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방식은 모두 다르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자는 잠에 데려가소. 읊조리던 당신의 소원대로 며칠을 오락가락하시다 자는 듯 돌아가셨다. "내사 아픈 데가 없으니까 개안타. 으이그~ 죽지도 안 하고 하루하루가 지엽다." 얼마 전 설에 찾아뵈었을 때 할머니는 그랬다. 아픈 데가 없어 다행이다 했지만 하루하루가 지겹다는 그 말이 왠지 애처로워, 누군가 오기를 바라듯 한 뼘쯤 열려있던 현관문이 눈에 밟혀 오래도록 먹먹했었다. "엄마 닮아서 아들 인물이 다 좋다. 장가 참 잘 갔다. 우리 정아가 얼마나 착한데. 이런 아 없다." 내 옆에 있는 남편에게 그리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평생 처음 할머니로부터 듣는 칭찬이었다.
95세로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긴 재산은 아무것도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약소하게 치르긴 했지만 고단한 침묵이 떠다니는 빈소는 썰렁했다. 큰 고모와 둘째 고모는 빈소에도 보이지 않았다. 치매 초기라는 작은 고모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작은 삼촌은 네가 벌써 마흔이 되었냐며 술잔을 기울이셨다. 아버지는 조문객들을 맞고 일을 주관하시느라 바쁘셨다. 가족조차 울지 않는 그 자리에서 나는 계속 할머니 생각이 났다. 당신이 드시고 싶어 장만하시던 호박죽과 장어국, 약재가 들어간 식혜 냄새가 났다. 언제나 면박을 주면서도 내게 일을 시키시던 할머니, 할머니 주름에 고인 파운데이션, 지난 장날에 봤던 빨간 구두가 참 새첩던데 하시던 아쉬운 말투. 증손자가 갖고 놀고 싶다고 해도 안 된다했던 장식장의 작은 강아지 인형. 가끔씩 아이들 주라며 건네시던 검은 봉지.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눅눅한 강냉이와 땅콩 캐러멜. 끝까지 자기밖에 모르는 애 같은 분이라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나는 할머니가 자신을 챙기고 사랑했던 것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남은 이들의 일상이 온전한 이유는 남은 이들에게 아무런 짐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할머니는 오빠만 좋아하셨다
엄마는 볼일이 있을 때면 우리를 자주 할머니 집에 맡겼다. 할머니는 옆에서 걸리적거리는 우리가 성가신지 언제나 파리 쫓듯 대문 밖으로 몰았다. 그러면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곤 했다. 지금이야 높은 빌딩과 아파트가 솟아 골목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지만 내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마주 선 그 길이 곧 골목이었고, 담벼락 아래가 놀이터였다.
그날도 그랬다. 무슨 놀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역동적이던 골목은 내가 울면서 조용해졌다. 누가 울면 놀이는 뚝하고 종료되곤 했다. 내 등을 토닥여주고 떠나는 친구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할머니 집 대문을 열었다. 내 뒤로 동생이 우물쭈물, 오빠는 툴툴거리며 뒤따라왔다. 내가 우는 게 못마땅했음이리라. "아이, 진짜! 재미없게 하네. 아, 더워." 오빠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마당 우물가로 갔다. 우물가에는 할머니가 비지땀을 흘리며 빨래를 하고 계셨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스으, 스으' 소리를 내며... 우리의 인기척에 돌아보시던 할머니는 다가오는 손주들 중 오빠를 보시고 다른 날보다 더 반가우신 듯 얼굴이 환해지셨다.
