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으로 불가능한 관계
벽을 만났다
3월 초, 학년이 발표되었다. 봉투 속에서 반 편성표를 꺼낸다. 나와 1년을 함께 할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학습부진, 한부모. 한 아이의 이름 옆에 이런 낱말이 적혀있다. 한 문장도 안 되는 설명.
경호가 말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운동장에서 처음, 선생님을 보는데 선생님 얼굴에만 빛이 났어요." 줄곧 비딱한 말투와 시선으로 날 경계하던 아이가 곁에서 웃었다. 귀여운 얼굴이라 생각했다. 경호에게 집중하려 했던 마음이 살짝 느슨해지면서 남은 일을 서둘렀다. 아이의 재잘거림에 장단을 맞춰주면서... 경력이 얼마 안 되는 내겐 경호의 무게만큼이나 교실의 환경판을 채우는 일도 버거웠다. 구상도 없이 무조건 가위를 들었다. 초록색 바탕에 알록달록한 꽃이라도 붙여야 할 것 같아서. 빨간색 골판지로 튤립을 오려 붙였다가 다시 떼어버렸다. 마음에 안 들었다. 갑자기 아이가 짜증을 냈다. 꽃이라고 오려놓고 조잡하게 버려지는 종이처럼 화사했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예요? 저 혼자 갈래요." 경호는 교실 문을 발로 툭툭 차기 시작했다. "아, 미안, 가자 가자. 배고프지?" 토요일, 굳이 아이를 보내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차피 집에 가도 반기는 사람 없을 아이에게 시간을 내줄 마음이었다.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주면서 아이의 모난 마음을 달래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아니 그 마음 내게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나의 의도와는 반대로 고집을 부리는 아이. 경호를 그냥 놔뒀으면 괜찮았을까. 나는 억지로 경호를 끌고 가며 실랑이를 하다 결국, 아이를 내치듯 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경호를 걱정하거나, 나를 책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는 가족이 없었다.
그날도 경호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교과서도 없었다. "똑바로 앉아야지. 책 꺼내고, 얼른. 이거 써봐. 모르면 보고라도 적어." 딱딱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반응이 없다. 경호는 5학년임에도 한글을 유창하게 읽지 못하는 부진아였다. "아이 씨." 내 귀를 의심했다. 아이 씨. 아이 씨. 메아리가 된다. 심박수가 빨라졌다. 내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느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경호를 세차게 나무랐다. 아이의 책상을 툭 밀었다. 책상이 넘어지고 서랍 속에 있는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세게 밀려 한 건 아닌데, 속마음이 움찔했다. 아이가 당황했다. 쥐죽은 듯 조용한 교실. 아이의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이내 풀이 죽었다.
뒷날 경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사는 할머니는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노무 손이, 와이리 애를 먹이는지 모르겠습니더." 할머니는 자주 어울리는 동네 형이랑 같이 있을 거라 했다. 학교 근처 공원에서 잘 논다했다. 이튿날도 결석이었다. 공원을 두 시간을 넘게 걸으며 아이를 찾으러 다녔다. 구두를 신은 발이 퉁퉁 부었다. 어스름한 저녁 하늘에 옅은 노을이 깔렸다. 몸도 마음도 어둠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며칠 뒤 경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반가움과 안도감 사이로 쭈뼛쭈뼛 화가 올라왔다.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온 거야. 모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아이는 말이 없었다. 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곧 여름방학. 아이가 걱정되었다. 생각 끝에 경호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결혼 전이었고,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사고뭉치 아이를 돌봐준다니, 아이의 실질 양육자였던 할머니는 고맙다 하셨다. 한여름의 공기만큼 숨 막히는 결정은 아닐까 내심 걱정했지만, 우리의 여름은 의외로 즐거웠다. 경호는 누구보다 고분고분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정해준 규칙대로 거부감 없이 따라왔다. 우리는 텃밭에서 키운 옥수수를 함께 따고, 비지땀을 흘리며 껍질을 벗겼다. 삶은 옥수수를 먹으며 깔깔거리는 아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메뚜기 한마리만 폴짝 거려도 겁을 내는 경호를 놀려먹기도 했다. 가끔 경호를 앉혀놓고 글을 읽히시는 아버지와 배드민턴을 치며 놀아주는 남동생, 끼니마다 밥을 챙겨주시는 어머니 덕에 경호는 우리 가족이 된 것 같았다.
