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이야기 - Colombia 탱고를 느끼고 싶니? Cali
깔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무리 남미가 위험하다 위험하다하더라도, 이제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남미 여행을 하고 나름 깡따구가(?) 좀 생긴 나는 이 정도쯤이야 라는 생각으로 숙소를 찾아 해맸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름 살렌토에서 알아보고 온 숙소가 있었고, 무려 예약까지 하고 온 상태라 그런지 뭔가 든든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였다. 나의 택시사랑이 시작된 것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처음에는 숙소까지 걸어가려고 했었다. 그래서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길을 물어보는데 나에게 또 지도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쯤 되면 지도를 읽어보려 노력이라도 할 텐데 라는 생각이 들 테지만, 나는 그렇게 배움에 열정적인 인간은 아니었던 거다. 걸어서 한 20분정도가 걸릴 거라는 안내 데스크 직원에 말에 나는 벌써부터 가방의 무게가 2배 3배는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안내 데스크 직원이 나를 구해줄 한마디를 던졌다. "택시를 타도 얼마 안 나올 거야."
"택시"
그렇다. 호주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도 나는 택시 마니아였다. 기본요금이 5천원이 훌쩍 넘는 호주에서도 나는 밥 먹듯이 택시를 타고 다녔고, 한국으로 휴가를 오는 날이면 나는 늘 길던 짧던 대중교통대신 택시를 이용했었다. 내가 부자라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중교통을 혐오해서도 아니었다. 택시를 즐겨 타게 된 것은 30대가 시작되고서 부터였다(사실 20대 후반부터). 그전에 나는 20대라면 좀 힘든 일도 해 봐야 되고 고생도 사서 해봐야 한다고 생각도 했었지만, 30대가 시작되고부터는 몸의 노화(?)를 몸소 경험한 터라, 건강이 재산이다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거다. 거기다 살렌토에서부터 시작된 몸의 피로 때문인지 나는 조금은 몸을 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가가 저렴한 나라에서는 택시를 이용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나름의 합리적인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이다.
아무렴 어때, 몸이 좀 덜 피곤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아직은 여행 초기였기에 주머니 사정도 똥줄이 타기 전까진 꽤 시간이 걸릴 듯 보였다. (여행자금은 여행자들에게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대충 1년 여행기간으로 잡고 한달에 최대 Budget을 대략 100만원 정도로 잡았다.)
택시를 타고 정말 20분 안에 예약한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고 내가 묶었던 숙소는 정말 시티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장소에 위치해 있었는데 벽돌로 지어올린 건물이 꽤나 운치 있었다. (택시 금액은 한 6천원 정도 나온 걸로 기억한다).
짐을 풀고,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는 나는 칼리에서 할 일들을 쭈욱 훑어보기로 했다. 살사로 유명한 칼리는 역시나 그 명성답게 여행자를 위한 여러 살사 클라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살사에 빠져 정보를 찾고 있던 찰라, 메시지가 왔다는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지금은 어디쯤이야?"
보고타에서 처음 만났던 “그” 윌리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윌리엄! 나 지금 칼리야. 여기 살사로 유명하다고 해서 한번 배워볼까 하고 지금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어. 잘지내고 있었어?"
"칼리라고? 진짜야??"
"응. 아까 도착했어.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여행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응. 고마워! 니가 준 목걸이 덕분인 것같아. 하하 아무튼 나 지금 나가봐야 돼서 내가 숙소로 다시 돌아와서 연락할게."
"그래 알았어. 조심하고!"
어디서나 내 안부부터 묻는 윌리엄.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았더니 아주 잠깐 보고타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주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윌리엄.
멜랑꼴리한 기분이 이내 나를 집어삼킬까봐 나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칼리 시내는 보고타와 매데진, 그리고 살렌토와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뭔가 굉장히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사람들도 굉장히 더 바빠 보였고, 도시적인 느낌이 강했던 칼리
게다가 콜롬비아에서 아주 처음으로 물가가 비싸다는 슬픈(?) 생각이 들게 했던 도시.
