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커튼콜

최인훈 '광장'과 김수영의 '사랑'과 '사랑의 변주곡' 속 사랑

by 변민욱

1. 4월의 가온음자리표

-높은음자리표로도, 낮은음자리표로도 가지 못하고


과거 한 매체가 4·19에 대해 대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4·19에 대해 알고 있다는 74.2%로 나타났고, 25.8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 이 결과에 따르면 대학생 중 4분의 1이 4·19에 대해 모르는 실정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최근의 한 강좌에서 4·19가 정확히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 대답하지 못했고 그 강의실 누구도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최근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을 통해 광주와 6월 민주화항쟁이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 원류라고 할 수 있는 1960년 4월은 잊혀져 가고 있는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혁명의 성공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혁명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순간에 혁명이 인간들에게 부여했던 울림들, 어루어짐, 떨림들에 있다.” 이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혁명의 행위와 성취의 감각(울림들, 어우러짐, 열림들)사이 분리다.


혁명은 끝나더라도 그 감각은 남는다. 문학은 혁명을 직접적으로 그리기보다는 혁명의 과정 속에서 성취한 감각을 노래한다. 이 감각에 대해서 최인훈은 광장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구정권 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이와 비슷한 체온으로 4월에 전율한 김수영 시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작열의 사실만을 알아가지고는 부족하오. 반드시 이 작열을 느껴야 하오.” 분명 그들은 4월에 무엇인가 느낀 듯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느낀 것일까. 비록 유산(流産)됐을지언정 무엇이 4월의 유산(遺産)인가. 그들은 4월로부터 ‘사랑'을 배웠다. 그동안의 글들이 문학적으로 윤애와 은혜와의 사랑의 의미를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나는 4월에 성취한 사랑 그 자체의 속성과 이후의 변주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선 문학을 통해 4·19의 의미를 그리고 현대 사회의 시사점을 논해보고자 한다. 우선 최인훈의 「광장」이라는 당대의 문제작을 통해서 4월 이전의 시대적 배경과 문학적으로 어떻게 그러 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명준의 선택이 단순한 죽음이 아닌 사랑을 향한 영원한 투신이며 부활이었음을 통해 사랑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시대적 연관성을 통해 김수영의 「사랑」과 「사랑의 변주곡」에서 이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논할 것이다. 결론 부분에서는 이 둘의 합류가 어떻게 흘렀으며 흘러가야 할 지에 대해서 서술하며 이 글을 마쳐보고자 한다.





2. 세뇨 (Segno)

- 언젠가 다시 광장으로 돌아올 것이다


서론에서도 제시했던 최인훈의 서문을 통해 4·19와 『광장』 과의 중요한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작품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한 지식인의 내적 고뇌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배경을 선택한 것일까. 4·19라는 역사적 사건 뒤에 『광장』이 발표되었다는 것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분단 현실과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쓰는 행위가 가능해졌다는 시대적 의미며, 둘째로는 이 시대적 의미를 바탕으로 후대에도 논의를 지속시킬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이 공론의 장에서 이명준과 같은 ‘개인’의 발견이다. 이 개인이라는 성격의 주체는 과거와 달리 자율적이고 자기의식과 영역을 사회에 반해서 사유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다. 이명준을 통해 작가는 6.25라는 휴머니티의 상실과 그 당시 반공을 비롯한 이데올로기 담론들을 초월하여 개인이 시대 속에서 겪고 있는 문제를 그려낸다.


‘광장’의 이명준이 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면 ‘바닷속’ 이명준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1973년판의 서문에서 작가는 이명준을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심해의 숨은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은” 잠수부로 명명한다. 잠수부는 바다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를 두려워하면서도 기꺼이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이다.


이명준은 사랑이라는 바닷속 그 깊이까지 우리를 안내하고 나선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다시 떠오르지 않았을까. 이 선택은 작가의 의지와 유사하다. 당대 현실에 대한 정당화나 합리화가 아닌 이러한 행위를 거부하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추상적 유령에 대항하여, 자신이 유령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사랑으로의 또 다른 전혀 다른 삶의 길이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던 이명준에게 사랑은 어떠한 개념인가. 그는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 나 같으면 이 따위 바보짓은 안 해. 전쟁 따윈 안 해. 나라면 이런 내각 명령을 내겠어. 무릇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삶을 사랑하는 의무를 진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적이며, 자본가의 개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다. 누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 이렇게 말이야.” 그렇다면 이명준의 사랑이란 어떤 성질의 것인가. 그에게 사랑은 온몸으로 투신할 정도로 강력한 이념였다. 이명준은 그때 심해로 가라앉지만 사랑은 표면으로 떠올랐다. 이와 같이 온몸으로 사랑에 투신했던 인물이 낯설지가 않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이후에는 김수영이 노래했던 사랑을 통해서 이 사랑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2. 페르마타 (Fermata)

-사랑의 표정 변화에 유의하며 늘여서 연주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김수영은 직설적인 화법의 시편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4월 혁명이 미완으로 그치자 그는 좌절을 겪는다. 이러한 6.25, 4·19, 5.16 일련의 경험은 그의 시 세계 특히 ‘사랑’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사랑」(1961) 전문

김수영의 「사랑」은 한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도 읽히는 작품이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읽어야 올바른 독법이 될 것이다. 이 시에서 ‘얼굴’은 일인칭과 이인칭 사이에서 미지의 가능성으로 제시되어 있다. 또한 그 얼굴이 일으키는 파장은 과거로부터 비롯되어 현재 내가 보고 있는 대상이자 미래와 겹치는 것이다. 실제 화자의 대화 상대방 얼굴에 “금이” 갔을 리는 없다. 화자가 상대방의 얼굴을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너의 얼굴이 불안정하고 그만큼 지켜보는 내 감정도 불안함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자아가 불안한 까닭은 무엇인가.


