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by 꿈꾸는 momo

많이 옛날스러운 드라마에서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코피를 쏟는 장면이 꽤 있었던 거 같은데, 코피라곤 흘려본 적이 없는 나는 왠지 그 장면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수학의 정석(定石) 같은 두꺼운 책을 펴놓고 사각거리는 샤프펜슬을 끄적여가며 문제를 풀고 있다가 책 위로 한 두 방울 코피가 떨어지는 거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휴지로 코를 감싸며 자리를 일어서는 모습으로 열공모드의 수고로움을 자타에게 확인받고 싶었다.


정작 코피를 흘린 건 딱 한 번, 새벽녘에 뜨겁고 비릿한 것이 베개를 적셔서 깼다. 고2 때였다. 공부 때문에 피곤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괜히 나 자신을 위로하며 평소보다 더 진하게 매점을 이용했더랬다.

엄마, 아빠 단어 다음으로 피 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코피라는 것을 사나흘에 한 번씩 흘리는 아가들이 우리 집에 있다. 아니, 가끔씩이지만 한 번 쏟으면 30분 남짓 흘리는 첫째를 포함하면 세 녀석이 모두 코피 대장이다. 한두 방울 흘리다 마는, 티슈 한 장으로 쓱 닦으면 되는 그런 코피가 아니라 이불을 흥건히 적시는 어마 무시한 코피다. 빨리 세탁하지 않고 방치된 핏자국은 영원한 흔적을 남기고...


이 정도 되면 코피 앞에서 제법 무덤덤해질 법한데도 울음과 함께 시작되는 아이들의 코피는 여전히 날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또 코피야

멎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코피가 사정없이 흐르는 순간에 몸을 비틀며 울어대는 아이를 지켜보는 것은, 장루를 교체하는 시간 동안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아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순간의 감정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코피 이 딴 게 말이다. 이렇게 가벼운 일이 왜 이렇게 가볍지 않은지...


어쩌면, 훌쩍여도 줄줄 흐르는 비릿한 액체가 입안으로, 바닥으로, 엄마 옷으로 벌겋게 번지는 것을 쳐다보며 우는 아이에게 엄마라는 이름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휴지로 흐르는 피를 닦거나 지혈하는 정도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려 혈관이 약해서 그렇다니 코피에 좋다는 연근을 먹이거나 코 안에 연고 같은 걸 발라주는 것 외에는 능력 밖의 일이다.


사람마다 예민함의 정도에 따라 감정의 보폭도 다를 수 있겠지만 소위 '가벼운' 일인 듯 보이는 어떤 이의 고통은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이 떠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고통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고통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듯이...

굳이 내가 느끼는 난감함을 설명하거나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전혀 없지만 혹여 다른 이가 느끼고 있을 고통의 무게를 내가 재어보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 싶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너무 쉽게 말을 걸진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다. 혹은 나의 고통을 남의 고통과 비교하며 나를 자책하거나, 반대로 안심하지는 않았는지...

코피라는 가벼운 일에 가볍지 않은 시선을 던져보는 밤이다. 오늘 밤도 둥이들이 돌아가며 코피다. 다행히 이불 하나와 내 옷 하나만 세탁기에 들어가는 가벼운? 코피로 끝났지만 이 밤, 어떤 고통으로 난감해하고 있는 어떤 이들의 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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