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자리

그저 바람처럼 지나가 버린 한 인생의 쓸쓸함

by 꿈꾸는 momo


엄마는 볼일이 있을 때면 우리를 자주 할머니 집에 맡겼다. 할머니는 옆에서 걸리적거리는 우리가 성가신지 언제나 파리 쫓듯 대문 밖으로 몰았다. 그러면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지금이야 높은 빌딩과 아파트가 솟아 골목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지만 내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마주 선 그 길이 곧 골목이었고, 담벼락 아래가 놀이터였다.

그날도 그랬다. 무슨 놀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역동적이던 골목은 내가 울면서 조용해졌다. 누가 울면 놀이는 뚝하고 종료되곤 했다. 내 등을 토닥여주고 떠나는 친구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할머니 집 대문을 열었다. 내 뒤로 동생이 우물쭈물, 오빠는 툴툴거리며 뒤따라왔다. 내가 우는 게 못마땅했음이리라. 아이, 진짜! 재미없게 하네. 아, 더워. 오빠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마당 우물가로 갔다. 우물가에는 할머니가 비지땀을 흘리며 빨래를 하고 계셨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스으, 스으' 소리를 내며... 우리의 인기척에 돌아보시던 할머니는 다가오는 손주들 중 오빠를 보시고 다른 날보다 더 반가우신 듯 얼굴이 환해지셨다.

아이고 우리 한이 왔나. 자, 자 물 퍼줄게. 할머니는 대야에 정성스레 물을 퍼 주시고는 오빠가 세수하는 동안 치마를 들쳐 줌치를 꺼내셨다. 행여 우리가 볼까, 반쯤 돌아선 상태로 말이다. 부산했던 과정 끝에 오빠 손에 쥐여 준 건 바로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 100원이면 야구공 풍선껌이 다섯 개였고 새우깡 한 봉지가 100원이었으니까 1,000원은 우리에게 정말 큰돈이었다. 배고프제, 가서 맛있는 거 사무라. 옆에서 콧물을 훌쩍거리며 섰던 나는 눈이 커졌다. 언제나 역정스럽게 우리를 대하시던 할머니가 용돈을 주시다니! 명절이 아니고서야 할머니의 용돈을 받는 일은 없었다. 다음은 당연히 내 차례였다. 나는 얼른 할머니에게 다가가 기분 좋게 손을 벌렸다. 오빠가 소리를 지르며 슈퍼로 뛰어가 버린 뒤였다. 할머니는 허리춤에서 줌치를 묶어 넣으시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없다. 없다. 흐흐흐. 할머니는 고개를 뒤로 젖혀 이가 다 보이도록 웃으시며 손사래를 치셨다. 할머니가 이렇게 웃으시는 건 처음 봤으나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오히려 앞선 모든 일이 할머니 때문인 것처럼 화가 났다.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내가 안 됐던지 할머니는 다시 치마를 들어 올리셨다. 이번에도 몸을 뒤로 돌린 채였다. 동전 소리가 들렸다. 자, 옜다! 할머니는 인심 쓰듯 동전을 건네셨다. 쥐여 준 동전 개수가 많아 살짝 흥분한 나는 얼른 손바닥을 확인했다. 50원짜리 3개와 10원짜리 5개였다. 그러니까, 모두 200원. 잠깐 망설여졌다. 너무 오래 기다렸고 너무 많이 기대했다. 나는 불끈 화가나 동전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8개의 동전이 쨍강쨍강 바닥에 부딪혔다. 그것들은 이리저리 구르다 제각각 다른 곳에 흩어져 멈췄다. 이 가시나가! 얼른 비키라! 할머니는 두툼한 손바닥으로 내 뺨을 찰싹 때리고는 다 못한 자기 일에 퍼질고 앉으셨다. 동생이 부리나케 달려가 떨어진 동전들을 줍기 시작했다.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속으로는 동생에게 고마웠다. 적어도 달콤한 땅콩 캐러멜 10개는 살 수 있을 테니까...