그래도 꽤나 눈에 익숙한 느낌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익숙한 안전한 느낌의 도시.
여행을 하다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편견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데, 콜롬비아가 정말 그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오기 전에는 남미는 위험한 나라라는 인식이 정말 강했는데, 도착하는 그 순간부터 나의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를 알려주었던 나라. 콜롬비아. 뭔가 뿌듯한 이 기분을 천천히 만끽하며 나는 아주 찬찬히 칼리를 돌아보았다.
숙소를 돌아온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윌리엄의 문자 한통 이었다.
"저기.. 혹시라도 니가 괜찮다면 말이야.. 칼리에 우리 집 별장이 있거든. 꽤 사용하지 않아서 한번 둘러봐야 될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내일 칼리에 갈까하는데.. 시간 괜찮다면 우리 만나지 않을래?"
엄청난 우연이라기엔 꽤나 고전적이었다.
"음.. 나야 뭐.. 늘 계획 없는 여행자자나. 난 상관없는데.. 정말 오는거야?"
정말인가 싶어 몇 번을 물어보는 나에게 윌리엄은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었다.
..와.. 이 행동력 보소.. 나는 그럼 알겠다고 말하고 내가 지내고 있는 숙소의 주소를 보내주었다. 윌리엄은 내 여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 오후 늦게 쯤 나를 데리러 오겠노라 약속하고 나는 조금 놀란 기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윌리엄을 다시 만난다니.. 이 느낌은 마치.. 버스에 두고 내렸던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체념하고 있었던 찰라 예기치 않게 다시 찾게된 (묘사를 하자면)묘하고 벅찬 기분이었다.
다음날 나는 숙소에서 같은 방을 쓰며 알게 된 Celia와 함께 쇼핑 겸 도시를 돌아보기로 했다. 역시.. 여자는 어느 나라든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지름신이 돋았던 우리는 옷이며, 신발이며 배낭의 무게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채 예쁘다는 이유로, 혹은 디자인이 특이하다는 이유로, 혹은 가격이 조금 저렴하다는 이유로 기타 등등 끊이지 않는 이유들을 들먹이며 나름 자기합리화에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며 양손 가득 쇼핑을 했다.
스위스인이며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던 Celia덕분에 우리는 물어물어 칼리 사람들이 자주 가는 유명한 로컬 레스토랑을 소개받았는데, 나름 꽤 물가가 높은 칼리치고는 아주 저렴하지만, 맛이 일품인 레스토랑이었다. 쇼핑을 하며 쓴 돈은 생각안하고, 레스토랑이 저렴했다는 이유로 돈을 절약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웃음이 어여뻣던 씰리아는 남미 여행만 이번이 5번째라고 했다. 사랑에 용감했던 씰리아는 쿠바인 남자친구와는 벌써 2년째 장거리 연애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는데, 남자친구를 보러 쿠바에 올 때마다 이렇게 휴가를 연장해서 다른 나라들도 짬짬히 여행을 하고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너는 참 멋있는 거 같아. 나는 사랑에 이렇게 열정적일 수 있는 네가 부러워.."
"이건 아무 일도 아니야. 너도 나중에 네가 정말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나타나면 당연히 나와 같이 행동할거야.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거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라.. 나는 장거리 연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할 자신도 없을 것 같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라.. 20대에는 30살이 되면 조금 더 성숙한 연애를, 그렇지 않으면 사랑에 관해서는 굉장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20대의 나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서툴렀고, 혼란스러워했으며,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게.. 나도 꼭 그랬으면 좋겠다. 아무튼 넌 너무 멋져."
씰리아와의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나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칼리에 도착했어. 언제든 네가 가능한 시간을 알려줘. 내가 데리러 갈게."
윌리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라.. 윌리엄도 그런 마음일까?
윌리엄과는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만났다. 날 데리러 온 윌리엄은 보고타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장난기 가득했고, 조금은 들떠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 뭐야 진짜. 다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어."
