구멍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니 참 고생이 많았다.' 싶었다
비뚤어진 쪽은 좁아졌고, 다른 쪽은 살이 차 올라 메우고 있으니 들숨날숨 때 내 코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 이쯤이면 수술을 권합니다. 수술은 한 시간이면 끝나는 간단한 치료이고 당일 퇴원가능합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이런 수술을 거의 매주하고 있으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키가 작고 체구도 왜소한 젊은 의사양반이 왜 이리도 신뢰가 가는지... 게다가 간호사분들도 마치 백화점의 명품화장품이나 향수 판매원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부드러운 미소와 말투가 지금껏 느꼈던 병원의 고압적이고 무성의한 느낌과는 완전 딴판인 거였다.
"네. 해야겠네요. 그런데 수술은 어떻게 하나요?"
"우선 비뚤어진 코 벽을 바로 세우고, 한쪽의 차오른 살을 절개하는 겁니다."
"많이 아픈가요?"
"전신마취하니 통증은 없을 테고, 수술 후 1주일 뒤에 교정을 위해 삽입한 걸 제거하면 됩니다."
"비용은 얼마나 들까요?"
"2백만 원 넘지 않고 실손보험이 있다면 부담이 크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빠른 날짜로 수술을 잡아주시죠."
"매주 예약된 환자가 있으니 한 달 뒤 가능하네요."
"흠... 알겠습니다. 혹시 중간에 빈자리가 생기면 연락 바랄게요."
수술 당일에 귀한 휴가를 쓰고 병실에 기다리고 있으니 간호사가 먼저 수액을 맞자며 혈관에 대침을 꽂으려 한다. 나는 주사를 무서워하지 않고 뾰족한 바늘이 내 피부를 뚫고 혈관에 창 끝을 들이미는 순간 따끔하는 정도를 직접 눈으로 보며 즐기는 편이다. 신참인 듯한 간호사는 내가 두 눈 벌겋게 뜨고 지켜보는 걸 의식했는지 "주먹을 쥐세요. 펴 보세요. 조금 약하게 쥐어 보세요. 주먹을 비틀어 보세요." 몇 차례 주문을 해대더니 좌표 설정이 완료된 듯 "조금 아픕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팔꿈치 안 쪽에 대침을 푹하고 찔러 넣는다. 성공인가 보다.
지금껏 병원에 쇄골골절 등으로 몇 번 입원을 했지만 1인실은 처음이다. 이게 웬 호강이냐 싶어 주위를 둘러보지만 덩그런 베드와 벽면에 세면대와 거울, 옷장 하나 있는 게 전부이다.
"아버님 이제 수술실에 들어가실게요." 언제부턴가 어디서도 가끔 듣는 호칭이 '아버님'이 되었고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아버님은 아직 아닌 듯싶은데...
수술대에 누우니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무영등이 원샷을 하기 위해 떠 있고 어디서 왔는지 파견 나온 마취의사가 옆에 서서는 역시 대침주사를 쥐고서 "조금 욱신할 겁니다." 하며 마취주사를 찌른다.
'음... 절대 눈을 감지 않고 니들이 실수 없이 잘하는지 지켜볼 테다.' 미처 생각을 다 하지도 못하는 사이 잠들어 버렸다.
아주 오랜만에 푹 잔 것일까? 눈을 떠 보니 아까 있던 1인실에 다시 누워 있고 콧구멍에 뭘 쑤셔 넣었는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산소용 마스크를 입에 대어 숨 쉬기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또다시 꿈나라로 들어갔고 몇 시간 후 깨어보니 간호사가 마냥 친절한 말투로 "많이 불편하시죠. 수술은 잘 되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이내 주치의의 설명을 듣고 1주일 후 내원해서 주입된 걸 제거하면 된다고 하며 그동안 복용할 약과 코 세정제 등을 한 보따리 안겨 준다. 소싯적 부족하게 살아서인지 뭔가 많이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한 주간 말 잘 듣는 학생이 되어 의사가 처방한 순서대로 약 복용과 코 세정을 한 후 다시 찾아갔다.
간호사는 내 머리를 움켜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사이 젊은 의사는 최첨단 내시경과 집게를 양손에 쥐고 요리조리 코를 헤집고 다니며 이것저것을 빼어냈다. 환자도 내시경 화면을 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모니터를 여기저기 매달아 놓아서 나 또한 어떤 게 내 콧구멍을 막고 있었는지 또 그걸 어떻게 떼어내고 빼내는지 볼 수 있었다. '우웩... 아~ 콧구멍이 이리도 지저분했구나. 의사들은 돈 많이 벌어도 되겠다.' 양가적 생각이 미치는 사이에
"음.. 잘 되었네요. 코에 삽입된 지혈제, 실리콘 패드 등을 제거했으니 숨 쉬기가 훨씬 좋아졌을 겁니다. 어떻세요?"
"이야~ 경부고속도로가 따로 없네요. 뻥 뚫린 기분이에요. 하하하"
"네. 이제 처방할 약은 없고 1주일 후에 한 번 더 와서 경과를 보시죠."
"아이고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주머니에 몇 개 가지고 있던 베트남사탕을 간호사에게 건네며 보험회사에 청구할 서류를 부탁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좀 전에 사탕을 받은 간호사가 다가와 "이거 너무 맛있는데 이름이 뭐예요? 어디서 살 수 있어요?" 하며 화색이다. 그 옆에 같이 서 있던 간호사도 연신 맛있다며 이런 걸 어디서 사냐며 빨리 알려달라며 조른다.
쿠팡의 주문내역을 찾아서 알려주니 세상 고맙다며 또 오시란다.
비중격교정술
하비갑개절제술
수술확인서와 진료비세부내역서에 담긴 수술명칭은 이랬다.
보험회사 두 곳에 서류를 신청하니 며칠 걸리지 않아 얼추 수술비용 대부분을 지급받았다.
대형병원을 선택하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동네 작은 병원이지만 실력 있고 친절한 곳을 선택해서 다행이었다.
코는 숨 쉬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입은 먹는 거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비염정복기는 이렇게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