모르는 번호가 떴다. 여보세요. 경호의 엄마라고 했다. 얼마 안 있어 한 남자와 함께 찾아왔다. 아빠가 없다고 들었는데 누굴까. "우리 경호를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신경을 너무 못 썼어요." 곧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경호를 데리고 갈 거라 했다. 경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이는 고개를 떨군 채, 커다란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경호의 엄마가 가고,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아이한테 잘 된 일일까. 경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장난을 치고 있다. 경호와 함께 산책하는 저녁 시간, 개구리 소리는 귓전에 쟁쟁하고 한풀 꺾인 더위에 바람은 서늘했다. "선생님 왼손은 내꺼!" 아이가 내 손을 잡으며 소리쳤다. 비뚤한 앞니가 보이도록 키득키득 웃었다. 개학이 다가왔다. 한 달 이상을 함께 지내던 경호가 집으로 가는 날, 아이의 엄마가 데리러 왔다. 경호가 아빠라고 불러야 할 남자와 함께. 떠나는 차가 점점 작아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경호는 변했다. 교실에서 나가는 일도, 결석하는 일도 없었다. 말썽을 피우지도 않았다. 수업시간에는 없는 아이처럼 앉아있었다. 그게 끝이었다. 아이가 조용해지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여름방학 동안 경호를 돌본 일이 어찌하다 교장 선생님 귀에 들어갔다. 나는 순식간에 페스탈로치가 되어버렸다. 마음이 붕 떴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는 것 같아 좋았다. 어느 날, 맨 뒷자리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살과 함께 그 눈빛이 너무 영롱해서, 빛나는 그 눈빛이 너무 슬퍼보여서 멈칫했다. 나중에 불러서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30명의 아이들이 있는 교실, 나는 다른 일로도 충분히 바빴다. 그렇게 한해가 갔고 나는 다른 도시로 전근을 왔다.
경호를 다시 만난 건, 그 후로 한참이 지나서다. 8년쯤 지났을까. 머리칼이 샛노란 청년이 까만 정장차림으로 나타났다. 친정 동네에 구둣가게를 차렸단다. "잘 지냈니?" 청년이 된 아이는 말이 없다. 팔에 깊은 상처 자국이 있다. "고등학교 때 일진에 들어가서 다른 일진이랑 싸우다 이렇게 됐어요." 굵은 목소리가 덤덤하게 말을 뱉는다. 눈이 계속 아래를 향해 있다. 영롱했던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조용히 밥을 같이 먹었다.
어떻게 여기서 장사를 할 생각을 했을까. 사람도 많지 않은 시골에서, 그것도 여성 구두를 판다니. 아무 전략도 없이 시작했을 사업에 마음만 답답했다. 뭐라도 하나 사줘야 할 것 같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안 그래도 가봤지. 근데 종류도 별로 없고, 뭐, 내가 살만한 게 있어야 말이지. 아가씨들이나 신는 샌들이랑 구두 같은 거밖에 없더라. 촌에서 누가 그런 걸 신노? 그래도 뭐 하나 사보려고 잡으면 치수도 없고. 그렇게 장사해 가지고 월세나 내겠나 싶더라." 다음에 친정 가는 길에 들러 내 거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가게는 비어 있었다. 짜식, 인사라도 하고 가지. 만나도 아무 말 못했을 거면서, 마음이 스산했다.
여전히 존재하는 벽들
교단에 선지 18년이 흘렀다. 2월 말, 학년이 발표된다. 봉투 속에서 반 편성표를 꺼낸다. 나와 1년을 함께 할 아이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다문화. 한 아이의 이름 옆에 이런 낱말이 적혀있다. 한 문장도 안 되는 설명. 저 멀리 성수의 뒷모습이 움직인다. 한쪽 벽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댄 채, 벽을 쓸면서 다니는 아이. 단정치 못한 옷차림과 걸음걸이가 내 눈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고개를 돌리다 나를 발견하고 뛰어 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속옷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 며칠 째 본 밤색 줄무늬. "안녕. 아침 먹었니?"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며 묻는다. "아니요. 너무 일찍 일어나서 못 먹었어요. 어! 지연이 온다!"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를 보고 뛰어가 버린다. 수업시간, 초반에 집중하는가 싶더니 성수의 몸이 꿈틀거린다.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려 얼굴만 보이기도 하고, 엉덩이를 쭉 빼고 엎드려 당장에라도 넘어질 듯 책상에 붙어있다. "바른 자세로 앉아보자." 지나치는 말로 아이를 깨운다. 새까만 눈이 나를 의식하지만 몸은 그대로다. 사인펜으로 칠했는지 온통 새까만 자국이 가득한 책상. 흘러내리는 아이의 몸처럼 연필도, 조각난 지우개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성수가 내게 온다. 나를 불러놓고 말을 안 한다. 보풀이 인 마스크. 새 마스크를 꺼내서 채워준다. 촐랑촐랑 뛰듯 가버린다. 다시 내게 온다. 나를 불러놓고 말을 안 한다. "곧 수업시간이야. 자리에 앉자." 아이는 꿈틀대는 애벌레처럼 또 벽에 붙었다. "선생님! 성수가 자기 자리에 안 가요." 나는 모른 척 수업을 시작한다. 아이는 내 눈치를 보며 뒷문에 기대서 흐느적거린다. "그림에 어울리는 문장을 만들어볼까요? 어떤 그림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세요." 성수를 향해 걸으며 수업을 진행한다. 성수 손을 잡는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선생님이랑 자리에 가보자." 아이가 뻗댄다. "그럼 성수 스스로 자리에 가보자." 기회를 주고 다시 돌아선다.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학급 전체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팔, 다리에 수두룩한 온갖 상처들이 눈에 들어온다. 돌아서는 마음에 와 박힌다. 경력이 늘어나도 여전히 어렵다. 거대한 벽이다. 무모한 사명감으로 혼자서 부수려고 했던 벽의 실재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는 것밖에는, 18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오후에는 아이의 엄마와 상담을 하고 Wee센터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다. 학생 관찰 일지에 성수의 행동을 기록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점. 점. 점. 마치지 못한 마침표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