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봄일 수는 없지만
오늘은 그랬다. 아무 계획 없이 집을 잠시 떠나고 싶었다. 아이들과 함께 움직일 때 그랬다간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지만 드디어 아이들의 기나긴 방학이 끝이 났기에 집안일을 뒤로 미루고 무작정 나섰다.
선물처럼, 아무 계획 없이 나선 길에 선뜻 동행한 길벗을 마주한 순간부터 웃음이 난 건 이 여행의 시작부터 그냥 즐거웠기 때문이리라. 흐린 하늘에 바람이 불어 날이 매우 차가웠으나 우리가 나서면서부터 어쩐지 태양도 준비된 것처럼 뿅 하니 나타났다. 급할 것 없는 마음은 국도를 따라 굽은 길로 느릿느릿 운행했고 쨍한 햇살에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도 어제와 달랐다. 서로의 상황과 마음은 다르게 출발했을지라도 그 길, 우리의 대화는 따뜻했고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고요했다.
마음이 닿아 들어간 미술관 곳곳은 낡음이 주는 정겨움과 동시에,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작품들로 신선했다. 100년이라는 세월이 넘게 그의 삶과 작품으로 가득 찬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천천히 보고, 걸었다. 그가 썼던 색채의 기운으로 살짝 들뜨기마저 하며. 우리는 그가 오르내렸을 나무계단의 삐걱거림 속에서 잠시 그가 남긴 삶과 작품의 여운을 뭉클하게 느끼고 내려왔다.
그다음으로 들어간 작은 책방은 꿈 많은 소녀의 방처럼 아늑하고 따뜻했다. 봄날의 책방. 꿈틀꿈틀 봄을 만난 생명같이 내 속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넓지 않은 책방 구석구석에서 건네는 이야기들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 결국은 몇 권의 책을 골랐다. 온라인 서점의 장바구니에서 더 저렴하게 구입할 일이나 이런 곳에서 직접 책을 사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함께 걷는 벗에게 어울릴만한 책을 골라 건넨다. 아마 거기, 그 책장에는 그 순간 내가 건네주고픈 마음이 책갈피처럼 꽂혀있을 것이다.
마음은 불렀으나 배가 고팠다. 이래 저래 검색도 않고 길 건너 눈길 닿은 식당으로 향했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생선구이 집의 따순 방바닥에 앉아 짠내 나는 음식을 반찬삼아 우리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혹여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앞 뒤 생각 없이 뛰어드는 무모함에 빠지지 않으려 앞서거나 애쓰지 않으며.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렇게 듣고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 생각했던 것조차 때론 지나침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래서 혹여 헛된 기대로 서운하거나 실망할지 몰라도 곁이 되어주고 싶었다.
어려운 날들의 생각으로부터 잠시 건져내주고 싶어 그녀에게 재래시장을 가보자 했고 바다 냄새와 사람 냄새로 시끄러운 시장 골목을 빙 둘러 몇 가지 반찬거리를 샀다. 봄이었다. 넉넉하게 채워진 배와 마음으로 걷는 길들이 모두 봄이었다.
우리의 내일은 어떨지 몰라도, 어떤 밤에 또 잠 못 들지 몰라도 오늘의 겨울은 봄이었다. 당장 내일 모든 것이 으스러지며 추워질지라도 오늘의 봄이 얼마간 우리를 지탱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