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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욱 Dec 13. 2020

{Li:Fe}누군가의 꿈이 기억되려면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를 읽고 떠올린 기록의 무게

누군가의 꿈이 기억되려면


1. 기억과 암기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많은 시를 썼다고 알려진 시모니데스는 '기억술'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기억은 암기가 아닌 기억이었다. 그의 시를 낭독하던 연회장이 잠시 바깥으로 나간 사이 모든 손님이 죽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현대 사회처럼 신원을 파악할 수도 없는 고대에 시모니데스는 사망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고 그의 탁자를 떠올리며 이름을 복기해나갔다. 그렇게 그는 유가족들의 신원을 도왔다고 한다. 그가 많은 시를 썼다곤 하지만 그렇게 한 명, 한 명 희생자의 이름을 불렀던 그의 순간들이 윤리적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문학의 순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금도 하루하루 접하는 코로나 19의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 과거 사회 속의 많은 사고의 희생자들 역시 ㅇㅇㅇ명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순간에 개별의 아픔과 이야기는 스러진다. 그렇게 죽음은 개별성을 상실하고 수치화되어 망각에 이른다. 그렇게 기억 역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사회 속에서 취사선택된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단어를 남발하기에 앞서 우리는 잠시 '기억'이라는 단어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기억(記憶)이 암기(記)와 다른 까닭은 다시 불러내고 인출한다는데 있다. 무던히 저장만 하는 게 아닌 다시 꺼내보고 돌아본다는 점에서 기억은 암기와는 다른 독특한 윤리성을 얻는다. 사회 속에서 이러한 기억이 윤리적 형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록의 방식 역시 너무나 중요하다. 기억과 기록의 기댓값이 서로 다를 때 그 둘은 서로를 보완하지 못하고 충돌을 일으킬 뿐이다. 




2. 꿀수록 불행해지는 꿈


우선, 이 책은 그러지 않아 몹시 다행이었다.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선감학원의 피해자 분들의 구술 기록이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 게 고통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었고 알아야 했다. 그들의 꿈과 바람이 어떻게 스러졌는지를 잘 담아내는 게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의 윤리였다면, 이를 마주하고 있는 나는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마주하는 게 기억하는 사람의 첫 번째 윤리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장을 모두 읽고 마주한 두 번째 장의 제목에서 한참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제목의 깊이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사회의 시스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가고 싶은 게 최고의 꿈이었어요. 그 꿈도 결국에는 내가 능력이 됐을 때 꿈꿀 수 있는 게 여기의 꿈이야, 선감학원의 꿈. 내가 능력이 안 되는데 꿈을 꾸면 불행해져요. ( p.69)


책을 통해서 전달받은 누군가의 말의 무게가 이토록 무겁게 느꼈던 적이 없었다. "내가 능력이 안 되는데 꿈을 꾸면 불행해져요." 그의 평생 동안 선감학원에서의 탈출만을 꿈꿨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안정된 주거와 직장의 꿈, 행복한 가정의 꿈도 꾸었을 테고 그러한 꿈이 또 깨져 '그저 남들만큼만 살고 싶다'라는 꿈도 꾸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에 의해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꿈은 (시스템 속에서) 꿀수록 불행해져만 갔다. 그렇게 그는 이야기를 전한다. 


일부러 굳이 잊어버리려고 노력한 건 솔직히 없어요. 국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너네는 빨리 잊어버려라.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빈곤하게 만들어놨어요. 하루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한테는 마음의 상처 이런 거 사치에요. 살아가는 자체가 고달프잖아요.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매진하다 보면 다른 건 다 잊어져요. 국가가 그건 기가 막히게 해 놨어. 아주 빈곤하게 만들어서 이런 거 저런 거 생각 못하게 한 거예요. 먹고살기 바쁘고 거기 집중해 살다 보니까 자동적으로 잊혀지잖아요. 그렇다고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까, 나는?(p.83)


이 부분에서 이 책을 읽은 이유가 명확해졌다. 불만이나 어려움을 토로하기에 앞서 상처마저 자격이 있으며 아픔에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개인의 실패를 바라는 시스템은 개인이 여유 자체를 잃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실패'는 어디서부터 실패라고 부르는 것일까? 올해 내가 담근 청귤청이 온도 조절에 '실패'해서 상해버린 것도 실패일까? 그렇다면, 내가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으려다 차가운 물을 받은 건 실패가 아닐까? 그래서 Li:Fe Lab은 지난주에 이어서 실험을 진행했다. 




3. 당신 인생에서의 가장 큰 실패는? 


이번 실험의 발제자는 나였다! 나는 타인의 실패를 살펴보기 앞서 우리의 실패를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어떤 시스템이 작용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시스템이라는 속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역시 알아보고 싶었다. 시스템의 실패가 개인의 실패로 치부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역도 그에 못지 않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의 실험에서 개인의 실패에서 시스템을 분석하는 실험만 먼저 공유하고 이후에 시스템 속에서 나를 분석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내가 분석했던 실패는 중학교 2학년, 우리 교실에 있던 '왕따 사건'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나중에 사주를 보니 중학교 시절이 엄청난 사주가 들어오기 시작한 해였다고..)  2학년이 시작할 때, 이미 선생님들도 "2학기에 회장 선거 나갈 거지?"라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셨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별명이 '차기 회장'이었다. 그렇게 학교 생활도 잘 풀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완벽은 완벽을 추구하다가 끝이 난다. 학교를 다녀보면 담임 선생님들도 자신의 반에서 회장을 배출(?)하는데 모종의 경쟁이 붙는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조그마한 사건, 사고가 터지더라도 조용히 덮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큰 사건으로 커지게 되었다. 


