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또 올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을 죽였을까. 매년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하면 우리는 수많은 동물들을 땅에 묻는다. 올해는 뽀롱이도 하늘나라로 갔다. 이에대해 '매뉴얼대로 행동했다'라는 우리의 변명은 차갑다. 차갑게 비어있대.
시인은 아파한다. 오늘도 "이름 없는 섬들" 어디선가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다. 시인은 묻는다.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고개를 쉬이 끄덕이지 말자. 곧바로 후회하게 될 테니 말이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 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살고 있는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이제 폭력의 범위가 넓어진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는 섬뜩하다. "말"은 그 자체로 권력인 동시에 폭력을 담고 있는 행위가 된다. 그렇게 말은 우리와 그들의 다름을 구분 지으며 차별화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된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다른 존재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한다. 과거형을 쓰지 않겠다. 우리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세월"이다.
시인은 아파한다.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또 다른 "신시를 짓는 장군들을"보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롱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나를 바라봤던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아파하는 대상은 폭력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그들을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바라보다가 짓밟히고 파괴되는 대상들이다.
동시에 시인조차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발화를 한다.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시인은 본디 말을 다루는 사람이다. 이미지를 통해 시를 그리듯 전개하거나, 잠언으로 시를 가득 채우거나 그 질료는 상이하더라도 전달 수단은 결국 말이다. 그러나 말은 위에서 다뤘던 바와 같이 동시에 폭력의 수단이다. 우리가 동물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니 사실 그들도 엄밀히 말하면 말을 하며 언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들으려고 했다면 그러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시인은 아파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고 대상과 주체를 번갈아가며 폭력을 유발한다. 가시적은 형태로든 아니면 비가시적으로든.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시인의 씁쓸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자신이 선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위선이 아니었던 사람이 없었고 악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위악이 아니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더욱이 자신의 심장이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심장이 차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신형철 평론가님이 최근에 나온 평론집에 왜 그렇게까지 썼는지도 어렴풋이 알겠다. 원래 감정을 그토록 절제하며 쓰시는 분이 화를 내는 심정을. "젊은 시인·노동자·노점상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보는 게 소망이라고 말하는 착한 시인인데, 이런 시인은 안 아프면 안 되냐고 나는 화를 낸다."라고.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빌어먹을, 차가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