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전하는 신년사

일자진(一字陣)과 학익진(鶴翼陣) 사이 전환에 대하여.

by 변민욱
모든 싸움에 대한 기억은 늘 막연하고 몽롱했다.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이었다. 지금 명량에 대한 기억도 꿈속처럼 흐릿하다.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p.129)




0. 글을 열며


쉬는 동안 감기에 걸렸다. 나는 삶에서 둔덕을 내려갈 때마다 감기에 걸리곤 했다. 얄팍한 술수를 쓰는 몸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그동안 버텨주었다는 고마움이 매번 한 발짝 앞섰다. 감기는 고맙게도 빈손으로 돌아오는 내 민망함을 조금 덜어주었다. 나는 아프면서도 '제 딴엔 글을 꽤나 열심히 썼구나' 생각하며 안도했다.


누워있으면서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다시 읽었다. 칼의 노래는 여러 번 읽었지만 그때마다 매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책이다. '이순신' 그가 왕을 상대한, 왜군을 상대한 진(陣)에서 삶의 자세를 읽어내며 다음과 같이 나는 느꼈다. 진은 그 단어에 차(車)를 포함한다. 고로 단어의 생명은 굳건함보단 전환의 역동성에 달려있다. 전쟁 같은 삶에서의 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신년을 맞이하는 나의 자세도 그래야 함을 칼은 내게 말해주었다.




1. 학익진과 한산도

왜군이 견내량에서 네다섯 척의 조선 수군을 추격한다. 좁은 바다를 벗어나자 왜군을 유인하던 함대가 돌연 선회한다. 그들은 중진(中陣)을 형성하며 날갯죽지 역할을 한다. 공세는 수세가 되고 수세는 공세가 된다. 돌아선 날갯죽지에 학이 움츠렸던 날개를 펼친다. 승패와 사생 존망(死生存亡)을 역류하는 날갯짓이다. 한 점을 보고 달려들던 왜군에는 그 한 점 이외 모든 부분에서 허점을 드러낸다.


집중은 분산이 되고 분산은 집중이 된다. 학익진은 판옥선의 화력을 극대화한 전략이다. 에워싼 조선수군은 적의 한 점을 향해 부수어 나가는 반면 적들은 그들을 전방위에서 상대해야 했다. 한 맺힌 학이 적을 안자 전환에 실패한 적들의 무참한 죽음만이 바다에 떠다닌다. 이 전투는 조선 전체를 봤을 때는 국지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후 전쟁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바람 불고 서리찬 국경으로 임금의 수레는 떠돌고, 갑옷 번쩍이고 말발굽 소리 요란한 옛 도성의 선왕의 무덤은 천리나 떨어졌으니, 돌아가는 한 가닥 생각이 마치 물이 동으로 흐르듯 하던 차에, 이제 적의 형세가 기울어지니 하늘이 노여움을 푸는 줄 알겠도다.
(칼의 노래 부록 中 임금의 교서)


이 전투의 공로로 이순신은 정헌대부로 승품 된다. 선조가 내린 위 교서 속 문장엔 그의 처지가 무색할 정도로 수사들이 가득하다. 조정과 왕은 무능했기에 사악했다. 한탄과 바람 사이에 있는 쉼표로 임금은 멀리서 이순신을 겨누는 듯하다. 그의 연안에는 베어야 하는 적들이 넘실댄다. 하지만 땅에서는 벨 수 없는 적들도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벨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2. 명량과 일자진


백의종군을 거쳐 돌아온 그를 맞이한 건 그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텅 빈 연안뿐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도주한 배설이 숨겨놨던 12척의 배뿐이다. 물러설 곳 없는 자의 절박함과 편안함이 동시에 뒤섞이며 그에게 밀려온다. 그러나 그에게 12척의 배는 많고 적음을 논할 논쟁거리가 아니다. 다만 처한 현실에서 그가 새로이 입각해야 할 사실이다. 그의 위치 또한 적에 의해 매겨질 것이었다. 그들이 허락한 유일한 사치는 사지(死地)를 선택할 권리뿐이다. 그곳에서 그와 적의 생사가 다시 한번 뒤섞일 것이다.


