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보인다

엄마가 되고 나서 보이는 것들

by 꿈꾸는 momo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가 보인다

친정엄마가 싸 주신 곰국을 데워 먹었다. 뭐든 부지런히 먹지 않으면 싸 주신 반찬들이 고스란히 음식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마련이라 조금은 부산을 떨어 저녁상을 차렸다. 김치가 매워서 물을 마시고 싶다, 밥을 먹다 흘렸다, 곰국에는 곰이 들어가느냐, 밥을 먹으면서도 재자대는 세 아들과의 저녁 식사는 정신이 없다. 아직 외식은 어렵다.

"반찬은 다 먹었나? 너무 힘들면 금요일에 짐 싸서 애들 데리고 와. 이 서방도 좀 쉬고." 사위 핑계를 대며 딸을 쉬게 하고 싶은 엄마는 오늘도 내 안부만 물으신다. 가끔은 팔다리가 쑤신다느니, 올해 농사는 줄여야겠다느니 하는 예사로운 투정을 딸한테라도 하면 좋으련만, 엄마는 항상 이런 식이다. 엄마 앞에서 힘들다는 넋두리를 하면 돌아올 대답은 뻔하기에 통화는 늘 짧다. 조금만 더 인내하자고, 그래도 감사하자고 하는 성경 같은 답을 이야기하실 게 뻔하다. 내가 아니어도 엄마는 충분히 바쁘고 피곤하다. 간다 만다 대답을 망설인다. 그러다 금요일이 되면 또 짐을 싸고 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자주, 엄마 생각이 난다. 아픈 아이의 이마를 짚어가며 잠을 설치는 밤에도, 남편에게 맘 상해서 잠 못 드는 밤에도, 집안일과 아이들을 챙기다 와락 몰려드는 피로에도 문득문득 엄마가 떠오르며 목이 멘다. 어쩌면 내가 몰랐던 엄마가 그때,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말이다.


엄마의 가게

일곱 살쯤 되었으려나, 엄마는 삼촌 사업장 구석에 내 키만 한 진열장 하나만 달랑 들여놓고 노리개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셨다. 장롱 문고리나 한복 장식이 되는 소품이었다. 보들보들한 비단천과 매듭을 엮는 화려한 실들은 엄마의 손에서 가지각색의 노리개로 태어나곤 했다. 사무용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회색 공간에 알록달록한 노리개들이 진열된 모습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어색한 풍경이다. 이내 심심할 걸 알면서도 난 언제나 고집스레 엄마를 따라나섰다. 온종일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는 엄마 옆에서 하릴없이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끝에 달린 술이 살랑거리며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좋았다. 하루 종일 있어도 손님은 드물었다. 지는 해가 점포 안까지 깊숙이 들어오면 엄마는 보따리 장사처럼, 가지고 온 노리개를 싹 쓸어 담았다. 어느 날부터 엄마 손에서는 노리개가 아닌 뜨개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곧 멋진 옷이 완성됐다. 가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엄마는 약속된 날짜 안에 옷을 짜느라 밤낮없이 뜨개질을 해야 했다. 대바늘로 코를 잡고 나면 직선이던 실이 촘촘히 짜여 면을 이루고 앞판, 뒤판, 양쪽 소매가 완성된다. 그것을 돗바늘로 꿰매 마무리하면 끝이다. "엄마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나도 좀 가르쳐줘요." 옷이 만들어지는 게 하도 신기해서 대바늘로 흉내를 낼라치면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이런 거 안 배워도 된다." 엄마는 새로 나온 실로 옷을 짜거나 새로운 무늬를 선보일 때면 항상 내게 맞는 옷을 짜 입혀주셨다. 그러면 동네 아줌마들은 나를 불러 세워 이리저리 구경을 하기도 했고 당장 주문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했던 가게가 점점 커졌다. 뜨개질을 배우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엄마가 바쁘셨기에 집안은 언제나 어수선했다. 어린 눈에도 엄마의 살림 솜씨는 꽝이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뒤죽박죽 섞인 옷, 잠시 머물다 갈 것처럼 아무데고 툭툭 자리 잡은 세간살이. 어디서 얻었거나 주워온 물건들은 구색도 맞지 않게 방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끼니때가 되면 엄마는 잠시 내게 가게를 맡기고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셨다. 밥상을 차리고 나면 곧 밥상을 정리해야 했다. 싱크대 앞에 서 계시던 엄마는 어떤 표정이셨을까. 온 방이 지걱지걱 하다며 엎드려 걸레질하시고 항상 침을 퉤 뱉어 마지막을 훑으시던 엄마. 다섯 식구가 누울 자리를 깔아주실 때까지 엄마는 한시도 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아이들의 엄마가 보인다