내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미소만 짓고 있는 윌리엄을 보니 과분한 사랑이라는 느낌이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 안고파? 뭐 먹을래? 여기 엄청 유명한 엠빠나다 레스토랑 있거든. 우리 가족들이 칼리로 휴가를 오면 자주 가는 곳이기도 하고."
윌리엄의 선택은 아주 정확했다. 보고타에서부터 엠빠나다의 맛에 반한 나는, 윌리엄이 데리고 간 깔리의 엠빠나다를 맛보고는 보고타의 엠빠나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맛에 고민 없이 엄지를 들었다. 담백하지만, 속이 꽉찬, 보고타와의 엠빠나다와는 또 다른 맛의 엠빠나다였다.
"맛있어?"
"야.. 진짜 대박. 여기 뭐야? 엄청 맛있어."
"여기는 엠빠나다를 조금 고급화 시킨 레스토랑이야. 엠빠나다를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이나, 아니면 조금 특별한 엠빠나다를 맛보고 싶은 사람들한테 적합한 곳이지."
신이 나서 설명을 하는 윌리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앰빠나다를 깨끗히 싹 비웠다.
"이제 우리 어디가?"
"음.. 우리 별장에 가지 않을래? 칼리 시티에서 한 두어 시간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수영장도 있고, 굉장히 조용한 곳이라서 너도 좋아할 거야. 여행하면서 많이 피곤했을 것 같아."
나는 그래도 외간 남자와 둘이, 텅 빈 별장에 있는 것이 과연 안전(?)한 일이것인가. 하는 생각에 아주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 남자가 윌리엄이라서 믿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설마.. 윌리엄이 날 죽이기라도 하겠어. 라는 허무맹랑한 의심과, 윌리엄에 대한 두터운 믿음과 함께 이 말도 안되는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두어시간을 운전해서 다다른 곳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곳이었다. 별장이라고 해서 한적한 강가 앞의 오두막 같은 집을 상상했던 나와는 달리, 윌리엄이 데리고 간 곳은 정말 도시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꽤나 고급 아파트였다. 그곳의 일층에 위치해 있던 윌리엄 부모님의 별장(?)은 우리나라의 고급 아파트 내부와 비슷한 느낌은 곳이었다. 방이 무려 네 개나 있었고, 멋들어진 부엌이며 고급 액자와 꽃병이 꽤나 인상적이었던 윌리엄의 깔리집.
거기다가 아파트 앞에서는 콜롬비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보긴 힘든 고급 슈퍼마켓도 입점해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별장이라는 조금 다른 느낌이라서 좀 놀랐어."
"그래? 하하 어떤 별장을 생각했는데?"
"아니.. 그냥.. 뭐랄까.. 강가 앞에 오두막집..?"
"하하 아니라서 실망했어?"
"아니 뭐 실망까지야.. 이런 것도 나름 매력 있네."
"강가는 없지만.. 이건 있지."
거실의 커튼을 열자 그 앞으로 쭈욱 길게 놓여진 수영장이 보였다.
"진짜 짱이다."
"수영할래? 덥지 않아? 에어컨 틀어줄까?"
내가 불편할까 연신 질문을 퍼부었던 윌리엄이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뭔가를 들고 나왔다.
"이거."
"너 자꾸 이렇게 예고 없이 뭐 준비하면 나 진짜 화낸다. 매번 받기만 하면 나도 꼭 뭔가를 줘야될 것 같아서 불편해.."
안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던 터 인데 이렇게 또 뭔가를 주려하는 윌리엄에게 나도 모르게 화를 내버렸다.
"화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정말 미안해.. 그냥 나는 널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오늘은 여기서 묶을 거니까.. 너 아무것도 안가지고 왔을 거 같아서. 이건 그냥.. 화장 지울 거하고.. 내일 화장 할 거.. 그리고 칫솔이야."
