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보영, 책기둥 사이에서 만난 신
이번 주에는 저번 글 중에 약간은 잡문(?) 같은 글로 스포일러를 했던 것처럼 문보영 시인님의 『책 기둥』(문학과 지성사, 2017)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명량함과 깊은 사유가 잘 결합되어 있는 시집이며, 그렇기 때문에 읽는 사람마다 느낌이 많이 다를 수 있지만 한 번 용기를 내보면서 써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있고요.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신도 추위를 느끼는 것일까? 신은 "거대한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다." 그에 반해 "인간은 오리털 파카에 갇힌 무수한 오리털들이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시집을 열면 처음에 있는 시인데 첫 문장부터 당혹스럽다. 신이 입는 옷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무슨 옷을 입고 있을까. 신도 옷을 입고 있을까. 이런 문장에 이은 다음 문장은 독자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한다. "인간은 오리털 파카에 갇힌 무수한 오리털들"이다. 그렇다고 시인은 쓴다. 시인은 그것을 쓰는 사람이다. 그녀는 신에 대해서도 마치 일기의 등장인물 중 한 사람처럼 적어 내려간다. 이런 서술 방식으로 인해서 그의 시집 속에서 신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공통적으로 초월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와 굉장히 흡사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오리털 파카에서 "이따금 오리털이 빠져나오면" 그 털을 무신경하게 뽑을 것이다. 그녀는 성경에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이 빈번한 성경을 보면서 "하느님은 거룩하게 질투하는 존재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욱해서 사람을 잘 죽이니까, 실수로 죽인 인간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일관성이랄 게 없고 이런 횡설수설 때문에 자꾸 믿게 된다. 사실적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녀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날 너무 좋아해서 내가 쓸모없다는 걸 받아들여달라는 것이죠」*) 그녀에게 신은 우리의 인식처럼 거룩한 존재인 동시에 질투와 같은 인간적인 면모도 가지며 횡설수설을 하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처럼 "오리털을 무신경하게 뽑아 버린다."
왜 신은 인간적인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소통(疏通)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통하는 것도 일방적인 게 아니라 서로 통해야 하며, 오해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에 대해서 오해가 없는가. 이에 앞서서 그렇다면 서로 통하고 있는가.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려운 물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그의 거룩함을 인정하더라도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 혹은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질문도 하고 대답도 자유롭게 할 것이 아닌가. 여기서 더 나가면 당신이 창조했다고 하는 세상에 대해 부조리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심지어 따지기도 하면서도 힘든 일이 있거나 너무나 외로울 때는 또 기도를 기꺼이 드릴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시집을 읽으면 여태까지 우리가 신을 너무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더불어, 폭력에 대한 그녀의 인식도 드러난다. 폭력은 비록 그 주체가 '신'일 지라도 '무신경'할 때 일어난다. 신이 무신경하게 오리털을 뽑아 버리자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무신경하게 행한 행위가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반복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들로 인해서 그 사람이 죽고 세상을 뜨고 숨통이 끊기게 되며 사라진다. 이는 신에 대한 물음이나 문제제기 일 수도 있지만 비단 신에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인간의 선한 본성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어떤 페르소나 뒤에 감추어진 폭력성과 잔혹함이다. 또한 우리는 얼마나 우리라는 이름 하에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가. 행동으로 혹은 말로 아니면 시선까지도. 어쩌면 신은 삐져나온 오리털을 무신경하게 뽑지만 우리는 삐져나오지 않은 오리털마저 의도적으로 혹은 대수롭지 않게 뽑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뽑힌 오리털(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없다.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천사와 악마도 없"다. 그 사람이 사후에 마주하는 세계는 오로지 허공의 무(無)다. 그렇게 "미묘하게 흔들리다 바닥에 내려앉"을 뿐이다.라고 시인은 쓴다. 이렇게 쓰는 시인은 허무와 마주한다. 허무는 허무할 뿐이다. 이 단순한 동어의 반복이 사유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시인은 어떤 이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바라본다. 환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방법론이며, 해체와 파괴 끝에는 또 다른 창조가 있게 된다. 고로 이는 수동적 허무주의가 아닌 능동적 허무주의는 또 다른 하나의 길이며 새로운 창조에 다다른다.
*은 시인님이 블로그에 올리는 글을 보고 인용했는데 문제가 될 경우에는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또한 브이로그도 찍으시는데 굉장히 웃픈 이야기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최근에는 1818번쯤 들으신 시인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에 대한 브이로그도 찍으셨더라구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5FwiZhwp0_wgyumvZn8QC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