"아이고 우리 한이 왔나. 자, 자! 물 퍼줄게." 할머니는 대야에 정성스레 물을 퍼 주시고는 오빠가 세수하는 동안 치마를 들쳐 줌치를 꺼내셨다. 행여 우리가 볼까, 반쯤 돌아선 상태로 말이다. 부산했던 과정 끝에 오빠 손에 쥐여 준 건 바로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 100원이면 야구공 풍선껌이 다섯 개였고 새우깡 한 봉지가 100원이었으니까 1,000원은 우리에게 정말 큰돈이었다. "배고프제, 가서 맛있는 거 사무라." 옆에서 콧물을 훌쩍거리며 섰던 나는 눈이 커졌다. 언제나 역정스럽게 우리를 대하시던 할머니가 용돈을 주시다니! 명절이 아니고서야 할머니의 용돈을 받는 일은 없었다. 다음은 당연히 내 차례였다. 나는 얼른 할머니에게 다가가 기분 좋게 손을 벌렸다. 오빠가 소리를 지르며 슈퍼로 뛰어가 버린 뒤였다. 할머니는 허리춤에서 줌치를 묶어 넣으시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없다. 없다. 흐흐흐." 할머니는 고개를 뒤로 젖혀 이가 다 보이도록 웃으시며 손사래를 치셨다. 할머니가 이렇게 웃으시는 건 처음 봤으나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오히려 앞선 모든 일이 할머니 때문인 것처럼 화가 났다.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내가 안 됐던지 할머니는 다시 치마를 들어 올리셨다. 이번에도 몸을 뒤로 돌린 채였다. 동전 소리가 들렸다. "자, 옜다!" 할머니는 인심 쓰듯 동전을 건네셨다. 쥐여 준 동전 개수가 많아 살짝 흥분한 나는 얼른 손바닥을 확인했다. 50원짜리 3개와 10원짜리 5개였다. 그러니까, 모두 200원. 잠깐 망설여졌다. 너무 오래 기다렸고 너무 많이 기대했다. 나는 불끈 화가 나 동전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8개의 동전이 쨍강쨍강 바닥에 부딪혔다. 그것들은 이리저리 구르다 제각각 다른 곳에 흩어져 멈췄다. "이 가시나가! 얼른 비키라!" 할머니는 두툼한 손바닥으로 내 뺨을 찰싹 때리고는 다 못한 자기 일에 퍼질고 앉으셨다. 동생이 부리나케 달려가 떨어진 동전들을 줍기 시작했다.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속으로는 동생에게 고마웠다. 적어도 달콤한 땅콩 캐러멜 10개는 살 수 있을 테니까...
할머니에게 오빠는 특별했다. 두 번째로 태어난 내가 딸이라 서운했다는 건 그렇다 치고 세 번째로 태어난 남동생도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이 그걸 말해줬다. 밥상 위에는 할머니가 드시는 풋고추 몇 개와 마른 멸치 한 움큼, 종일 탕탕 두드리고 찢던 황태 채가 빨간 양념에 무쳐 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 오빠의 앞 접시에는 계란 프라이가 놓였다. 간혹 동생과 나에게도 계란 프라이가 허락되었지만 오빠의 것과는 달랐다. 터지지 않은 노른자는 황금빛으로 빛났고 우리가 넘볼 수 없다는 듯 다른 접시에 담겨 나왔다. 우리 것이 한 개면 오빠 것이 두 개였다. 할머니의 두꺼운 손과 모진 말투가 무서워 우린 투정 없이 밥을 먹었다. 입안에서 거칠게 맴도는 황태 채를 씹다 보면 불쑥불쑥 가시가 튀어나왔는데 그게 꼭 내 맘 같았다. 어느 부분에만 맛소금이 잔뜩 뿌려진 계란 프라이를 먹고는 허겁지겁 맨밥을 입안에 퍼 넣기도 했다. 서운했다. 할머니가 싫었다. 그게 내 어릴 적 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할머니와의 동거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하셨다. 남는 방이 없으니 나랑 같이 써야 한다고 하셨다. 할머니에 대한 쓴 기억들이 올라와 싫은 티를 냈지만, 어쩔 수 없이 할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자리에 대한 애착이 심했다. "이거는 내 자부동(방석)이다. 여기 앉지 마라." 분명 내가 갖다 놓은 방석인데도, 할머니가 쓰기 시작하면 할머니 것이 되었다. 심지어 공공버스 좌석마저도. 할머니는 큰 덩치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무작정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직성이 풀렸다. 할머니의 그런 행동 때문에 아버지는 웬만하면 어디에 할머니를 모시고 다니기 싫어하셨지만, 오빠의 졸업식 때는 어림없었다. 누구보다 들뜬 할머니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당당히 내빈석 의자에 앉으셨다나. 먼저 오신 담당 교사가 여기는 내빈석이니 학부모들이 서 있는 쪽으로 가셔야 한다고 했을 때는 강당 안이 울릴 정도의 목소리로 "한이가 우리 손자요! 한이가 우리 손자요!" 하셨다고 했다. 물론 오빠는 할머니가 자랑할 만큼 훌륭한 우등생이었지만, 붉어지는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고 했다. 일방적이기까지 한 할머니의 애정은 상대방을 더욱 냉랭하게 만들었으나 할머니는 그것조차 상관이 없는 눈치였다.
