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과 존재를 종종 동일한 것으로 오인한다. 하지만 이 둘은 시점부터 상이하다. 존재는 삶에 선행하며 동시에 후행한다. 그렇기에 삶의 인식은 개별적이겠으나 존재에 대한 사유는 보편적이며, 삶에 대한 고민과 사유가 존재의 그것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고민 가운데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밀란 쿤데라의 유명한 저작 역시 '참을 수 없는 존재(Being)의 가벼움'이지 삶(Life)의 가벼움이 아니다. 그러나 이 문단의 첫 문장처럼 현대사회에서는 삶이 존재를 검게 잠식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전시를 보았다. 날실과 씨실들이 교차 속에서 시오타 치하루는 기억과 트라우마를 창작의 기원으로 삼아 삶과 죽음 사이의 존재를 응시한다. 응시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것은 존재가 뻗어나가는 길인 연이다. 멀리서는 동일해 보이는 실의 굵기가 가까이서 보면 조금씩 다른 것은 연의 속성과 무척 닮아 있다.
"인간의 삶은 전해진 수명의 끝에 닿으면, 아마도 우주로 녹아들 것이다. 어쩌면 죽음은 무와 망각이 아닌 사라짐일 뿐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더 거대한 무언가로 스며드는 과정이다. 만약 그렇다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겠으나 그전과 그 후 역시 인간일까. 가끔 어떤 작가와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전생에 글이거나 음악이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사람은 다시 글과 음악이 되어 간다. 전시 중에서 작품 그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실과 실 새로 보이는 사람들도 오묘했다. 무관하지 않지만 유관하지도 않은 낯선 타인들이 작품 새로 내비칠 때 인연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연을 맺는 속도는 빛보다 빠르다. 탯줄을 자른 뒤부터 우리는 어머니와의 일대일 관계에서 다수와 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위의 밀란 쿤데라가 죽었음을 알기에 죽음조차 연의 끝이 아님을 안다. 계절이 거듭해 갈수록 깨닫는 것은 머무는 일보다 떠나는 일이 더 어렵다는 점이다.
전시의 오브제로 사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진은 사실적이다. 모든 사진 속에는 그 사람의 존재가 품고 있던 시간의 공기가 실타래처럼 고여 있다. 위의 인용구의 맥락에서 생각을 해볼 때, 사진을 보고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면 내가 그를 느끼고 있지만 그 역시 나를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마주 본 삶과 존재가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존재 아래서 삶과 죽음이 연결되기에 삶과 죽음은 여럿일 수 있다. 어떤 사람,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한 번의 죽음과 같다. 존재 속에 그가 남아 있겠으나 삶 속에는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헤어짐과 동시에 연을 이어갈 때마다 우리는 그 연 속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삶을 살아낸다. 그렇기에 삶은 기억을 기다릴 뿐 기억을 소유할 수는 없다. 기억은 연이 빚어가고 빚어갈 동심원이며 끝의 가장자리에는 우주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