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다른 존재
에어컨을 켜지 않은지 딱 나흘째다. 새벽에도 바깥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문을 꼭 닫아야 할 만큼 갑자기 계절이 달라진다. 더운 것도 모르고 놀던 세 아들은 볕에 새까맣게 그을려 옷을 벗기면 하얀 피부 옷을 따로 입고 있는 것 같다. 세상모르고 뛰어다니는 둥이들의 무릎은 상처가 아물 날 없고 모기에 물린 자국들로 여름의 흔적을 새겨두었다. 시절이 지나가니 또 한 뼘 쑥 자라 있다.
둥이들은 여전히 방심하기 무서운 개구쟁이들이지만 자기만의 논리로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작은 간식 하나라도 동생들 주려고 챙기는 첫째의 의젓함을 통해서도 시간을 느낀다. 언제 이렇게 커 버렸지?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다 기억될 날들. 아이들이 손 벌리고 다가올 때면 무거운 것도 모르고 그냥 꼭 안아준다. 안아줄 수 있을 때 더 많이 안아주고 싶어서...
하나였을 때는 몰랐다
하나였을 때는 몰랐다. 아이의 성장이 내 노력의 결실인 냥 흐뭇해하거나 자책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기에 모든 것이 어려웠다. 잠, 이유식, 단유, 기저귀 떼기 등 매번 새로운 과제에 부딪힐 때마다 한 고비 넘듯 애가 쓰이고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녹아 없어질 얼음을 힘겹게 떼내려 하던 내 마음이 지금에야 안쓰럽다. 어쩌면 첫째였기에 당연했던 그 마음과 노력들은 첫째만이 받을 수 있는 엄마의 선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둥이들은 그냥 자연스럽다. 내가 다 해 줄 수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게 되는 것도 많아진다. 엄마에게 동시에 달라붙던 아이들은 어느새 아빠에게 손을 벌리기도 하고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배만 부르고 잠만 잘 자고 나면 엄마가 없어도 알아서 잘 노는 아이들이 기특하다가도 오롯이 내 품 안에 들어와 달래지지 않는 아이들의 고집이 버겁기도 하다. 모든 사건의 종점이 '엄마'라는 존재 하나로 해결되는 첫째 아이와는 다른, 그 무언가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싸우면서도 같은 방향을 걷는 둥이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줄 것을 안다.
아들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아들 셋 키우는 내가 불쌍하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웃어넘기지만 뭐, 소용을 위해 키우나. 아이들이 커서 내게 뭔가를 보답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 이 순간 내게 주는 행복이 충분하다.
어쩜 이렇게 다를까
남편이 일부러 높은 밧줄 구조물에 올라가 못 내려오는 척을 했다. "아, 큰일 났다. 이까지 올라는 왔는데 내려가지를 못하겠어!" 외쳤다. 첫째는 아빠를 올려다보며 발을 동동 구른다. "아빠, 어떡해요! 조심조심!" 아빠가 내려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린다. 둘째는 아빠가 어찌 되었건 안중에도 없다. 밧줄 탐험에 열심이다. 셋째는 아빠를 한번 쓱 올려다보며 조언한다. "아빠! 한쪽 다리를 먼저 내려서 밧줄을 짚고 내려오는 거야! 한번 해봐!" 명쾌한 말을 던지고 하던 놀이를 한다. 어쩜 이렇게 다를까. 20개월이 되도록 신발 신기를 거부했던 쌍둥이를 생각하면 정답이 있는 육아는 없는 것 같다.
세 아들을 키우는 것도 이런데 내가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얼마나 다양한가! 아이들이 처한 환경과 기질이 다르니 그 경우의 수는 수십 배로 늘어난다. 그래서 때론 어렵고 지친다. 방법을 알지 못해 노심초사하고 실패감에 마음이 납작해지기도 한다. 아이들이 수행한 과제의 결과물이나 행동으로 가르침을 평가당하는 현실에 의욕이 상실되기도 한다. 가르치는 공간 안에서 모두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자연스러운 교육이 존중받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 적어도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만은 각자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교실이 되길. 답이 없어 어려울 때도 있지만 답이 없어 신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