민서 어머니의 병을 안 것은 3월 첫 통화 때다. 씩씩한 목소리에서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졌다. "선생님, 사실 제가 유방암 판정을 얼마 전에 받고 곧 치료에 들어가는데요, 우리 민서를 잘 챙기지 못할 것 같아서 미리 말씀을 드려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긴 터널 앞에 선 민서 어머니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나는 내 이야기를 잠시 했다. 민서 어머니는 그 이야기만으로 용기가 난다 했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그분의 시간이 마음에 쓰였다. 온라인 개학, EBS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학습 꾸러미를 보내고 과제와 출석을 검사하는데 민서는 빠질 때가 많았다. 민서 어머니, 좀 어떠신지요. 몸도 힘드신데 민서는 학교에 보내주세요. 통화가 어려울지도 몰라 문자를 보내면, 뒤늦게 답이 오곤 했다. 아이들이 곁에 있어 힘을 낸다고, 혼자 있으면 더 힘들 것 같다고, 씩씩하게 견디고 있다가도 선생님 문자를 보면 갑자기 뭉클해서 눈물이 많이 난다고.

등교 개학이 시작되었다. 민서는 참 해맑았다. 아이가 있어 힘이 난다는 어머니의 말이 이해되었다. 어느 날 민서가 쓴 글을 읽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오늘은 엄마가 새벽 일찍 병원에 가서 엄마가 없다. 형이랑 같이 햄버거를 먹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햄버거가 맛이 없다.'

어떻게라도 한번 뵙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친정아버지께서 키운 칠면조 알이라도 전해 드리려고 하니 컨디션이 괜찮은 날이라 굳이 오시겠단다. 수업을 마치고 민서와 같이 나서는 길, 교문 앞에 모자를 눌러쓴 분이 보였다. 항암 때문이겠지. 멀찌감치 보며 걷는데도 마음이 먹먹했다. 민서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시울을 붉히셨다. 내 손에 있던 것을 건네고 나서도 한참이나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토닥토닥 손만 잡아주었다. 민서는 엄마가 왔다고 폴짝 뛴다. 학원 안 가고 엄마랑 바로 집에 가고 싶다 한다. 민서 어머니는 그러자고 한다. 감사의 말로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고 민서 어머니와 민서는 교문을 나섰다. 나는 한참 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아이의 주변 상황은 생각지 않고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경계도 없었다. 마음이 쓰이는 아이들에게 간이며 쓸개까지 내줄 것 같은 열심으로 달렸다. 아침밥을 못 먹고 온다는 아이의 야윈 얼굴이 안쓰러워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가서 빈 교실에서 먹이기도 하고 옷을 사다 주기도 했다. 대부분 한부모 가정인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결핍을 결핍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내가 해결해 줄 것처럼 달려들었던 것이다. 오지랖이 태평양처럼 넓어 경계가 없었더랬지. 그러다 오해가 생겨 아이의 양육자가 불길처럼 날뛰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께 너무 죄송스럽다.

아이들은 자란다. 지금 당장의 어려움과 결핍을 '당장' 해결할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 그저 그 자리에서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아 주는 일, 그러면서 한 마디 따뜻한 말로 아이의 마음을 토닥거려주는 일로도 충분하다는 걸 나는 참 늦게야 깨닫는다. 아이 스스로 알에서 나오도록 '곁'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어른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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