할머니에게 오빠는 특별했다. 두 번째로 태어난 내가 딸이라 서운했다는 건 그렇다 치고 세 번째로 태어난 남동생도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이 그걸 말해줬다. 밥상 위에는 할머니가 드시는 풋고추 몇 개와 마른 멸치 한 움큼, 종일 탕탕 두드리고 찢던 황태 채가 빨간 양념에 무쳐 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 오빠의 앞 접시에는 계란 프라이가 놓였다. 간혹 동생과 나에게도 계란 프라이가 허락되었지만, 오빠의 것과는 달랐다. 터지지 않은 노른자는 황금빛으로 빛났고 우리가 넘볼 수 없다는 듯 다른 접시에 담겨 나왔다. 우리 것이 한 개면 오빠 것이 두 개였다. 할머니의 두꺼운 손과 모진 말투가 무서워 우린 투정 없이 밥을 먹었다. 입안에서 거칠게 맴도는 황태 채를 씹다 보면 불쑥불쑥 가시가 튀어나왔는데 그게 꼭 내 맘 같았다. 어느 부분에만 맛소금이 잔뜩 뿌려진 계란 프라이를 먹고는 허겁지겁 맨밥을 입안에 퍼 넣기도 했다. 서운했다. 할머니가 싫었다. 그게 내 어릴 적 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하셨다. 남는 방이 없으니 나랑 같이 써야 한다고 하셨다. 할머니에 대한 쓴 기억들이 올라와 싫은 티를 냈지만, 어쩔 수 없이 할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자리에 대한 애착이 심했다. 이거는 내 자부동(방석)이다. 여기 앉지 마라. 분명 내가 갖다 놓은 방석인데도, 할머니가 쓰기 시작하면 할머니 것이 되었다. 심지어 공공버스 좌석마저도. 할머니는 큰 덩치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무작정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직성이 풀렸다. 할머니의 그런 행동 때문에 아버지는 웬만하면 어디에 할머니를 모시고 다니기 싫어하셨지만, 오빠의 졸업식 때는 어림없었다. 누구보다 들뜬 할머니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당당히 내빈석 의자에 앉으셨다나. 먼저 오신 담당 교사가 여기는 내빈석이니 학부모들이 서 있는 쪽으로 가셔야 한다고 했을 때는 강당 안이 울릴 정도의 목소리로 ‘한이가 우리 손자요! 한이가 우리 손자요!’하셨다고 했다. 물론 오빠는 할머니가 자랑할 만큼 훌륭한 우등생이었지만, 붉어지는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고 했다. 일방적이기까지 한 할머니의 애정은 상대방을 더욱 냉랭하게 만들었으나 할머니는 그것조차 상관이 없는 눈치였다.

할머니와의 동거는 예상외로 편했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별로 관심 없는 할머니의 성격 덕분이었다. 할머니가 가져온 물건이라곤 옷장 하나와 TV밖에 없었는데도 방은 점점 할머니의 냄새로 가득 찼다. 우리는 그냥 서로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곧, 할머니 방에 내가 얹혀 사는 꼴이 되었다. 할머니가 하는 일은 주로 TV를 보는 일이었다. 물론 초저녁부터 그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이 허다했지만, TV를 껐다가 몇 번 타박을 받은 이후로는 그냥 두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 곁에서 친구에게 빌린 하이틴 체험 수기 같은 걸 읽거나, 펜 벗(편지를 주고받는 게 유행했었다)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그날도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뭔가를 긁적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TV를 보시던 할머니가 내 눈앞으로 종이와 볼펜을 내밀었다. 저 노래 가사 좀 적어조라. TV 화면에는 할머니가 즐겨보시는 사극 드라마의 주제곡이 자막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짝 귀찮긴 했으나 얼른 가사를 적어드렸다. 내가 적은 가사를 받은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늘고 뾰족한 음색이지만 제법 잘 따라 부르셨다. 내가 감탄을 표하자마자 할머니는 숨겨뒀던 간식 바구니에서 오징어 다리 하나를 쭉 뜯어 내밀었다. 이가 튼튼하신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가끔 마주치는 오빠한테도 하나씩 건네셨으리라. 할머니와 나는 오징어 다리를 뜯으며 그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얼굴에 소녀 같은 웃음이 번졌다. 우와~ 할머니 이렇게 노래 잘 부르는지 몰랐네요. 내 한마디에 할머니는 우쭐대는 아이처럼 볼이 부풀어 옛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내, 일본말도 할 줄 안다. 지금은 다 까묵었지만. 아빠는 오또상이고, 엄마는 오마상이고, 할아버지는 오지상이고. 그때는 소학교에서 다 일본말로 했는데...