할머니와의 동거는 예상외로 편했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별로 관심 없는 할머니의 성격 덕분이었다. 할머니가 가져온 물건이라곤 옷장 하나와 TV밖에 없었는데도 방은 점점 할머니의 냄새로 가득 찼다. 곧, 할머니 방에 내가 얹혀사는 꼴이 되었다. 할머니가 하는 일은 주로 TV를 보는 일이었다. 물론 초저녁부터 그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이 허다했지만, TV를 껐다가 몇 번 타박을 받은 이후로는 그냥 두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 곁에서 친구에게 빌린 하이틴 체험 수기 같은 걸 읽거나 펜 벗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그날도 책상에 앉아 뭔가를 긁적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TV를 보시던 할머니가 내 눈앞으로 종이와 볼펜을 내밀었다. "저 노래 가사 좀 적어조라." TV 화면에는 할머니가 즐겨보시는 사극 드라마의 주제곡이 자막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찮긴 했으나 얼른 가사를 적어드렸다. 내가 적은 가사를 받은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늘고 뾰족한 음색이지만 제법 잘 따라 부르셨다. 내가 감탄을 표하자마자 할머니는 숨겨뒀던 간식 바구니에서 오징어 다리 하나를 쭉 뜯어 내밀었다. 이가 튼튼하신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가끔 마주치는 오빠한테도 하나씩 건네셨으리라. 할머니와 나는 오징어 다리를 뜯으며 그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얼굴에 소녀 같은 웃음이 번졌다. "우와~ 할머니 이렇게 노래 잘 부르는지 몰랐네요." 내 한마디에 할머니는 우쭐대는 아이처럼 볼이 부풀어 옛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내, 일본말도 할 줄 안다. 지금은 다 까묵었지만. 아빠는 오또상이고, 엄마는 오마상이고, 할아버지는 오지상이고. 그때는 소학교에서 다 일본말로 했는데... "
할머니가 떠나셨다
할머니가 작은 빌라로 이사를 가신 건 막내 삼촌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였다. 물 묻은 손을 훔치며 전화 한 통을 받으시고 나가신 할머니는 내게 인사도 없이 떠나셨다. "까마귀가 울더마, 아침부터 까마귀가 울더마" 그 말을 반복하시며 허둥지둥 나가셨다. 며칠 후,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내 방에는 할머니의 옷장과 TV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로 할머니는 삼촌의 사망 보험금으로 얻은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사셨다. 가끔 나는 할머니 집에 가서 말동무가 되어 주곤 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지나가면 수군거렸다. 자식 죽어 얻은 돈으로 좋은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하고 싶은 거 다해서 저렇게 건강하다고, 아들 먼저 보내고도 세상 편하게 사는 할머니라고 했다. 한겨울에 비지땀을 흘리며 밍크코트를 입고 지나가는 할머니를 보면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할머니가 오랫동안 갖고 싶어 얻은 단 한벌의 코트였고, 누가 만질세라 보자기에 고이 싸서 지키던 것이었음에도.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 할머니도 성실하게 늙어가셨다. 물론 여전히 튼튼한 이와 곧은 허리를 자랑했지만 한번 넘어져 고관절 수술을 하고 난 후로는 걸음이 느려졌다. 그러던 할머니가 한번 더 넘어진 후로는 아예 일어나지를 못하셨다. 늘 당신의 자리를 고집하던 할머니는 죽음마저 자신의 것인 양 단번에 삶을 정리하셨다. 누운 지 며칠 만에 자식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하시며 아버지는 말끝을 흐리셨다. 아버지 앞에서만은 늘 혼나는 아이 같던 할머니였는데 그날은 아버지가 주눅 든 아이 같았다. 할머니 물건을 정리하시던 아버지 손에 어릴 적 아버지와 젊은 할머니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