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그러니 울지 마 울지 마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2011) 중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해본다. 세상의 전쟁과 문학 중에서 어떤 것이 먼저 끝이 날까. 분명,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같은 저작을 보면 시작은 전쟁이 먼저였다. 전자의 종식은 당장 내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꿈같이. 그러나 후자의 끝은 끔찍하다. 그런 세상 속에서는 부디 나에게는 내일이 없기를 바란다. '반전'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한다면, 독자 분들께서는 언제적 구호냐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화롭게 우리가 이 글을 쓰고 읽는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이국의 수도"에서)는 전쟁 중이며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쉼 없이 분투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허수경 시인이라는 일상과 동시에 반전을 이야기하는 시인이 있었다. 그것도 "이국의 수도"에서 지내시면서 쉼 없이 우리 사회와 세상에 대해 쓰셨다. 이 과거형의 종결 어구를 우리는 아마 오래 아쉬워할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책날개에 적었던 허수경 시인의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생전에 이국의 수도에서 적었던 편지 한 편을 읽어보자.
이곳에서는 "결혼반지 잃어버린 육십 넘은 동백꽃(상실)"과 "내일 헐려나갈 천 년 넘은 집처럼(파괴)"를 배경으로 어떤 시인은 "십수 년째 거짓말만" 반복하고(거짓) 있으며 그런 시인 위로는 "이런 것도 눈 감는 거라고(외면)" 말하며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건너가는 철새"가 날아간다. 그렇다면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포유류와 조류의 갈림길에서 어류와 갑각류의 갈림길에서 중세와 르네상스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틀린 결정만"을 반복해온 존재이다. 그런 존재에게 허수경 시인은 끊임없이 "울지 마 울지 마"라고 노래를 건넨다.
두 번째 연에서는 계속해서 말이 되지 않는 역설적 상황이 이어진다. "비가 온 지 십 년도 넘어되어"가는 이곳에서는 연인들이 "헤어진 다음에야 결혼"을 한다. 또한 "제사장"은 아들을 위해서 물속으로 들어간 후에 "제 시체가 물에 떠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대추야자나무"가 거꾸로 서 있는 상황은 굳이 성경에서 이 나무가 축복과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로 쓰인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할 지라도 앞선 사제의 이미지와 함께 역설적이고 하강적인 느낌을 준다. 이어서 "아버지의 시체"는 이어서 이야기한다. "내 아들은 무죄, 무죄"라고. 그러나 그 발화는 성공하지 못한다. "물에 떠오를지 아닌ㄹ지 내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사장은 "이국의 수도에서" 언제나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역사』의 저자 헤로도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화로울 때는 자식이 부모를 땅에 묻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부모가 자식을 땅에 묻는다"라고. 그의 말처럼 계속해서 제시되는 역설적 이미지에 비애감마저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 슬퍼해야 할 이유는 단순히 표면으로 드러난 유죄 판결뿐만 아니라 "물속" 이면의 바닥을 모른다는 점이다. 과학적으로 시체는 바닥에 닿고 나서야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체가 물에 떠오를지 아닐지 모른다는 말은 결국 심연(물)의 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제사장은 아들을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고 시체가 되면서까지 아들은 무죄, 무죄라고 이야기한다. 그 배경은 "저 몸을 이 생으로 삼고 있"는 역설적 배경이다.
이와 같은 충격적인 첫 번째 연과 두 번째 연 덕분에 우리는 세 번째 연을 여는 "내가 살아있어 당신이 날 사랑해/당신이 살아 있어 나는 당신을 예뻐해"와 같이 다른 사람들이 썼으면 평이한 문장을 의심하게 된다. 그렇게 의심을 시작했다면 이제 우리는 "잊혀진 문명"으로 향한다. 잊혀진 문명을 보여 달라고 (허수경 시인님은 독일에서 '바빌론'과 같은 고대 문명들을 공부하셨다) 말하는 사람에게 곧바로 이어서 "어머 어머, 이런 망할 것 이런 것이 여기에 있다니 유죄"라는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내려진다.
그렇지만 다시 "울지 마 울지 마"라고 노래한다. 그다음의 두 행은 내가 최근에 본 가정 중에 가장 슬픈 가정법이었다. "오늘 시장에 폭탄이 터지지 않으면/ 내일 이 시자엔 오렌지를 가득 실은 수레가 온다네" 라니.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이 문장이 평범해 보인다면, 우리는 비극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폭탄과 오렌지라는 색채의 유사성 뒤로는 완전히 다른 내일이 펼쳐진다. 만약 오늘 시장에 폭탄이 터진다면 내일은 시장은 누군가의 무덤이 되고 만다. 반면 폭탄이 터지지 않는다면 풍요롭게도 오렌지를 가득 실은 수레가 온다. 전쟁과 폭력의 부재를 가정해야만 일상이 보장될 수 있는 삶은 정상적인가. 이런 가정의 비애를 증폭시키는 것은 오히려 이어지는 "그러니 그러니 울지 마 울지 마"이다.
이제 서서히 "울지 마" 노래 너머로 시인이 보인다. "당신을 버린 내가 성문 앞에 앉아"있고 "내가 버린 당신"은 "성안에서 그 나물에다 법전을 고명으로 식은 국수를" 드시고 있다. 이 문장도 버린 대상은 정작 바깥에 있고 버려진 대상은 안쪽에 있는 상황이다. 동시에 이 둘은 캐낸 나물로서 이어진다. 즉, 시에서 돌림노래처럼 반복된 울지 마 울지 마 처럼 순환되고 반복되는 역설적인 상황인 것이다. 문제는 이다음이다. 우리에게 시에서 끊임없이 "울지 마"라고 이야기해주었던 화자는 시 전체적으로 끊임없이 울어버리고 있었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법한 상황들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에게 "울지 마"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 이미 다 울어버린 사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위로의 윤리다. 이미 누군가 흘릴 눈물까지 다 울어버린 사람만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로할 자격이 있다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위로의 윤리를 다시금 깨우쳐주었다. 희망은 그다음이다. 제사장은 전쟁이 모두 끝난 뒤에 누구도 울지 않을 상황에서야 희망을 기쁘게 노래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또다시 시를 통해서 배운다. 위선적인 위로는 조롱이나 조소 혹은 연민이겠지만 윤리적인 위로의 역설의 반복 끝에는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와 같은 깨달음을 우리에게 남기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는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역"으로 나아갔다.
*제목은 브로콜리 너마저라는 어떻게 들으면 처절하게 들리는 밴드의 노래 제목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에서 차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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