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의 고향과 비애
시집의 해설에서 이야기를 따온다. 1980년대 후반, 진주에서 상경한 허수경 시인은 1990년대에 다시 시집 한 권을 우리에게 남기고 독일로 훌쩍 떠나 버린다. 이런 유목의 과정에서 생긴 상처와 그가 독일에서 공부했던 고고학이란 전공은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공간을 찾아 나아갔다는 점에서다. 이를 바탕으로 묻는다. '고향'은 물리적 공간인가? 그렇다. 모두 다 제각기 그리는 고향이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서귀포', '함흥' 심지어 '서울'이어도. 그러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정지용,「고향」)와 같은 감정과 마주할 때 우리는 무참해진다. 그리던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향은 없었다. 이 시를 보고 가장 처음 느꼈던 감정이다.
"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서 "도심의 가을 공원에 앉아 있"다. 이곳의 저녁에는 "지는 잎들이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 위로"눕는다. 그가 가볍다고 말했던 낙엽 한 장을 우리는 가볍게 스쳐지나지 못한다. 시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소재이기도 하며 그녀의 '얼마나'라는 언지 때문이다. 나무에 대한 낙엽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나는 분명히 저곳에서 떠나왔다. 그러나 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갈지 불분명하다. 명확하게 내가 알고 있는 점은 내가 곧 소멸할 것이라는 운명이다.
이런 낙엽이 느끼고 있을 정서를 '비애'로 단순화해도 될까. 물론 최종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부를 것이다. 그러나 아직 몇 단계를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결론은 조금 미뤄두고 이 정서를 좀 더 파고들어보자. "술병을 들고 앉아 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술에 짙어져"간다. 나는 궁금에 그 옆에 오래 앉아 있는다. 앉아있다 보니 "상처 난 세상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난다. 이 향은 "옆의 남자", "수도원", "병원" 등 각지에서 풍겨온다. 아니, 풍겨오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러한 감정의 층위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온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
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
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보는데
이런 고백 앞에서, 나는 그동안 내가 느꼈던 비애라는 감정을 슬픔 정도로 바꿔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의 세상은 늘 또 다른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상처가 그곳으로부터 기인한 것은 사실이나 결코 그 세상은 우리의 세상을 치유해줄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 세상 앞에 놓인 것은 그 세상이다.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과 나를 회복시켜줄 상대는 상이하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늘 후자의 사람보다는 전자의 사람이 가까우며 고로 당연히 먼저 다가온다. 이 당연한 사실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한다. 그렇게 후자의 세계와는 두 걸음씩 멀어진다.
멀어진 두 걸음을 통해 나는 비애를 관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비애가 희망이 되는 기적 따위는 발생하지 않는다. "몰랐네/ 저기 공원 뒤편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 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으로 비애는 삶의 풍경이 된다. 그곳은 더 이상 슬픔을 표출하는 그림자도 없으며, 더 이상 흘려버릴 울음조차 없다. (앞서 다루었던 시 『여기는 이국의 수도』에서 "울지 마"라는 의미를 다시 떠올려보아도 좋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비애의 '뒤편'에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감정에 대해서 계속 '모른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럴 때면, "몰랐네/ 이 시간에 문득 해가 차가워지고 그의 발만 뜨거워/ 지상에 이렇게 지독한 붉은빛이 내리"곤한다. 세상은 점점 차가워만 가고 그에 비해 나만 홀로 뜨거워진다. 비애와 세상을 딛고 있는 발만 오롯이 뜨거워진다. 그 발로 서서 "지상에 이렇게 지독한 붉은빛이 내리는 것을"본다. 이런 묘사는 단편적인 풍경 묘사나 감상이 아니라 가보고 실제로 느낀 자의 감각이다.
"수도원 너머 병원 너머에 서서"에서 당신은 비애의 감정을 넘어섰을까. 비애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렇게 두 발로 서서 보고 느낀 사실은 비애 너머에는 더 깊은 차원의 비애가 있다는 장면이다. "눈물을 훔치다가 떠나버린 기차표를 찢는/ 외로운 사람"인 당신은 나에게 이를 일깨워준다. 물론, 당신도 안다. 그 기차표를 타고 갔으면 3연의 고백(위의 크게 쓴 부분)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차는 이미 떠났다. 또한 그곳에서도 당신과 나는 다른 형식의 같은 고백을 내뱉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몰라서" 또다시 바라본다.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 자상에 내려놓은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이 문장을 바라보기 위해서 그의 삶을 위에서 간략히 소개했다. '이쯤 되면 알았다고 해줘야 하지 않나. 독자를 어디까지 끌고 가려고 하는 걸까. 어디까지 깊어지셨던 걸까.' 읽는 내내 물었고 결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좋아했던 다른 시에서 나의 잘못은 찾아냈다. "거품이 되어 날아가는 것들의 헛된 아름다움이 너를 구원할 수 있을까/ 비애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다(조용미,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에는』,「검은 담즙」 중에서)
그래서 그는 몰랐다고 거듭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이는 회피가 아닌 포옹이다. 내 인생아느 비애라는 분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이 분을 잘 모른다. 그렇지만 껴안고 가야 한다. 설령 그것이 '생을 가르는 검'일 지라도 말이다. 그런 감정의 층위와 시적 소재를 엮어본다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시」) 를 인용하는 것도 비약이 아닐 것이다. 사실, 이 시를 가져온 이유는 그다음 문장 때문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다. 이것이 "술 취애 잠든 늙은 남자를 남자를 남기고" "가을 공원에서 나오"며 생각했던 감정일 것이다.
허수경 시인을 이야기하면서 허무를 말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동의합니다. 나도 그분들의 평론과 해설을 보며 시를 들여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결론을 내리고도 싶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보며 관찰한 감정보다는 그가 허무 속에서도 들여다본 감정을 적고 싶었습니다. 욕심이 과해서 다른 시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무례한 행동이 아니었기를 다만 바랍니다. 부족한 점이 스스로도 보입니다. 더 많이 읽고 써야겠습니다.
요즘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이전에 적었던 육호수 시인의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에 대한 글을 완결 짓는 것과 이상의 자화상과 오감도를 연결해서 사회적 자아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가진 것에 비해 욕심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려 합니다. 맞다! 이전과 달리 이 매거진에서는 한 시인을 깊게 다뤄보고자 합니다. 단편을 적으니 시인 분께 예의도 아닌 것 같고 얕게 읽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해지려기보다는 깊어지고자 하는 노력으로 적어가겠습니다. 늘 찾아와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