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바라보겠습니다
2000년대 시단은 미래의 것이었다. 이른바 미래파라고 불리는 시인들이 출현했다. 어떤 시인은 이소룡의 "아비요"에서 아버지에 대한 물음을 던졌고. 비둘기의 실험을 통해 "우리는 지루한 꿈을 꾸고 있"음을 알렸고. 또 다른 시인은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는 선언에 가까운 시을 세상에 던졌다. 그들은 이전에 없던 문법을 사용하면서 자아마저 해체했다. 그들은 이전까지의 실험을 믿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이 이른 결과만 믿고 써내려갔다.
그러다 2012년, 마침내 황인찬의 시집이 당도했다. 첫 시집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지면에서 그들은 기다렸다. 다른 방식이었지만 그의 "말린 과일" 또한 "미래의 과일"이다. 이 책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것은 어떤 방식인가. 그의 설명이 이어진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다.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일부러"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구태여 "일부러" 현상을 만들어내거나 가미하지 않는다. 그의 시 구관조 씻기기의 마지막 문장도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이다. 이러한 시어는 그러나 '도취'와는 다른 문법이다. 그저 새로운 관조를 통해 지켜보고 담담하게 대상을 목도할 뿐이다. 그러나 황인찬 시의 매력은 이곳에서 발생하는 여백이다.
이전에 올렸던 "레코더"를 보자. 그는 리코더를 불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시에서 빠져나와서 우리의 세계에서 그의 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는 31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족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받는 시집을 읽으며 문단과 세계의 대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다름 아닌 '김수영'이기 때문이다.
과잉의 시대다. 어떤 것이 과잉이냐 묻는 것보다 무엇이 과잉이 아닌지 묻는 것이 더 해답을 찾기 쉬운 질문이다. 그러나 이 과잉은 무엇인가 공허하다. 그 과잉은 결핍은 내재한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말했다시피 긍정성이 지나치게 과잉될수록 오히려 수동성이 증가한다.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돌아볼 시간이 없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그는 어떤 죄의식을 느낀다. 그것은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