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의 사람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채 부끄럽기만 하다
동반 휴직을 했다
5년 전, 호기롭게 육아휴직을 선언하던 남편이었다. 어떤 이는 그의 용기를 지지하며 칭찬했고 어떤 이는 오히려 베이비시터를 쓰는 게 낫지 않겠냐고 조언을 했다. 육아의 흐름을 앎에도 쌍둥이 육아는 역시 생소했다. 긴장된 마음이 일었다. 세 개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며 특별한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는 몇 가지의 선택지를 두고 따져 묻기를 반복했다. 남편의 휴직으로 기울어졌다. 같이 휴직을 한다는 것은 가정경제에 어마한 손실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 생각해서였다. 부부가 같이 육아를 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멋졌다. 정작 우리의 삶은 숨 막힐 듯 치열했지만.
최악의 날
어떤 주말이었다. 아직은 이날 이후로 더 심각한 날이 없었으니 생애 최악의 날이라 기억된다. ‘최악’의 미세먼지 경보가 뜬 날이기도 했다. 아이 셋을 데리고 친정에 갔다가 오는 길, 카시트 장착에 칭얼대던 쌍둥이들이 잠잠하더니 세 아들 모두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부터 별거 아닌 일로 서로에게 예민해져 있던 우리는 대화도 없이 집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깼고, 우리는 쌍둥이 중 한 명씩을 안아야 했다. 잠이 덜 깨 칭얼대는 다섯 살 첫째는 어쩔 수 없이 울며 따라왔다. 차분하게 달래면 그만 이었겠으나 울음소리에 극도로 예민해진 남편은 한 명을 안고 달래다 결국 공황 상태가 되어버렸다. 남편은 죽을 듯 소리를 지르더니 그냥 바닥에 쓰러져버렸고 아빠 품에서 떨어진 아이는 다시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징징대는 큰아이는 방치, 내 품에 있던 아기를 내려놓고 우는 아기를 달래니 내려놓은 아기가 다시 울었다. 울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해가 지려는 어둑어둑한 시간이었다. 누구도 거실의 불을 켜지 않았다. 아니, 켤 수 없었다. 남편은 거실에 기절하듯 쓰러져 머리끝까지 이불을 둘러쓰고 잠들어 버렸다. 순간, 네 남자를 두고 나가버리면 어떨까 했다. 세 아들의 울음소리가 귀를 따라 흐르다 마음을 흔들었다. 사랑, 저 반대편의 감정으로 가득한 채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지금 내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우는 아기를 동시에 안고, 업어 달랜 후 차례로 목욕을 시켰다.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히고, 수유했다. 기분이 좋아진 아기를 토닥거려 눕혔지만 한 녀석은 누워서 잘 생각이 없다. 이러다 둘 다 울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어쩔 수 없이 한 녀석에겐 젖을 물린 채, 한 녀석은 다른 한 손으로 토닥거리며 자장가를 불렀다. 제발, 울지 말고 잠들어다오. 다행히, 누웠던 아이가 스르르 잠이 든다. 두 아이를 재우고 거실로 나왔다. 자는 아빠 옆에서 첫째가 동영상을 보며 날 기다리고 있다. 인제 그만 끄자. 부엌으로 데리고 가 김에 싸서 밥을 먹였다. 배가 고팠는지 더 달란다. 아이를 씻기고 같이 누웠다. 아이는 재잘거리다 곧 잠이 든다. 네 남자가 잠든 밤, 나는 그날 몹시 외로웠다.
육아라는 세계
노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육아는 남편에게 정복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전력 질주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해결되면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사람에게 육아는 어울리지 않았다. 계획대로 돌아가는 육아 시간표가 있다면, 어느 구간을 뚝 떼서 맡겨버리겠지만 육아가 감히 그렇던가. 틈만 나면 기저귀를 갈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끝나지 않는 이 과업에 남편은 급기야 휴직 3일 만에 우울증 증세를 호소하며 나가떨어졌다. 결국, 남편은 신경과민 증세를 보이며 힘들어했고 우리는 베이비시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던 시간이 벌써 5년 전이다. 서로가 서로의, 바닥을 보며 아파했던 시간. 이해한다는 말보다 더 잔인했던 우리의 현실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남편은 주위의 누군가가 자기처럼 휴직을 할라치면 잘 생각해보라 권고한다. 하하. 나도 동반 휴직은 말리고 싶다.
