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봄, 이른 봄
넣었던 패딩점퍼를 다시 꺼내 입고 아이와 등원 버스를 기다린다. 아파트 화단에 어제보다 많이 피어있는 산수유 꽃은 시샘 많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 판이다.
이런 봄, 이른 봄.
숨죽여 있는 생명들이 다시 움트는 시절이기도 하지만 연약한 생명은 꺾이는 시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무렵 갑자기 세상을 뜨는 노인들이 많다지. 움츠렸다 피어날 에너지를 얻지 못하고 이른 봄의 종잡을 수 없는 기온이 온몸의 순환을 흩트려 놓는지도...
엄마, 그런데 나는 언제 늙어요?
갑작스러운 아이의 질문에 웃다가 글쎄, 잠시 서글퍼진다.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어가는 건 아닐까 하고. 언젠지 알지 못할, 각자의 예고된 죽음을 외면하며 꺼이꺼이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거리는 건 아닌가, 좀 제대로, 의미 있게 살아야겠단, 뭐 그런 생각들이 스치면서.
봄. 언제부턴가 봄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설레던 청춘이 지나가 버려서도 아니고, 봄 풍경이 질려서도 아니고, 봄이 오는 즈음에 아지랑이 흐물거리듯 쳐지는 몸의 반응들이 힘들다. 따뜻함과 서늘함을 오가는 봄의 기온에 재채기와 인후통, 지끈거리는 두통이나 나른함, 그런 잡다한 증상들이 봄 나들이를 두렵게 만든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칠 때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을 그냥, 안에서 바라만 보고 싶다. 굳이 나가고 싶지 않다. 이런 게 늙어간다는 증거일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봄의 선율들은 때로 수줍은 청춘남녀를 위한 배경음악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구보다도 가볍고 화사해진 모습으로 봄을 맞으러 나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상태가 속상하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어쩌면 누군가에도 이 봄은 그렇지 않을까. 아직은 화사한 꽃만큼 화사하게 웃어줄 여유가 없는, 시린 계절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에게 봄이니 나가자고 무작정 손 잡아 끄는 건 오히려 가혹할 수 있겠다 싶다. 그저 좀 더 당신을 따뜻하게 돌보아 다시 돌아올 봄에는 함께 가보자 하면 기운이 날까 짐작도 해본다.
각자의 계절을 이해하고 기다려줄 만큼 세월을 겪어야 늙은 것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직도 아이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