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 맘껏 놀 수 있기를
비가 내린다. 며칠 전 깨를 뿌리고 비닐을 덮어놓았다는데 쏙쏙 싹이 올라와 있다. 양파는 알이 굵어졌는지 쓰러져 수확을 기다리고 있고, 무성하게 자란 미나리와 산나물을 캐어 장만하는 손도 분주하다. 조롱조롱 맺은 매실 알이 제법 굵다. 비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진 매실들이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여름꽃들이 벌써 고개를 내민 걸 보면 날씨가 예년보다 더워졌나 보다. 길가에 발갛게 열매 맺힌 뱀딸기를 보니 이제 곧 산딸기도 따 먹겠다 싶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더니 푸르름이 생기를 더하고 꽃들의 자태는 요염하다. 멧돼지가 어김없이 달려들어 망치는데도 심으려는 건지 땅콩 모종이 한 판 나와있다. 엄마가 좋아하는 간식이다. 사 먹는 중국산 땅콩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라며 올해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포기할 수 없는 수확을 위해 땀 흘려야 하는 시간들이 남아 있다.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녀도 심심치 않을 계절인데 여전히 신발을 거부하는 둥이들은 아직 이 즐거움을 모른다. 겨우 한 아이에게 슬리퍼를 신겨 걷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는 겁도 없이 청개구리를 잡아 종이컵에 넣고 어정어정한 걸음으로 돌멩이를 주워 담으며 연신 감탄의 소리를 지른다. 등에 업힌 한 아이도 내려달라 소리치지만 여전히 신발은 완강히 거부한다. 오히려 신발을 신고 있는 아이에게 "빼! 빼!"하고 울먹인다.
곧 시작될 여름, 볕이 너무 뜨겁기 전에 걸어 다니며 놀면 좋겠는데 하루 종일 장난감이나 쥐고 놀다 가끔 이렇게 바람이나 쐴 뿐인 아이들이 안쓰럽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업고 한 바퀴 산책에 나선다. 장난감으로 놀다 심심해지면 TV를 외치는 아이에게 이렇게라도 살아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날 샜다. 한 바퀴 하자!"
정확하지 않은 말투로 신발을 가리키며 새벽부터 일어나 밖에 나가자고 재촉하던 아이였다. 지금 둥이들만 한 때 첫째는 그랬다. 여름날의 길목,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한낮의 더위는 살을 따갑게 한다. 우리는 기차가 지나가는 굴다리까지 산책을 즐기곤 했다. 내 걸음으로 5분도 안 걸릴 목적지를 느릿느릿 걸어가는 길은 어제와 다른 오늘의 풍경으로 펼쳐져 있었다. 까맣게 익은 오디가 가득 열려있는 나무 아래서 손을 뻗는다. 전날 내린 비로 깨끗이 씻겨나간 먼지 때문에 따자마자 바로 입으로 가져간다. 흠이 있는 것도 있고 벌레가 붙어있기도 하지만 잎사귀들 사이로 잘 익은 열매들을 찾아 따내는 즐거움이 있다. 아이는 벌써 손이며 입이 새까맣게 물든다.
햇볕에 노출된 시간에 비하면 수고로움이라 할 수도 있겠다. 키 보다 높이 있는 열매들을 까치발로 서서 하나하나 따 먹어봤자 요기가 되지는 못한다. 익지 않은 열매가 더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마트에 가면 흠 없고 잘 익은 열매들이 푸짐하게 고객을 기다리고 있는데, 옷이며 신발을 이렇게 더럽히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하지만 아이는 안다. 달콤함의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살아있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림으로 태양을 아는 것과 실제로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 흘리고 살 따가움을 느끼는 것의 차이. 동영상으로 감지 못할 생명체의 호흡, 그것이 실제로 주는 느낌. 내 소유로 삼고 길들일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수시로 말을 걸고 다가올까 말까 안녕 손짓하며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여름날 해 질 녘엔 뻐꾸기가 우는데 어디서 우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흰나비들은 잡힐 듯 말 듯 다가와 그냥 가 버리고 그늘 밑 바람은 땀방울 솟은 아이의 머릿결을 만져준다. 새까맣게 그을린 아이의 얼굴은 더욱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쉽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놀이터가 드무니까. 주말이 아닌 날에야 코딱지만 한 아파트 놀이터가 고작이고 그나마도 안전에 취약해서, 미세먼지가 많아서 실내로 들어간다. 아이들이 살아있는 것들을 대할 놀이터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참 슬픈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명목 하에 아이들에게 쉽게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을 쥐어준다. 어쩌면 편안한 육아를 위해 선택하고 소유한 많은 것들이 더 빠르게 아이들의 놀이터를 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무지, 이런 것들은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이들을 위해 사준 놀잇감들이 마당에 놓인 것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햇빛과 비를 맞으며 더 푸르게 생동할 자연과는 달리 이것들은 금방 녹슬고 빛이 바랜다. 우리들의 손쉬운 선택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어떤 즐거움에 익숙해질지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