나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순순히 그가 내민 조그마한 가방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칼리에서 두어시간 떨어진 윌리엄네 집은 칼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굉장히 조용했지만 그렇다고 시골의 그 특유한 한적한 느낌은 또 아니었다. 수영장에 발만 담구고 앉아 있는 내 옆으로 윌리엄이 다가왔다.
"아직도 화났어?"
"아니.. 그냥.. 뭔가 여행 온 첫날부터 말이 안되서."
그랬다. 나는 정말 진심이었다. 여행을 떠나 온 그 첫날부터 나의 여행은 뭔가 특별했다. 하지만 이 여행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나의 시간을, 나의 여행을, 나의 30대를, 너무나도 특별하고 찬란하게 만들어 주었던 거다. 말할 수 없이 벅찼고, 따스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수했다. 그 누구 하나 나에게 무언가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대가를 묻지 않고 나에게 따스한 잠자리를 내주었고, 그들의 세상에 나를 초대했다. 가족 같은 느낌이었고, 오래 전부터 내가 알고 지내왔던 친구같았다. 그래서 혼자 여행을 떠나왔지만, 난 단 한순간도 외롭지 않았다.
"있잖아.. 조금 쑥스러운 질문인데.. 칼리에는.. 나 때문에.. 온 거야?"
"음... 부담스러워 할까봐..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가 보고타를 떠난 이후부터.. 계속 생각했어. 니 카카오 스토리를 뒤져보기도 했고, 페이스 북에 니 사진을 매일 보기도 했고.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니가 여전히 콜롬비아에 있는데 내가 뭘 망설이는 거지 하는. 조금이라도 만나기 더 쉬울 때 너를 한 번 더 봐야지 후회가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 뭐.. 칼리에 집도 있고 차도 있어서 오기 더 쉬웠지만."
보고타에서 칼리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비행기로도 4시간 이상이 걸렸고, 비행기 값만도 만만치 않았을 테지.. 내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사랑에 이렇게 용감할 수 있는 윌리엄이 실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대단하다. 근데.. 부담스러운 건 정답."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윌리엄이 해준 저녁을 맛있게 먹은 후 나는 조금 피곤했는지 금세 곯아떨어져 버렸다. 아마 잠에서 깨버린 건 윌리엄이 밤새 쓰다듬어 주고 있던 내 머리결에 그 감촉이 사라져버렸던 걸 느꼈을 때 즈음 인 것 같다. 내 옆자리도 아닌, 앞에 엎어져 버리다시피 잠이 든 윌리엄의 모습에 또다시 미안한 감정과, 복잡한 여러 감정들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인생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것들 투성이고, 당장 내일을 아니 한시간 앞의 일도 모르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일들 투성이었다. 이 남미에서는..
그래도 내 인생이.. 남들에게는 시시해 보일지도 모르는 내 인생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아니 혹은 내 앞에 잠들어 있는 그 누군가에게 만큼은 조금은 특별하고, 소중한 인생이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이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까.
가끔은 다른 누군가로 인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내 모습이 싫었다.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내가 과연 어울리는 사람일까 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괜히 작아지는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했고 안쓰러웠다. 내 소중한 인생을 미처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이들의 그 어떤 것들을 부러워만 했던 어리석은 순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하지만 떠나오는 그 순간 나는 결심했었다. 이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그 순간, 나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내가 좋아하는 거, 내가 보고싶은 거,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찾는 것.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찾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꼭 답을 찾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떠나기로 결심했고, 그것을 행동에 옮긴 그 행위 자체로 이미 나는 정답을 얻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지금 내가 확신 할 수 있는 건, 이제는 더 이상 그사람 옆에 내가 어울릴 수 있을지가 아닌 그 사람이 과연 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고, 남들과 나의 삶을 비교를 하기 보다는 너무 소중한 내 인생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 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처음 보는 나를 소중히 아껴준 남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다시 곱씹어봐도 참으로 고마운 마음들이었다. 나조차 잊고 있었던, 얼마나 소중하고 소중한 내 인생을, 그들이 다시 돌아보게 해주었다. 보잘것없는 내 인생이지만, 얼마나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나는 소중한 내 인생을 책임지는 주인공이라는 것을 남미에서 만난 모두가 일깨워 주었다. 특히나 윌리엄은 더욱더.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윌리엄이 더 고마운 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한참을 잠든 그를 바라보았다.
