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감상이 아름다운 풍경을
비행기의 고도가 점점 떨어지고, 나는 왼쪽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감아요.
육호수, 「In sacula saeculorum」,『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중에서
짐을 찾고 게이트를 나오며 택시를 찾는다. 페낭에 내리면 마인어만 쓰겠다고 다짐하며 비행기에서부터 열심히 준비했던 "저기 혹시 USM 가시나요?"를 질문을 딱 두 단어로 끝낸다. "Ke USM(간다 USM 정도...?)." 그렇게 연습했던 문장이 고작 그런 결말을 맺은 것에 실망할 틈도 없이 택시 기사님이 티켓을 보여달라고 하신다. 티켓이요? 당황해서 그냥 영어가 나왔다. 세상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과 딱 봐도 여행 아니면 교환학생일 듯한 선글라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나의 얼굴을 읽으신 기사님이 말했다. "공항 안에 가서 티켓을 먼저 끊고 오세요." 공항 안에는 택시 티켓을 따로 파는 곳이 있었고 우리나라의 고속버스처럼 목적지를 말하면 거리에 따라 돈을 받고 티켓을 주는 방식이었다.
학교에 거의 다다르자 기사님이 물으셨다. "근데 USM 어디로 가요? 거기 엄청 큰데." USM 도착이라는 큰 고비를 넘어가려는 순간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무심결에 한국에서의 우리 학교를 기준으로 생각을 해서 학교에 도착하면 물어물어 보면서 가야겠다 생각을 했는데 학교가 거의 마을 하나 정도 크기였다. 그래도 기사님이 학교 경비원 분들에게 물어 가면서 교환학생 담당하는 부서에 무사히 도착을 했다. 기사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며 택시에서 내리니 드디어 더위가 실감이 났다. (페낭은 현재 24도에서 33도 정도를 오간다) 둘 사이에 구름 한 점 없이 해가 땅을 마주보고 있었다.
등록을 마치자 현지 기온에 적응할 틈도 없었다. 내가 늦게 도착을 해서 그런지 내일이 수강신청 마감일이었다. 지금 빨리 가서 신청하지 않으면 정정기간에 여석을 잡아야 한다는 말에 쫓기듯 문을 나섰다. 여기서 나가서 왼쪽으로 쭉 가시면 내가 다닐 학과 건물이 나온다는 데 자연의 풍경과 학교 캠퍼스 건물이 어우러지는 정경이 아름다웠지만 그에 대한 나의 감상은 그 아름다움 속에서 길을 완전히 잃은 듯한 느낌이었다. 집을 나간 게 개고생이라면 나라 밖으로 나가서 겪는 고생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보통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은 낯선 곳이나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모르면 용감이라도 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학생 분들이 교환학생이라고 하자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었고 여기서 만난 친구는 자기도 볼 일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말을 했다.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글을 쓸 새도 없이 수업에 자리가 남았는지 알아보고 다니고 있을 것이다. (물론 교수님들이 교환학생들에게 관대하기는 하다) 컴퓨터로 3초 내에 수강신청이 끝나는 우리와 달리 이곳에서는 시간표를 짜고 각 과목마다 교수님과 면담을 하고 사인을 받은 후 최종적으로 학과장님의 도장까지 받아야 수강신청이 끝난다. 귀찮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굉장히 좋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한 방식이었다.
교수님들이 학생들의 수준을 보고 어떤 과목이며 어느 정도의 역량을 요구하는지 학생마다 자세히 설명해준다. 또한 학생들도 교수님과 만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준비를 해간다. 일례로 내가 이번 학기에 수강하는 영미 문학의 교수님은 한 주에 한 권 정도 소설을 읽어야 하는데 괜찮아요?라고 물어보시고 어떤 소설들을 읽을지까지 미리 말씀해주셨고 나도 한국에서의 수학 목록을 보여드리면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교수님들 중에서도 좋은 분들이 많지만 사실 학생들도 교수님을, 요즘은 교수님도 학생들을 어려워한다. 하지만 이곳 교수님들과 학생들은 자유롭게 방문해서 조언을 받으며 자신에게 더 잘 맞는 강좌를 찾아나가고 있었다. (둘 다 아마 장단이 있을 것이다. 이곳 수강신청은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교수님이 외부 강의를 나가거나 출장을 가면 기다려야 한다.)
이번에 듣는 과목 중에 'Creative writing'이라는 과목이 있다. 창작을 하는 과목인데 사인을 받기 전 교수님이 나를 보며 스토리를 적을 줄 아냐고 물으셨다. 이 과목을 들으려면 스토리를 구성하고 적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이 질문에 선뜻 YES! 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저 관심이 있어서 듣는다고 답을 했다. 대답을 들으시곤 잠시 생각하시더니 적는 방법을 모르면 힘들 수도 있다고 조언을 해주시며 사인을 해주셨다. 이 일화를 한국 친구들에게 말해주니 그으짓말쟁이라 반응을 했다.
그러나 저 상황에서 Yes를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의 글을 나는 쉽사리 좋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어떤 특별히 능력이 필요할까. 글쓰기에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나는 믿지 못한다. 다만 이성복 시인이 말했듯 "재능이란 '관심'의 다른 표현이다. 단 집요한, 목숨을 내건 관심이다." 이어지는 말 역시 새겨들어야 할 문장이다. "대상은 내가 죽는 것을 보고, 그 순간에야 입을 연다. 대상의 말을 듣기 위해 나는 순간순간 죽어야 한다."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중에서)
사실 그리고 저 no에 가까운 대답은 영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한국어로 쓰기도 힘든데 영어라니.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주제와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김행숙 시인의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라는 구절이 머리를 스쳤다. 힘들겠지만 좋은 경험이 될 거라 믿으며 이 과목을 끝으로 수강신청을 마쳤다. 이번 학기에는 영어와 마인어를 위주로 공부를 한다. 그렇게 수강신청이 끝나니 하루도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하늘에는 한바탕 비를 뿌릴 것 같았던 먹구름이 흘러가듯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