할머니가 작은 빌라로 이사를 가신 건, 장가를 안 간 막내 삼촌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였다. 물 묻은 손을 훔치며 전화 한 통을 받으시고 나가신 할머니는 내게 인사도 없이 떠나셨다. 까마귀가 울더마, 아침부터 까마귀가 울더마, 그 말만 반복하시며 울상이 되어 집을 나가신 후 돌아오지 않으셨다. 며칠 후, 학교수업이 끝나고 온 내 방에는 할머니의 옷장과 TV가 사라지고 없었다. 할머니가 교회에 들고 다니시던 가방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가방엔 성경책과 찬송가, 돋보기안경이 들어있었다. 그랬다. 할머니는 막내 삼촌의 죽음이 조상을 버리고 교회를 다닌 아버지 때문이라, 아니 정확히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교회를 다니게 된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신 듯했다. 그 이후로 수년 동안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할머니는 삼촌의 사망 보험금으로 얻은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사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지나가면 수군거렸다. 방 세 칸짜리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자식들 고생한 돈으로 몸에 좋은 거 다 챙겨 먹고 저렇게 건강하다고, 아들 먼저 보내고도 세상 편하게 사는 할머니라고 했다.


할머니를 다시 만난 건 2003년. 아버지가 교회를 세운 후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첫출발의 긴장됨과 설렘이 경건한 분위기 속에 응집되어 있었다. 그 고요함을 뚫고, 벌컥 예배실 문이 열렸다. 할머니였다. 아이고, 내가 왔다. 내가. 내사 이제는 여기만 올끼다. 이제는 다른 데 안 갈끼다. 등장마저도 부산했으나 예상 밖의 등장에 모두 다 놀랐다. 강단에 있는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시며 할머니가 돌아왔음에 감사하셨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간절하셨고 누구보다 열심이셨다. 30분을 걸어서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나오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침 일찍 대문 밖에 소금을 뿌리시고 달밤에 정안수 앞에서 손이 닳도록 빌던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 열심의 시작과 끝에 나의 아버지, 아니 할머니의 아들, 그것도 장남인 아들이 있었다. 할머니의 기도는 기승전(起承轉), 우리 목사님이 잘되는 것이었다. 이제 할머니에게 장남은 아무개가 아니라 '우리 목사'였다. 다른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장남이 낳은 장남, 오빠를 그렇게 편애하신 것도 같은 맥락인지, 그제야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종교와도 상관없는 고집스런 신앙이었다.


할머니는 종종 ‘으이그 내가 이리 오래 산다, 자는 잠에 가야 될낀데’하며 혀를 끌끌 차곤 하셨다. 그러던 할머니가 갑자기 넘어졌다. 이 연세에는 수술이 불가하다는 의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청년같이 일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세월은 자연스럽게 노화를 진행시켰고, 검버섯이 오른 할머니의 얼굴은 더 깊은 주름으로 어두워졌다. 얼마 뒤 바닥에 넘어져 같은 곳을 다친 할머니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셨다. 가족 중 누구도 할머니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요양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다행히 남은 가족을 힘들게 할 만큼 오래 계시지는 않았다. 자기 자리를 재빨리 낚아채듯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셨다.


아무도 울지 않는 빈소는 썰렁했다. 슬픔보다는 고단한 침묵이 공간을 메웠다. 남은 삶을 사는 할머니의 자식들마저 온전히 할머니 곁에 없었다. 남편의 오랜 병시중을 하는 큰고모와 다리 수술을 한 둘째 고모는 빈소에도 보이지 않았다. 치매에 걸렸다는 작은 고모는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눈치다. 자식마저 슬퍼하지 않는 할머니의 죽음이 왠지 쓸쓸했다. 생전에 고집스럽게 움켜쥐고 있던 할머니의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누구에게도 살갑게 기억되지 못하는 할머니의 존재가, 그저 바람처럼 지나가 버린 한 인생의 쓸쓸함이 길게 내 마음을 할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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