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나 보다
좀 화가 났다. 갑자기 그랬다. 뻐근하게 굳은 어깨 근육이 흐린 날처럼 내려앉아 묵직하게 느껴졌고 세 아이의 바지런한 움직임에 어질러진 주변이 피곤했다. 얼른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내 속도와는 무관하게 네 남자는 각자의 할 일에 몰두해 있다. 휴대폰에 시선이 고정된 남자, 실로폰 채를 두 개 다 가지려는 남자, 그 채 하나를 뺏으려는 남자, 블록으로 뭔가를 만들면 내게 설명하러 달려오는 남자까지... 친정에 갈 짐을 싸면서,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하면서, 아이들의 싸움을 중재하면서, 물음에 대답하면서 나 혼자 바쁘고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고요하게 되는 순간이 왔다. 아빠가 틀어준 영상에 눈도 깜빡 않고 모여 앉은 아들 셋을 보니 고무줄처럼 팽팽해 있던 내 정신도 갑자기 팅 하고 끊어졌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냥 어느 날의 한 순간처럼 평범한 날인데도 모든 게 헝클어진 듯한 그런 순간. 차곡차곡 개던 빨래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싶은 그런 순간. 없던 용기가 불쑥 솟아나 당장 혼자라도 빈손으로 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순간.
서두르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커피라도 한 잔 사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신발을 신었다. 힐끔 곁눈질로 날 쳐다보는 큰 아이에게 엄마 잠깐 갔다 올게 했다. 아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징징댔지만 빨리 갔다 올 거야 하며 문을 닫고 잰걸음을 걸었다. 웬일로 아이가 문을 열고 울며 날 찾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빠가 있는데 싶어 아이의 울음에 귀를 닫고 뛰다시피 걸었다.
쌉싸름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하던 나의 소원은 문이 닫힌 카페 앞에서 한 번 좌절됐다. 그래, 하루를 시작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 가게 문을 열기엔 이른 시간이구나. 발길을 어디 둘지 몰라 멈칫하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나에게 10분만이라도 자유를 줘! 하고 딱딱한 마음으로 전화기를 바라봤다.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끊이지 않고 울리는 전화를 무시하며 동네 마트에서 아이들이랑 먹을 과일을 한 봉지 계산했다. 세 번째로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를 누르자마자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애가 없어졌어!
당신은 도대체 뭐 하고 있었냐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일단 끊고 무조건 달렸다. 도대체 어디 간 걸까. 3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 집을 나와도 멀리 갈리는 없다. 놀이터와 주차장 쪽을 휘둘러보아도 조용하다. 계단을 빠르게 오르는 나의 리듬에 과일을 담은 봉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찾아온 누군가에게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아래까지 들렸고 아이는 무사하구나 하는 예감에 덜썩 마음이 놓였지만 차오른 숨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물범벅이 된 아이가 처음 보는 장난감을 들고 말없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둥이들은 아직 화면에 눈이 멈춰있다.
아이는 내복 차림에 맨발로 뛰쳐나가 아파트 주차장을 뛰어다니며 엄마를 찾았다 했다. 전쟁 고아라도 된 듯 실성한 듯 울며 다녔다했다. 방에서 통화를 하고 있던 남편은 우는 소리에 밖을 내다보니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아들이 보였다. 무슨 상황인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주춤하는 사이에 갑자기 아이가 없어졌다했다. 조용한 주말 아침에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놀래서 나온 건 옆집 이모였다. 아이를 데리고 와 진정시키고 장난감으로 달랜 듯했다.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던 나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도 나도 누구 탓을 할 필요도 없이 가만히 아이의 눈물자국을 쳐다보며 말이다.
감정이 섬세한 아이가 마스크에 가려진 내 표정과 감정까지 읽어낸 것 같다. 그렇게 주차장을 뛰어다니다 차라도 움직였으면 어쩔 뻔했냐고 다그치며 아이의 발을 씻어주었다. 새까만 발에서 오랫동안 구정물이 흘러내렸다. 결국은 부모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내 아이의 감정과 기질의 결을, 내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뛰어넘고 보듬어야 하는 자식이라는 존재를 한참동안 바라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