시스템적으로 분석했을 때 학교 자체가 구조적으로 피라미드적인 사고를 하게 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으로도 1학년은 1층, 2학년은 2층, 3학년은 3층으로 사용한다. 이와 더불어, 매주 조회 시간을 떠올려 보더라도 교장 선생님 혹은 선생님은 조회대에 위치한다. 학교는 학생들의 행복,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물리적 구조로는 위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일상화된 폭력이 권력으로 자리를 잡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체벌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였다. 그러나 폭력으로 체벌하는 사람이 폭력을 처벌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러한 모순 속에서 오히려 앞선 구조가 물리적인 위계 구조에서 '폭력'이 마치 권력처럼 여겨진다. 


이에 국수사과 등으로 다양하지만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는 교육이 가세한다. 무언가 하나에 특출 난 친구는 완전히 왕따를 시키기 힘들다. 하다 못해 수업시간에 매일 졸다가도 달리기만 잘한다면 체육대회에서는 영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학교를 돌아보면 정말 그 친구는 졸 수밖에 없었고 체육대회에서만 영웅일 수밖에 없었다.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를 묻는 수업들이 이어졌다. 체육은 종종 자습으로 대체되었으며, 미술과 음악시간 역시 이론을 암기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다양성이 무너지면 하나 혹은 둘의 가치로 인간이 평가된다. 우리의 학창 시절을 돌아봐도 그렇지 않은가? 투명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힘이 세거나' 혹은 '공부를 잘하던가'의 전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시스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비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소셜 섹터에서 일하다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계란' 하나하나가 몹시 소중하고 귀한 자원이다. 그렇기에 나는 바꿔 말한다. 시스템이 바위라면 기왕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부술 정도의 기간 설정을 했으면 차라리 바위 위에 나무를 심자고. 그럼 나무의 뿌리가 바위에 균열을 내고 아예 그곳을 덮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우리의 목표점이 저 멀리 있더라도 어느 순간 자라는 나무의 그림자로 그곳을 거뜬히 넘을 수 있지 않냐고. 그렇게 실험을 진행한 후에 우리는 조직을 돌아봤다. 




    (1) 적용 

우리 조직이 바라볼 실패는 어떠해야 할까?

 이미지 출처: Pinteres


실패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의 Lab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숙명적으로 해야 했던 고민이었다. 우선 한 분은 시스템까지 가지 않고 패턴의 층위까지 보자고 제안했다. 나 역시 초기 단계에서는 조직 역량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동의했다. 그러나 동시에 피드백으로는 결국 옆의 빙하처럼 Mental model이 그러한 시스템 구조를 만들어 내고 패턴을 만들기에 장기적으로는 Mental Model에 기인한 실패를 바라볼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심연 속에 위치한 Mental Model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공부가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했다. 



 



   (2) 아쉬움

우리의 콘텐츠라고 가정했을 때, 이 책의 구성상의 한계는? 

구술의 한계는 무엇일까?

구술이라는 기록의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변하기 쉽다. 물론 구술을 진행할 때 공감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공감이 지나치면 감상이 되어버린다. 조직에서는 그렇게 구술을 진행하는 시간, 구술에 들어간 인력 등이 모두 투자이다. 이와 동시에 구술에 참여하신 분 역시 우리의 취지와 목적을 함께 하고 싶어 어렵사리 허락해주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감정이 지나쳐 감상이 되어버리는 순간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그렇기에 구술에 앞서 조직에서도 기준과 체계를 만들고 진행을 해야겠다는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좋은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도 내용만큼이나 중요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구술 기록에 우리의 의견도 충분히 가미하면서도 잘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 조직 내 활용방안

우리 조직에서 바라볼 실패는? 

우리 조직에서 바라볼 실패의 스펙트럼 혹은 깊이는? 


기록을 아카이빙 하는 진행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방식이며, 또 다른 방식은 깊이를 더 해가는 방식이다. 우리가 바라볼 실패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우리 세대의 실패'로 의견이 모였다. 이는 구술의 아쉬움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경험과 구술의 시차가 커질수록 구술을 전달하는 이의 기억에 해석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쌓인 만큼의 가치도 있지만 조금 더 생생하고 그때의 경험은 담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스펙트럼과 깊이 역시 '우리 세대의 실패'로 좁혀지며 이번 주의 논의가 마무리되었다. 



4. 누군가의 꿈이 기억되려면


"노인 한 명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란 아프리카 격언이 있다. 비단 노인이 아니더라도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꿈이 실패할 때 그대로 버려지고 짓밟혀 실패가 축적은 되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 과정 속에서 무수한 시도들이 모두 소실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실패가 사회의 자산이 될 수 있을까? 앞서 이 글을 열었던 윤리가 확보된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누군가의 성공신화만이 잔뜩 쌓이는 사회보다 더 다양하고 그렇기에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크면서 배우고 느껴왔다.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다.' 그렇다!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다. 앞선 문장에 이어서 '비극은 대부분 여기서 시작된다'라고 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 문장을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삶을 살아가고 사회를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너무 결정론적이고 순응적인 태도다. 만들어가야 할 삶과 사회는 오히려 다음이지 않을까. '다수가 성공할 수 있는 사회' 이어서 '다수가 행복한 사회'.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을 바라보는 시선도 변하고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실패도, 실패하는 사람들도,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되며 다양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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