시의 주제가 내포된 첫 연의 “너”가 무엇을 뜻하는 지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시대적 독법을 통해 읽어보면 “너”의 의미는 4·19의 함성 속에서 느꼈던 민주주의, 주체적인 4·19 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맥락으로 시를 따라가면 2연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화자는 “너”를 통해서 사랑을 배웠다고 했다. 단순히 피부로 느끼거나 징후를 감지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배웠다고 말했다. 또한 이 시에서 사랑을 알려준 “너”는 불안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김수영은 오히려 사랑은 빛과 어둠 속과 같이 주변 상황이 변하더라도 불변하는 진리처럼 묘사한다.


이런 사랑의 진리를 깨우쳐버려 나는 너의 얼굴이 불안하다. 인간은 언제 불안함을 느낄까. 자신이 성취했던 것들이 허망하게 스러질 때다. 어둠과 빛 속을 번개처럼 번쩍이며 갈랐던, 그러나 그처럼 너무 짧았던 4월의 함성이 스러져가기에 시시각각 변하는 너의 얼굴이 나는 더더욱 불안하다. 아직까지 불안한 이 사랑을 변주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이 시간을 거쳐 61년의 「사랑」은 67년 「사랑의 변주곡」으로 울려 퍼진다.




3. 달 세뇨(D.S. Dal segno)

-연주를 마치기 전, 다시 광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앞선 시 「사랑」은 이어서 연주될 「사랑의 변주곡」의 서곡이다. 「사랑」이 화자의 불안함을 파고들면서도 사랑 자체의 불변성에 관한 곡이었다면, 「사랑의 변주곡」은 한 편의 ‘소나타’다. 그는 제시부에서 사랑이 될 징후를 찾아내고 이후 재현부에선 여태 한국시가 노래하지 못했던 체온으로 장중한 사랑의 울림을 연주한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사랑의 변주곡」 부분

욕망은 인류 물명을 여태껏 발전시킨 동력이자 동시에 파멸이 동인이었다. 그렇지만 시인은 이 욕망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도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라고 말하며 연주를 시작한다. 연주될 그의 사랑은 위대하다. 하지만 이 사랑을 발견하는 대상은 사소한 일상 속 소재들이다. 그에게 사랑은 불변의 진리이자 사소한 위대 함이다.

그 사소한 위대함이 발현되는 징후를 나타내는 시어는. “복사 씨와 살구씨”다. 이 씨들의 공통점은 바로 단단하며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성질이다. 이 씨앗이 품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싹이라고 그는 역설한다. 또한 김수영은 이 사랑을 이루는 기술이 바로 혁명이며, 우리는 혁명의 기술을 이미 알고 있다고 설파한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중략)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 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 씨와 살구씨가
한 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의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사랑의 변주곡」 부분

그러한 믿음 속에서 시인은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정말 그의 광신(狂信)이 아니었다. 김수영의 죽음 이후 우리는 과연 그 날이 도래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구는 예언이었을까? 이는 후대의 생각이다. 당시 끝나지 않는 악몽 같은 독재정부 시대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면, 이후 5.18이나 6월 민주화 항쟁에 대한 예언보다는 아들 세대까지 고통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아버지의 뜨거운 열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배웠으며, 그 사랑이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온몸으로의 몸부림이다. 그가 온몸으로 연주했던 이 사랑을 우리도 광장에서 온몸으로 계속 변주할 수 있을까.




3. 피네 (Fine)

- 끝. 그러나 사랑을 사랑해야 한다


최인훈의 「광장 」에서 우리는 이명준은 그의 선택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광장을 찾을 수 없음을 보았다. 그의 소설이 단순한 소설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고전처럼 유효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의 투신은 사랑을 향한 온몸의 바친 몸부림이었다. 또한 김수영의 「사랑」과 「사랑의 변주곡」에서는 그 사랑의 속성을 배웠다. 이 유산을 가지고 2017년 광화문 광장으로 눈을 돌린다.


2017년 나는 군대에 있었다. 정치적 중립의 의무로 인해서 나는 광장에 뛰어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몰래 바라본 광장은 전율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거의 눈물이 날 뻔했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피워낸 촛불이라는 안개꽃이 만개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를 외치며 박근혜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곳에서 지역갈등이나 도농(都農) 갈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선 모두가 한 목소리를 냈다. 아이들이 어머니와 함께 걸으며, 혹은 아버지 목에 목마를 타고 역사적 순간에 함께 했다. 그곳에는 세대갈등도 에이지즘(Ageism)도 없었다. 직장인과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 고등학생들까지 나섰다. 그곳에서는 치열한 경쟁도 없었다.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모두가 그렇게 사랑으로 결합돼 있었다. 나라라면 이게 나라이며, 사랑이 실현된다면 이러한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에 맞서서 우리는 다시 한번 혁명의 기술인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랑이란 완수하지 못할 최후의 혁명이다. 사랑이 일정한 지점이 아니라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이성복 시인은 현대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문학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한 사랑이면서 동시에 불가능에 대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이는 문학에 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의 속성이 문학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빌려와서 “사랑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한 사랑이면서 동시에 불가능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말하다면 이는 비약일까. 우리는 여태껏 배웠던 사랑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방법을 배웠다. 사랑은 홀로 피는 꽃이 아니다. 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는 슬픈 자위가 되고 만다. 사랑은 피와 땀을 먹고 자라날 꽃이며 동시에 수많은 연주자가 필요한 심포니다. 우리는 또다시 이 꽃을 피울 정원사이자 이 변주를 이어갈 연주자다. 그렇게 사랑은 늘 이번 시대의 마지막 악장이자 동시에 이후에도 울려 퍼질 서곡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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