홀겹의 일자진이 적으로 맞이한다. 명량에서 일자진은 전략이라기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택한 진이다. 일자진은 단순하다. 단순한 만큼 강력하고 그만큼 취약하다. 그 칼을 사용하는 장수는 가장 긴 검으로 상대를 공격하지만 그만큼 상대에게 허(虛)를 허용한다. 적의 죽음은 그의 목숨을 내주어야만 받아 낼 수 있었다.


명량에서는 순류와 역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함대가 그 흐름에 올라탄다 하더라도 마침내 올라탄 것이 아니었다. 때가 이르러, 순류의 함대는 역류 속에 거꾸로 처박힌 것이었다. 명량에서는 순류 속에 역류가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적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여기는 사지였다. 수만 년을 거꾸로 뒤채이는 그 물살을 내려다보면서, 우수영 언덕에서 나는 생사와 존망의 흐름을 거꾸로 뒤집을 만한 한 줄기 역류가 내 몸속의 먼 곳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p.66)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명량은 네 번 물길을 바꾼다. 왜군이 밀물을 타고 파죽지세로 밀려온다. 날개를 펼쳐대며 집어삼킬 듯 그들은 다가왔다. 조선 수군은 진을 물린다. 퇴로는 임하도 앞까지 였다. 그 뒤로는 바다가 넓어진다. 그곳에선 적의 날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퇴로는 넓었지만 갈 수 없는 사지였다.


적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피난민들의 울음소리에 울돌목도 울음을 함께한다. 물살이 바뀌며 존망이 역류한다. 갑작스러운 역류에 적은 진을 전환하지 못한 채 지휘계통을 상실한다. 역동성을 잃은 진은 생명을 다한다. 진을 상실하면 하나였던 삼백 척도 삼백 개의 개별적의 나열에 불과하다. 이순신의 함대엔 수세에도 공세가 있었다면 적의 공세에는 수세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었다. 이순신은 밀려왔던 만큼 그들을 밀어낸다. 다시 한번 공세와 수세가 전환한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목숨도 전환을 맞이한다.




3. 그리고 노량


전투가 끝나고 장계가 올라가자 임근은 그에게 면사첩(免死帖)을 하사한다. 화려한 수사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면사' 두 글자뿐이다. 죄가 있고 없음도, 이를 사하여주겠다는 말도 아니며 다만 너의 죽음만은 내가 면해주겠다고 면사첩은 그에게 이야기한다. 적이 겨누는 칼과 임금이 겨누는 칼 사이에서 그는 나아갈 곳도 후퇴할 곳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사히 자연사(自然死)할 사지를 모색한다.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오는 적보다 가는 적이 더 무서웠다. 적은 철수함으로써 세상의 무의미를 내 눈 앞에서 완성해 보이려는 듯했다. 적들이 철수의 대열을 정돈하는 밤마다, 적들이 부수고 불태운 빈 마을에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꿈을 구웠다. (p.274)


이 문장은 첫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p.17)"와 대조된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 해도 그는 임금에게 죽을 순 없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 무의미를 견딜 수 없었다. 노량에서 그는 기도한다.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p.290)." 격렬한 전투가 오가는 가운데 그의 심장이 생애 동안 치열했던 전투를 먼저 마감한다. 그는 자신의 자연사에 안도한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p.61)





글을 마치며


김훈은 책에서 유독 승리라는 단어를 아낀다. 명량에서의 싸움 후에도 "명량에서 나는 이긴 것인가(p.103)" 그의 이순신은 자문한다. 승리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주위 사람과 적들 뿐이었다. 그와 바다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승리와 패배 그리고 생과 사는 하나의 물길 속에 있음을. 흘러가며 순류와 역류가 거듭될 뿐이다. 그건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그 흐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환'뿐이었다. 그것이 나의 최전선이자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었다.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다."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소심하게 나는 앞문 장만 '삶은 순류 속에도 역류 속에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로 조금 바꿔본다. 또한 삶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속에서 멀어지는 순류 속에서도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역류 속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나는 깨닫는다. 삶은 다만 그것을 인지하는 전환의 순간에만 점멸했다.


2017년이 무색할 정도로 2018년에도 사회는 어지러이 변화할 것이다. 이에 맞물려 내 삶도 이제 익숙함과 결별을 맞이하며 세상에 다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러한 내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전환의 역동성'만이 생존을 담보할 수 있음을 칼은 내게 이야기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한 번씩 써보는 책 속의 문장으로 글을 마친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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