이 밤, 이 공기, 내가 느낀 이 감정.
어느 것 하나 잊지 말자고 다짐, 또 다짐을 했다. 그렇게 따스한 밤이 또 흘렀다.
다음날, 숙소에 나를 내려 준 윌리엄은 보고타로 돌아가 봐야 된다고 했다. 사실 그는 바쁜 자신의 일상을 쪼개고 쪼개 칼리에 온 것이었다. 뭐라 해줄 말이 없을까.. 미안하지만 그래도 고마움을 가득 담은 뭔가 꽤 괜찮은 말..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선수를 친 건 윌리엄이었다.
"네가 이유 없는 선물들을 받는 게 불편하다고 했지만.. 이렇게 생각해 주면 안 될끼? 나는 이제 우리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라. 아마 이번을 마지막으로 한동안은 아니 어쩌면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르지. 근데..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잖아. 예쁜 걸 보여주고 싶고, 맛잇는 걸 같이 먹고 싶고, 가장 좋은 것들만 주고 싶고.. 나한테는 니가 그래. 얼굴을 볼 수 있고 너와 함께 웃을 수 있는 지금. 니가 보고타를 떠나고 난 뒤에 내가 정말 너를 많이 좋아하는 구나하고 깨달았어. 그래서 칼리에 올 때도 난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았고. 이 마음을 니가 받아 주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난 네가 알았으면 좋겠어. 넌 니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누군가에게 넌 완벽한 그 어떤 사람이라는 걸.“
그렇게 솔직하고 아주 당당하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준 윌리엄은 내 손에 아주 작은 선물을 하나 쥐어 주었다.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그치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늘 너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할거야. 여행 조심히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어디에 있든 나한테 연락하는 거 있지마. 꼭이야."
윌리엄이 떠나고 난 뒤, 숙소에 한참을 넋놓고 앉아 있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씰리아는 어제 어디 갔었는지, 하루 종일 나를 찾았다는 말을 늘어놓으며 내 손에 있는 작은 선물을 발견했다.
"그건 뭐야?"
"선물. 아직 열어 볼 자신이 없어서.."
"열어 볼 자신이 없다고? 같이 열어 볼까? 나 궁금해.“
괜히 혼자 선물을 열어보며 궁상을 떠는 것 보다는 선물을 핑계로 장대한 수다를 늘어놓을 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이뿌다, 하얀 장미라니!"
작은 상자 안에 담겨있는 한송이의 작은 장미. 윌리엄이 내게 주고 간 선물은 한송이의 장미꽃이었다.
윌리엄은 별 볼일 없는 내 인생을, 별 볼일 있게 만들어 주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참을 그 예쁜 꽃을 바라보며 아직도 얼떨떨한 윌리엄과의 첫만남을, 그리고 이 어처구니 없지만 고마운 이 순간을 오롯히 품에 안았다.
첫째날과 마찬 가지로 우리는 메인 광장에 있던 쇼핑몰에 다시 가기로 했다. 한 켤레 밖에 들고오지 않은 운동화만 신고 다니기엔 내려쬐는 남미의 햇살은 정말이지 나에게 무좀을 선물해 줄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간만에 신발 쇼핑과 그곳에서 눈에 띄었던 (하지만 가지 못했던) 레스토랑을 가기 위해서였다.
쇼핑몰 안에 있던 일본 레스토랑은 우리의 예상보다는 훨씬 더 비싼 금액이었지만 (콜롬비아의 물가는 우리나라의 반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한끼에 2-3천원이면 꽤 괜찮은 곳에서의 끼니가 가능했으니까!) 깔리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멋들어진 뷰와, 깔끔한 음식이 나름 여행중에 호사를 마음껏 누리는 기분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여행중에 이런 호사 정도는 한 번은 누려줘야 정신건강에도 좋으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당!)
