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풍경
틀어놓은 TV에 다 같이 생각 없는 시선을 던져놓고 끊임없이 앞에 있는 음식을 입으로 끌어오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접시에 담긴 음식들이 보이면 깨끗이 비워야 할 것 같은 의무감까지 들게 만드니 아무것도 안 먹고 싶다고 말해놓고도 어느새 주섬주섬 손이 간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형과 누나들 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제 곧 중학생이 될 조카는 구석 모퉁이에 앉아 아무 데도 끼지 않고 폰만 보고 있다. 이어폰을 꽂은 채. 그 나이 때쯤이면 다 그런 거지 하지만 부모인 입장에선 또 한 마디 잔소리 같은 말이 지나가고 아이의 입에선 전에 없는 퉁명스러운 말대꾸가 튀어나온다. 그래도 마음을 풀고 넘어가게 되는 날, 명절이다.
말끔하게 씻고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힌 후 세배를 준비한다. 불편한지 다시 벗겨달라는 둥이들과 잠깐 실랑이를 벌이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어느새 새로운 놀 거리로 쏠린다. 각이 잡힌 옷이 틀어지건 말건 폴짝거리는 아이들을 줄 세우고 세배를 한다. 엉덩이를 치켜들고 머리를 숙이는 꼬맹이와 넙죽 배를 깔고 엎드리는 꼬맹이의 세배로 다 같이 웃는다. 노랗거나 푸른 지폐가 아이들의 손에 쥐어지고 돈을 모르는 둥이들은 할머니 말을 따라 지폐를 흔들며 엄마에게 주러 온다.
별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의 숨과 체온과 움직임으로 따뜻하거나 갑갑하거나 하는 날이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어느 집의 아픈 아이에게로 갔다가 가족여행 계획으로 갔다가 어른들의 서툰 기기 처리로 옮겨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들과 사위는 폰 요금제를 바꾸거나 손쉬운 뱅킹서비서를 가르쳐주고 며느리나 딸은 쌓인 설거지를 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언제나 아이들 이야기로 끝나지만.
또 다른 가족을 만나러 헤어지는 길은 아쉽다. 하지만 또 다른 만남이 있기에 금방 다시 설레는 아이들.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가 뒤섞인 가족들의 만남은 어머니가 꺼내놓은 침구들 마냥 수북하고 푹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