그가 쓴 글을 나에게 건넸다
어느 날, 남편이 툭하고 자신의 글을 건넨다. 감동이랄 것도 없이 가슴 한쪽이 아려와 바람처럼 그의 글을 훑었다. 나의 시간에 겹쳐 있는 그의 시간을 생각했다.
내 나이, 만 40세. 이 나이를 지난 많은 형님, 누나들이 그렇겠지만 너무도 순식간에 들어선 것 같아.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다들 소감 한마디씩 던지는 걸 보면, 40세라는 나이가 주는 의미가 큰가 봐. 내 나이 사십,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 기관지에 이게 뭐지?" 호야를 진료한 의사가 동료 의사에게 엑스레이 사진을 보이며 의견을 물었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 재촬영 후, 촬영 각도가 안 좋아서 그렇게 보인 것 같다며 안도하듯 말했지만, 한껏 긴장했던 마음은 어쩌고? 뒤이어 폐렴으로 입원해야겠다고 할 때는 오히려 다행이라 느껴지더라. 잠깐이었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심호흡하며 기다리게 됐던 것은 첫째 때의 기억이 작동했던 것 같아.
"이건 거의 암입니다. 수술 날짜 잡을게요." 쌍둥이를 출산하며 알게 된 폐결절이 거의 암이라는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그 기억은 더욱더 무거웠지. ‘거의’라고 했으니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잖아 하며 스스로 되뇌었다. 하지만 결국 암. 초기 암이라 제거만 하면 괜찮을 거라 안심했지만 죽음까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에 불안하기도 했어. 그러다가 때로는 아주 담담해지기도 하고…. 수술 후 회복실에서 나와 눈을 뜬 당신과 마주쳤을 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와 사진을 찍었네. 그때 무슨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웃었는지 모르겠어. 큰 수술 후 살아 나온 당신을 보며 긴장이 풀려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나 아파하는 당신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서였을까? 잘 모르겠다. 가끔 휴대폰 사진첩을 넘기다 그때 사진이 보일 때면 이제야 펑펑 눈물을 쏟는다. 이 시기에,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지나갔었어. 스스로 이해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게 된 것은 단연 육아휴직이 아니었나 싶다. 아빠 육아휴직에 대한 동경도 있었지만 쉴 새 없이 달려온 나 자신에게 시간을 주고 싶은 게 사실은 선택의 큰 이유였던 것 같아. 그러나 끊임없이 울어대고, 먹이고, 재우는 일상들의 반복이었지. 곧, 자는 것과 깨어있는 순간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지쳐갔어. 특히, 아기의 우는 소리는 이상하리만큼 견디기 힘들었어. 악을 쓰며 울기 시작하면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리에 머리에 쥐가 난 것처럼 찌릿했고, 그 울음이 지속되면 가슴 통증과 함께 솟구치는 분노가 터져 나오곤 했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것이 힘들었어. 정말, 어떻게 살. 아. 야. 무겁게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이제 더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낯설게 보고 싶지 않다.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오물처럼 솟구쳐 올라 밑바닥을 확인하는 자리는 더욱더 싫다. 그 자리는 매번 감당할 때마다 낯설고 두렵고 또 너무 아픈 거야. 다시, 이 연약함의 자리에서 내가 구하고 물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읊조려 보는 거야.
이제는 석양이 어울리는 당신의 배경. 어쩌면 함께 걷는, 내 곁의 ‘한 사람’으로가 아니라 ‘나의 배경’으로 여겼을 어떤 순간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무겁고 혹독했을까. 한 여자의 남편으로, 세 아이의 아빠로 생을 응시하고 있는 당신을 나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가족, 그리고 사랑함에 대하여
가족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어렵다. 특히 남편에 대한 감정은 너무 순식간에 바뀐다. 참 이상한 관계다.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나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고 내 서랍 속에 정리되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다. 대단한 일이 가볍게 넘겨질 때도 있고, 사소한 일로 마음이 어려워질 때도 있다. 그러다가 언제 또 그랬냐는 듯, 말 한마디에 녹아 흘러가는 우리 관계는, 때로 신비롭다고 해야 할까. 끝이 온 듯 맹렬했다가, 때론 비둘기처럼 슬피 울었다가, 어느새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낯을 부빈다. 내 곁의 사람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채 부끄럽기만 하다. 그 오묘한 사랑을,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가족을 통해 처절하게 배워가는 것 같다. 그게 가족을 주신 이유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