홀쭉해진 지갑과 빵빵해진 배를 이끌고 숙소에 돌아가 잠시 Siesta(씨에스타 - 점심을 먹은 후 잠시 눈을 붙이는 정신건강과 건강에 아주 좋은 습관)를 가지기로 했다.
저녁에는 씰리아와 함께 살사 댄스 클라스에 가기로 했다. 여행을 떠나오며 워낙에 간소한 짐만을 챙겨온 나였기에 나는 딱히 살사 클라스에 신고 갈 신발이 없었다. 그렇다고 고작 하루를 위해서 또 한켤레의 신발을 산다는 건 왠지모르게 부담이 갔다. 다행스럽게 발 사이즈가 비슷했던 실리아가 흔쾌히 본인의 신발을 빌려주겠다고 해서 나는 씰리아의 어여쁜 꽃무늬 신발을 신고 살사 댄스에 참석 할수 있었다.
한 조용한 바에서 열린 살사 댄스 클라스는 말 그대로 정열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처음에 기본 살사 동작을 알려주고는 음악에 맞춰 남녀가 짝을 맞추어 몸을 흔들어대는(?)살사는 솔직하고 열정적인 남미인의 성격을 고스란히 잘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씰리아와 한참을 흥겹게 음악의 몸을 맡기고 2시간 넘는 시간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글쎄.. 아마 콜롬비아를 더 여행하다가 에콰도르로 넘어갈 것 같아. 특별한 계획은 없어. 너는?"
"나는 이제 남친이 있는 쿠바로 돌아갈 거야. 칼리에서 좋은 시간 같이 보내줘서 너무 고마워 윈디! 항상 몸 조심하고 신나는 일이 많은 여행이길 기도해줄게!"
우리는 서로의 앞날에 눈부신 일들이 가득하길 바란다며, 마지막으로 뜨거운 포옹을 나뉜 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방에 돌아와 침대에 기어 들어온 이후에도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윌리엄에게 고맙다는 문자조차 안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핸드폰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느다란 빛줄기에 의지한 채 몇 번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 채, 나는 적당한 문장을 찾고 있었다.
"윌리엄.. 예쁜 선물 너무 고마워. 보고타에 조심해서 돌아가고,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우리 좋은 친구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넌 내가 만난 아주 특별한 사람 중에 한명이야."
나는 윌리엄의 마음이 다치 지않게 하지만 고마운 그 마음을 최대한 꾹 눌러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나열했다.
"선물이 마음에 든 다니 다행이야. 그 꽃은 말이야.. 가짜가 아니라 진짜 생화야. 친구한테 부탁해서 얻은 꽃인데, 특별한 방부 처리를 한 덕분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대. 꽃을 좋아하는 너를 늘 기쁘게 해주고 싶었어. 너도 나에게 아주 특별한 사람이야.. 이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다시 너를 볼 수 있어서 너무 기뻤어. 네가 어디에 있든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도할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 없이 많은 인연들을 만난다. 어떤 이는 나를 아프게 할수도, 어떤 이는 나를 위로 할 수도, 또 어떤 이는 나를 응원하기도, 시기하기도 할 것이다.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유 없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위해 주는 순간도 경험할 것이고,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나의 진심이 그 누군가에게는 닿지 않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남미를 여행 하는 동안 나는 너무나 많은 인연들을 만났고, 또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특별한 순간을 마주하기도 했다.
윌리엄은 그 수많은 순간들 속에, 나를 가장 빛나게 해 준 사람 중에 한명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나를 "빛나는" 그 누군가로 만들어 준 소중한 사람. 콜롬비아의 여행의 시작과 마지막에 늘 함께해 주었던 아주 특별한 사람.
애초에 그저 지나가는 여행지로 정해두었던 깔리는 윌리엄과 씰리아로 인해 조금은 더 긴 여운을 남기는 곳으로 기억될 것같다.
안녕 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